목 졸려 죽은 아내..."그녀는 간첩이었다"
[국가의 거짓말⑤] 희대의 여간첩 '수지 김' 사건
'국가'는 양 날의 검입니다. 국가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서 사회를 통제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습니다. 이 서슬이 퍼런 검을 누가 이용하느냐에 따라 민중들의 삶은 큰 굴곡과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기득권층이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국가'라는 정치권력을 사용할 때는 항상 '거짓말'이 존재했습니다. 그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고 기만해 자신들의 잇속을 챙겼습니다. '국가의 거짓말'이라는 연재기사를 통해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여다보고 혼란의 시대에 국가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자 말>
[거짓말] '수지 김'은 북한공작원, 한국 상사원 남편을 납북하려 했다
1987년 1월 8일, 북한 공작조직이 홍콩에 살고 있는 한국 상사원 윤태식씨를 납북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북한의 공작조직은 윤씨에게 "당신의 부인 수지 김을 일본의 술집에 팔아넘기겠다"고 협박해 싱가포르 주재 북한 대사관에 유인한 뒤 그에게 스위스로 망명해 기자회견을 열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윤씨에게 "과거 유성환 의원과 문익환 목사에 정치자금을 댄 것이 문제가 돼 한국에서의 영화 사업이 망했으며 이 때문에 홍콩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한국 당국으로부터 부당한 신변위협을 받았다"고 망명이유를 내세우라고 지시하기도 했죠. 그런데 알고 보니 아내 수지 김도 북한 공작원이었으며 윤씨 망명공작을 위해 '미인계'를 써서 그와 결혼한 것으로 밝혀졌지 뭡니까. 그러나 윤씨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천신만고 끝에 탈출에 성공, 자유대한의 품에 무사히 다시 안겼습니다.
[진실] '수지 김'은 여간첩의 누명을 쓴, 살인사건 피해자일 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윤태식은 살인자다. 북한에 납치될 뻔한 적도 없다. 그저 낯선 이국 홍콩에서, 돈 때문에 힘없는 아내를 무참히 살해한 연하의 남편일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 살인자가 고국에서 '반공투사'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을까. 남편에게 목숨을 빼앗긴 비련의 여인 수지 김은 어떻게 해서 갑작스럽게 남편을 북한으로 납치하려한 '여간첩'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을까. 바로 그들의 조국, 대한민국이 그렇게 만들었다.
수지 김의 원래 이름은 김옥분이다. 그녀는 1952년 충북 충주에서 가난한 농부의 1남 6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가난에 쫓겨 갓 스물의 나이에 상경한 김옥분은 밥벌이를 위해 시내버스 안내양, 호스티스 등 일자리를 가리지 않고 억척스럽게 일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아마 김옥분에겐 탈출구가 절실했을 것이다. 그때 떠오른 곳이 홍콩이었다. 결국 그녀는 1976년 중국계 남성 량칭화와 위장 결혼해 홍콩으로 나가게 됐지만 홍콩에서의 삶도 서울에서와 그리 다를 바 없었다.
또 다시 호스티스가 된 김옥분은 이때부터 '수지 김'이란 이름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던 중 그녀는 운명의 남자를 만나게 된다. 1986년 비디오 수입업을 하기 위해 홍콩에 온 윤태식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 것. 그녀는 이 여섯 살 연하의 남자가 자신을 살해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신혼이 채 세 달도 지나기 전인 1987년 1월 3일 새벽, 윤태식의 사업자금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다 홍콩 자택에서 살해된다. 둔기로 맞아 실신한 상태로 여행용 가방을 묶는 끈에 의해 목이 졸린 채 서른다섯의 나이에 이국 땅에서 삶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시체는 침대 안 매트리스 안에 숨겨져 있다가 20일이 더 지난 후에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된 채로 세상에 나오게 된다.
억울하고도 슬픈 개인사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비극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했던 김옥분의 죽음은 엉뚱하게도 희대의 북한 여간첩 사건으로 왜곡되기 시작한 것이다. 김옥분이 피살된 1987년 1월은 권위주의적 군사정권 시기였다. 문익환 목사가 5·3 인천사태 배후조종자로 구속되고, 유성환 의원(당시 신민당)은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주의가 아닌 남북통일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하는 등 정치적 혼란기였다.
국민적인 저항도 극에 달하고 있었다. 당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던 시기에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이어 전두환의 '4·13 호헌선언' 직후 발생한 '이한열 치사사건'은 전두환 정권을 코너에 몰아넣고 있었다. 이때 기적처럼 나타난 인물이 윤태식이었다. 그는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나타나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사주를 받은 여간첩 수지 김과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납치되었다가 감시 소홀을 틈타 탈출했다"고 거짓 신고했다.
이는 더할 나위 없이 전두환 정권의 입맛에 꼭 맞는, '안성맞춤형 진술'이었다.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국민의 저항을 일거에 잠재워줄 '국면전환용' 사건 아닌가. 전두환 정권은 그 즉시 이 사건을 '북한의 공작원인 수지 김이 미인계를 써서 해외 주재 한국 상사원을 납북하려 한 대공사건'으로 규정했다.
전두환 정권의 실정에 대한 비판으로 번쩍거리던 국민들의 눈은, 수지 김 사건을 계기로 이내 움츠러들었다. 거대한 외부의 적(북한)이 위협해오는 한, 내부의 적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사건은 당시 국민들에게 결과적으로 다시 한번 굳건한 반공의식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결국 김옥분의 죽음은, 전두환 정권에겐 '행운' 그 자체였던 셈이다.
민주화 바람 잠재울 사건... 전두환 정권의 '행운'
그렇다면 어떻게 평범한 여인의 죽음이 무시무시한 간첩사건으로 조작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모든 국민들이 이 거짓말에 깜빡 속아 넘어갈 수 있었을까. 이 거짓말의 시작은 굉장히 허술했다. 아내를 살해한 윤태식은 사실 처벌이 무서워 월북을 기도했다. 살해 다음 날 홍콩을 떠나 북한 대사관이 있는 싱가포르에 도착한 윤씨는 북한 대사관에 입북의사를 밝혔으나 거절당하고 만다. 그는 다시 미국 대사관으로 찾아가 망명의사를 밝혔지만, 한국 대사관으로 신병이 넘겨졌다.
대사관에서 안기부 요원 등으로부터 조사를 받은 윤씨는 결국 아내 살해와 입북 시도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아내는 북한 공작원으로 그와 함께 조총련계 공작원들에 의해 납북될 뻔했다가 탈출했다"고 거짓 진술을 하고 만다. 그의 거짓 진술은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의 전신)의 도움을 받아 언론에 대서특필된다. 안기부는 그것도 모자라 윤씨의 기자회견까지 두 차례씩이나(태국 방콕과 서울에서) 마련했다.
기자회견을 마치면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될 줄 알았던 윤씨, 그러나 김포공항에서 한 기자회견 뒤 곧바로 안기부 남산분실로 연행되어 홍콩을 떠난 이후 행적을 집중적으로 추궁받게 된다. 안기부 직원 앞에서도 기자회견 때와 같은 거짓말을 했던 윤씨는 "북한은 그런 식으로 공작하지 않는다"며 몽둥이를 휘두르는 안기부 직원에게 흠씬 두드려 맞은 후, 다음날 새벽 "내가 아내를 살해하고 처벌을 피하기 위해 자진월북을 시도했다"고 실토했다.
이때 안기부는 사실관계를 바로잡고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안기부는 진상발표를 하는 대신 철저히 수지 김 사건을 '대공사건'으로 만들어나갔다. 기자회견을 주선하는 과정에서 윤씨에게 싱가포르 주재 미국 대사관에 들렀던 사실까지 숨기도록 지시했으니 말이다.
또 이후 4개월간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은 윤씨는 살인, 납북미수, 폭행치사 등 3가지 경우에 대한 시나리오를 숙지하는 교육까지 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 후에도 안기부는 윤씨를 10여 년간 출국금지 시키는 등 지속적으로 관리했다. 이런 뻔뻔한 행동을 저지른 안기부에게도 나름의 변명거리가 있다.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장세동이 한 말을 옮겨 적는다.
"정확한 일자는 생각나지 않지만 대공수사국장이 저에게 윤태식의 자백 내용을 보고했습니다. 당시 보고를 받는 순간 너무 황당해서 짜증이 난 상태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당시는 남북한이 서로 헐뜯는 민감한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의 역선전 빌미를 주지 말고 상황을 고려해서 적절한 시기를 선택해 잘 처리하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사법처리를 할 적당한 시점까지는 일단 덮어두고 있으라는 의미였습니다.
물론 허위 기자회견을 한 후라 '조직이 망신을 당하겠구나' 하는 가벼운 부담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관계자들이 윤태식을 조용히 검찰에 송치할 걸로 알았죠. 사실 윤태식은 평범한 홍콩교민이고 정보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처리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해 5월 26일 갑자기 안기부장 직위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윤태식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떠났던 게 아쉽습니다."
13년이 지나 드러난 진실... "사건을 묻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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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윤태식은 살인자로서 법의 처벌을 받는 대신 국가에 의해 '반공투사'로서의 이미지를 얻은 채 석방됐다. 그리고 1987년 1월 26일 밤, 북한 공작원으로 지목된 김옥분은 홍콩 카오룽(九龍) 지역 내 자신의 아파트에서 숨진 상태로 발견된다. 이때도 윤씨는 "내가 그들의 납치에서 벗어나 싱가포르 한국 대사관으로 피신하자 조총련이 나 대신 아내를 보복 살해한 것 같다"고 거짓말했다. 그러나 김옥분의 가족들은 김씨는 간첩이 아니며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뿐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였고, 홍콩 경찰 역시 윤씨를 범인으로 지목하였다.
홍콩 경찰은 한국에 수사요청을 했으나 한국의 협조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김옥분의 억울함은 영영 풀리지 않을 듯 보였다. 하지만 <신동아> 이정훈 기자의 추적으로 상황은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1995년 한 언론계 선배의 귀띔을 받고 이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한 이정훈 기자는 당시 싱가포르 대사관에 근무했던 사람들과 김옥분의 가족들을 만나면서 사건을 한 꺼풀씩 파헤쳐나갔다.
결국 취재를 시작한 지 약 5년 후인 2000년 1월 <신동아>의 보도를 시작으로, 한 달 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이 사건을 보완 취재해 보도하며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특히 SBS는 이 사건을 수사해온 홍콩 경찰에 국내 언론 최초로 접근해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SBS는 남편 윤태식이 범인이라는 심증을 굳히고도 이 부분을 방송에 내보낼 수 없었다.
이 사건을 주도적으로 조작한 안기부와 그 후신인 국정원(국가정보원)이 취재에 협조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윤태식이 법원에 신청한 방송금지 가처분이 받아들여지면서 결정적인 대목이 방송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김옥분의 가족들이 방송을 본 뒤 용기를 내어 2000년 3월 윤태식을 검찰에 고소하게 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그해 12월 서울지검 외사부가 홍콩 경찰의 '수지 김 살인사건' 수사 자료를 입수하며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고, 2001년 10월 24일 윤씨를 긴급체포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또 다시, 진실을 파헤칠 기회를 국가가 묻어버렸다는 사실이 후에 밝혀졌다. 2000년 1월 28일, 홍콩 주재 외사협력관 조아무개 경정은 김옥분 가족들의 제보에 따라 홍콩 현지에서 취재를 벌이던 SBS 취재팀과 만났다고 한다. "윤씨가 부부싸움 중 김씨를 살해했는데 납북미수 사건으로 조작됐다는 의혹이 있다"는 이야기를 취재진에게서 전해 들은 그는 보고서를 작성해 당시 경찰청 외사관리관이던 김아무개 치안감에게 보내게 된다.
보고서에는 "홍콩 경찰이 수지 김의 유력한 살해 용의자로 윤씨를 지목하고 있으며 사법공조조약에 따라 한국 측에 관련증거 일체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에 따라 김 치안감은 1월 29일 경찰청 외사분실에 사건을 배당하고 내사토록 지시해 사건 발생 13년 만에 수지김 피살사건에 대한 경찰 내사가 시작됐다.
비슷한 시기 같은 정보를 입수한 김승일 당시 국정원 대공수사국장도 이를 엄익준 당시 2차장(작고)에게 보고했지만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될 경우에 따른 국제문제, 남북문제, 국가정보원의 위상문제 등을 고려, 기존 방침대로 단순 살인사건임을 발표하지 말고 보안을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국정원은 이어 경찰이 2월 14일 윤씨에 관한 조사기록 열람을 요청함에 따라 경찰의 내사사실을 알게 됐고, 엄 전 차장은 "사실이 밝혀질 경우 국제적으로나 북한에게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무영 경찰청장을 만나 수지 김 사건을 설명하고 수지 김 사건이 공개되면 곤란하다는 뜻을 전하라"고 김 전 국장에게 지시했다.
이에 따라 김 전 국장은 다음 날 오전 10시께 이무영 당시 경찰청장을 방문, "국정원 방침 상 자료제공은 힘들다. 윤씨가 87년 처를 살해하고 이를 대공 사건으로 몰고 갔기 때문에 언론에 공개되면 외교 및 대북문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사건내막을 설명했다. "사건을 묻어달라"는 김 전 국장의 요청을 받아들인 이 전 청장은 다음날인 2월15일 김 전 치안감을 불러 "수지김 사건을 국정원에 넘겨주라"고 지시함으로써 수지김 사건에 대한 내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윤태식은 감옥에 갔지만... 풍비박산 난 김씨의 가족
그 사이 윤태식은 지문감식의 첨단 기술을 가진 '패스21'의 벤처기업인으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언론인들에게 돈과 회사 주식을 뿌렸다. 돈을 받은 언론인들은 윤태식을 유망한 벤처기업가로 포장해 보도하였다. 한 경제지의 전 사장은 뇌물로 받은 주식 수만 주를 매각하여 64억 원의 차익을 남겼고, 그 대가로 윤태식을 정관계 거물들에게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언론보도를 믿고 패스21의 주식을 산 보통 사람들은 졸지에 쪽박을 찼다. 이른바 '윤태식 게이트'가 터진 것이다.
주가조작 및 가장납입 등을 통해 수십억 원의 부당이익을 챙긴 뒤 이 돈으로 정치권을 상대로 로비를 벌인 혐의에 대한 처벌과 더불어, 그는 마침내 살인행위에 대한 처벌까지 받게 되었다. 검찰은 사체의 머리 부분이 베갯잇으로 가려져 있었고 김씨가 혀를 깨문 흔적이 있는 등 교살(絞殺)의 흔적을 포착, 취조를 통해 윤씨로부터 범행사실을 자백 받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서울지검 외사부는 김씨가 남편인 윤태식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결론 짓고 2001년 11월 윤씨를 살인 및 시체 유기 등의 혐의로 전격 구속 기소했다. 그 후 2002년 5월, 검찰은 윤씨에 대한 결심공판에서 살인 혐의에 대해서는 무기징역을, 사기 등 나머지 혐의에 대해서는 징역 3년씩 모두 6년을 구형했다. 이어 2003년 5월 대법원 상고심에서 윤씨는 징역 15년 6월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한편 억울하게 '간첩가족'으로 몰려 온갖 고초를 겪어온 김옥분의 유족들은 2002년 5월 국가 등을 상대로 108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그리고 서울지법 민사합의41부는 2003년 8월 14일 "국가는 유족들에게 42억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국가기관인 국가안전기획부는 김씨가 윤씨에게 살해됐고, 김씨가 북한 공작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남북관계 등을 고려한다는 명목 아래 진실을 은폐·조작함으로서, 원고들이 김씨 죽음의 진상을 밝혀내고 법적으로 고인의 원한을 풀어줄 기회를 박탈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면 뭐하랴. 승소했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김씨 유족들은 그 세월 동안 온 가정이 풍비박산 났다. 어머니 김성순씨는 사건 당시 안기부에 끌려가 욕설과 구타를 당한 뒤 실어증을 앓다가 1997년 화병으로 사망했다. 언니 김옥녀씨는 '간첩가족'의 낙인이 찍혀 직장에서 해고된 뒤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 같은 해 겨울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김씨의 오빠 김만식씨 역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택시 운전을 하면서 어렵게 살다가 주위에서 당한 비인간적 대우를 참지 못해 알콜중독자가 된 후 사망했고, 그의 아들은 주변의 눈총 때문에 중학교 2학년 무렵 중퇴했다. 여동생들도 이혼, 울화병과 노이로제, 대인 기피 증세에 시달려야 했다.
만약 김옥분의 가족들이 많이 배우고 힘이 있었다면, 과연 국가가 나서서 한 가족을 '국면전환용'으로 희생시킬 수 있었을까. 혹시 김옥분이 '수지 김'이라는 이름의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인권쯤은 간단히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었다고 판단했던 건 아니었을까. 수지 김 사건을 '정치적 대공사건'으로 조작하는 데 참여한 1987년 당시의 안기부뿐 아니라 민주적이라는 '국민의 정부'하에서도 그에 대한 재수사를 방해할 정도로 대한민국은 오만하고 잔인했다.
김옥분의 가족들은 보상금 42억 원으로 그들을 간단하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해당한 것도 모자라 간첩이라는 허울을 억울하게 뒤집어쓴 채 14년 동안 울면서 구천을 헤맸을 김옥분의 영혼도 대한민국을 용서했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 2003년 8월 26일 충북 충주시 창룡사에서 열린 수지 김 천도제에서 동생 등 유가족들이 술잔을 올리고 있다. ⓒ 연합뉴스
[거짓말] '수지 김'은 북한공작원, 한국 상사원 남편을 납북하려 했다
그들은 심지어 윤씨에게 "과거 유성환 의원과 문익환 목사에 정치자금을 댄 것이 문제가 돼 한국에서의 영화 사업이 망했으며 이 때문에 홍콩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한국 당국으로부터 부당한 신변위협을 받았다"고 망명이유를 내세우라고 지시하기도 했죠. 그런데 알고 보니 아내 수지 김도 북한 공작원이었으며 윤씨 망명공작을 위해 '미인계'를 써서 그와 결혼한 것으로 밝혀졌지 뭡니까. 그러나 윤씨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천신만고 끝에 탈출에 성공, 자유대한의 품에 무사히 다시 안겼습니다.
[진실] '수지 김'은 여간첩의 누명을 쓴, 살인사건 피해자일 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윤태식은 살인자다. 북한에 납치될 뻔한 적도 없다. 그저 낯선 이국 홍콩에서, 돈 때문에 힘없는 아내를 무참히 살해한 연하의 남편일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 살인자가 고국에서 '반공투사'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을까. 남편에게 목숨을 빼앗긴 비련의 여인 수지 김은 어떻게 해서 갑작스럽게 남편을 북한으로 납치하려한 '여간첩'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을까. 바로 그들의 조국, 대한민국이 그렇게 만들었다.
수지 김의 원래 이름은 김옥분이다. 그녀는 1952년 충북 충주에서 가난한 농부의 1남 6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가난에 쫓겨 갓 스물의 나이에 상경한 김옥분은 밥벌이를 위해 시내버스 안내양, 호스티스 등 일자리를 가리지 않고 억척스럽게 일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아마 김옥분에겐 탈출구가 절실했을 것이다. 그때 떠오른 곳이 홍콩이었다. 결국 그녀는 1976년 중국계 남성 량칭화와 위장 결혼해 홍콩으로 나가게 됐지만 홍콩에서의 삶도 서울에서와 그리 다를 바 없었다.
또 다시 호스티스가 된 김옥분은 이때부터 '수지 김'이란 이름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던 중 그녀는 운명의 남자를 만나게 된다. 1986년 비디오 수입업을 하기 위해 홍콩에 온 윤태식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 것. 그녀는 이 여섯 살 연하의 남자가 자신을 살해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신혼이 채 세 달도 지나기 전인 1987년 1월 3일 새벽, 윤태식의 사업자금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다 홍콩 자택에서 살해된다. 둔기로 맞아 실신한 상태로 여행용 가방을 묶는 끈에 의해 목이 졸린 채 서른다섯의 나이에 이국 땅에서 삶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시체는 침대 안 매트리스 안에 숨겨져 있다가 20일이 더 지난 후에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된 채로 세상에 나오게 된다.
억울하고도 슬픈 개인사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비극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했던 김옥분의 죽음은 엉뚱하게도 희대의 북한 여간첩 사건으로 왜곡되기 시작한 것이다. 김옥분이 피살된 1987년 1월은 권위주의적 군사정권 시기였다. 문익환 목사가 5·3 인천사태 배후조종자로 구속되고, 유성환 의원(당시 신민당)은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주의가 아닌 남북통일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하는 등 정치적 혼란기였다.
국민적인 저항도 극에 달하고 있었다. 당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던 시기에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이어 전두환의 '4·13 호헌선언' 직후 발생한 '이한열 치사사건'은 전두환 정권을 코너에 몰아넣고 있었다. 이때 기적처럼 나타난 인물이 윤태식이었다. 그는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나타나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사주를 받은 여간첩 수지 김과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납치되었다가 감시 소홀을 틈타 탈출했다"고 거짓 신고했다.
이는 더할 나위 없이 전두환 정권의 입맛에 꼭 맞는, '안성맞춤형 진술'이었다.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국민의 저항을 일거에 잠재워줄 '국면전환용' 사건 아닌가. 전두환 정권은 그 즉시 이 사건을 '북한의 공작원인 수지 김이 미인계를 써서 해외 주재 한국 상사원을 납북하려 한 대공사건'으로 규정했다.
전두환 정권의 실정에 대한 비판으로 번쩍거리던 국민들의 눈은, 수지 김 사건을 계기로 이내 움츠러들었다. 거대한 외부의 적(북한)이 위협해오는 한, 내부의 적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사건은 당시 국민들에게 결과적으로 다시 한번 굳건한 반공의식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결국 김옥분의 죽음은, 전두환 정권에겐 '행운' 그 자체였던 셈이다.
민주화 바람 잠재울 사건... 전두환 정권의 '행운'
▲ 2002년 수지김 사건 은폐 규탄 기자회견 ⓒ 이주영
그렇다면 어떻게 평범한 여인의 죽음이 무시무시한 간첩사건으로 조작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모든 국민들이 이 거짓말에 깜빡 속아 넘어갈 수 있었을까. 이 거짓말의 시작은 굉장히 허술했다. 아내를 살해한 윤태식은 사실 처벌이 무서워 월북을 기도했다. 살해 다음 날 홍콩을 떠나 북한 대사관이 있는 싱가포르에 도착한 윤씨는 북한 대사관에 입북의사를 밝혔으나 거절당하고 만다. 그는 다시 미국 대사관으로 찾아가 망명의사를 밝혔지만, 한국 대사관으로 신병이 넘겨졌다.
대사관에서 안기부 요원 등으로부터 조사를 받은 윤씨는 결국 아내 살해와 입북 시도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아내는 북한 공작원으로 그와 함께 조총련계 공작원들에 의해 납북될 뻔했다가 탈출했다"고 거짓 진술을 하고 만다. 그의 거짓 진술은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의 전신)의 도움을 받아 언론에 대서특필된다. 안기부는 그것도 모자라 윤씨의 기자회견까지 두 차례씩이나(태국 방콕과 서울에서) 마련했다.
기자회견을 마치면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될 줄 알았던 윤씨, 그러나 김포공항에서 한 기자회견 뒤 곧바로 안기부 남산분실로 연행되어 홍콩을 떠난 이후 행적을 집중적으로 추궁받게 된다. 안기부 직원 앞에서도 기자회견 때와 같은 거짓말을 했던 윤씨는 "북한은 그런 식으로 공작하지 않는다"며 몽둥이를 휘두르는 안기부 직원에게 흠씬 두드려 맞은 후, 다음날 새벽 "내가 아내를 살해하고 처벌을 피하기 위해 자진월북을 시도했다"고 실토했다.
이때 안기부는 사실관계를 바로잡고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안기부는 진상발표를 하는 대신 철저히 수지 김 사건을 '대공사건'으로 만들어나갔다. 기자회견을 주선하는 과정에서 윤씨에게 싱가포르 주재 미국 대사관에 들렀던 사실까지 숨기도록 지시했으니 말이다.
또 이후 4개월간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은 윤씨는 살인, 납북미수, 폭행치사 등 3가지 경우에 대한 시나리오를 숙지하는 교육까지 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 후에도 안기부는 윤씨를 10여 년간 출국금지 시키는 등 지속적으로 관리했다. 이런 뻔뻔한 행동을 저지른 안기부에게도 나름의 변명거리가 있다.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장세동이 한 말을 옮겨 적는다.
"정확한 일자는 생각나지 않지만 대공수사국장이 저에게 윤태식의 자백 내용을 보고했습니다. 당시 보고를 받는 순간 너무 황당해서 짜증이 난 상태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당시는 남북한이 서로 헐뜯는 민감한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의 역선전 빌미를 주지 말고 상황을 고려해서 적절한 시기를 선택해 잘 처리하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사법처리를 할 적당한 시점까지는 일단 덮어두고 있으라는 의미였습니다.
물론 허위 기자회견을 한 후라 '조직이 망신을 당하겠구나' 하는 가벼운 부담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관계자들이 윤태식을 조용히 검찰에 송치할 걸로 알았죠. 사실 윤태식은 평범한 홍콩교민이고 정보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처리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해 5월 26일 갑자기 안기부장 직위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윤태식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떠났던 게 아쉽습니다."
13년이 지나 드러난 진실... "사건을 묻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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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윤태식은 살인자로서 법의 처벌을 받는 대신 국가에 의해 '반공투사'로서의 이미지를 얻은 채 석방됐다. 그리고 1987년 1월 26일 밤, 북한 공작원으로 지목된 김옥분은 홍콩 카오룽(九龍) 지역 내 자신의 아파트에서 숨진 상태로 발견된다. 이때도 윤씨는 "내가 그들의 납치에서 벗어나 싱가포르 한국 대사관으로 피신하자 조총련이 나 대신 아내를 보복 살해한 것 같다"고 거짓말했다. 그러나 김옥분의 가족들은 김씨는 간첩이 아니며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뿐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였고, 홍콩 경찰 역시 윤씨를 범인으로 지목하였다.
홍콩 경찰은 한국에 수사요청을 했으나 한국의 협조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김옥분의 억울함은 영영 풀리지 않을 듯 보였다. 하지만 <신동아> 이정훈 기자의 추적으로 상황은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1995년 한 언론계 선배의 귀띔을 받고 이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한 이정훈 기자는 당시 싱가포르 대사관에 근무했던 사람들과 김옥분의 가족들을 만나면서 사건을 한 꺼풀씩 파헤쳐나갔다.
결국 취재를 시작한 지 약 5년 후인 2000년 1월 <신동아>의 보도를 시작으로, 한 달 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이 사건을 보완 취재해 보도하며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특히 SBS는 이 사건을 수사해온 홍콩 경찰에 국내 언론 최초로 접근해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SBS는 남편 윤태식이 범인이라는 심증을 굳히고도 이 부분을 방송에 내보낼 수 없었다.
이 사건을 주도적으로 조작한 안기부와 그 후신인 국정원(국가정보원)이 취재에 협조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윤태식이 법원에 신청한 방송금지 가처분이 받아들여지면서 결정적인 대목이 방송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김옥분의 가족들이 방송을 본 뒤 용기를 내어 2000년 3월 윤태식을 검찰에 고소하게 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그해 12월 서울지검 외사부가 홍콩 경찰의 '수지 김 살인사건' 수사 자료를 입수하며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고, 2001년 10월 24일 윤씨를 긴급체포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또 다시, 진실을 파헤칠 기회를 국가가 묻어버렸다는 사실이 후에 밝혀졌다. 2000년 1월 28일, 홍콩 주재 외사협력관 조아무개 경정은 김옥분 가족들의 제보에 따라 홍콩 현지에서 취재를 벌이던 SBS 취재팀과 만났다고 한다. "윤씨가 부부싸움 중 김씨를 살해했는데 납북미수 사건으로 조작됐다는 의혹이 있다"는 이야기를 취재진에게서 전해 들은 그는 보고서를 작성해 당시 경찰청 외사관리관이던 김아무개 치안감에게 보내게 된다.
보고서에는 "홍콩 경찰이 수지 김의 유력한 살해 용의자로 윤씨를 지목하고 있으며 사법공조조약에 따라 한국 측에 관련증거 일체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에 따라 김 치안감은 1월 29일 경찰청 외사분실에 사건을 배당하고 내사토록 지시해 사건 발생 13년 만에 수지김 피살사건에 대한 경찰 내사가 시작됐다.
비슷한 시기 같은 정보를 입수한 김승일 당시 국정원 대공수사국장도 이를 엄익준 당시 2차장(작고)에게 보고했지만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될 경우에 따른 국제문제, 남북문제, 국가정보원의 위상문제 등을 고려, 기존 방침대로 단순 살인사건임을 발표하지 말고 보안을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국정원은 이어 경찰이 2월 14일 윤씨에 관한 조사기록 열람을 요청함에 따라 경찰의 내사사실을 알게 됐고, 엄 전 차장은 "사실이 밝혀질 경우 국제적으로나 북한에게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무영 경찰청장을 만나 수지 김 사건을 설명하고 수지 김 사건이 공개되면 곤란하다는 뜻을 전하라"고 김 전 국장에게 지시했다.
이에 따라 김 전 국장은 다음 날 오전 10시께 이무영 당시 경찰청장을 방문, "국정원 방침 상 자료제공은 힘들다. 윤씨가 87년 처를 살해하고 이를 대공 사건으로 몰고 갔기 때문에 언론에 공개되면 외교 및 대북문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사건내막을 설명했다. "사건을 묻어달라"는 김 전 국장의 요청을 받아들인 이 전 청장은 다음날인 2월15일 김 전 치안감을 불러 "수지김 사건을 국정원에 넘겨주라"고 지시함으로써 수지김 사건에 대한 내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윤태식은 감옥에 갔지만... 풍비박산 난 김씨의 가족
▲ 2002년 1월, 패스21 홍보성 기사를 써주는 대가로 윤태식씨로부터 현금과 주식을 받은 혐의로 아무개경제신문 최아무개 부장이 구속돼 서울구치소로 가는 차에 타고 있다. ⓒ 이종호
그 사이 윤태식은 지문감식의 첨단 기술을 가진 '패스21'의 벤처기업인으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언론인들에게 돈과 회사 주식을 뿌렸다. 돈을 받은 언론인들은 윤태식을 유망한 벤처기업가로 포장해 보도하였다. 한 경제지의 전 사장은 뇌물로 받은 주식 수만 주를 매각하여 64억 원의 차익을 남겼고, 그 대가로 윤태식을 정관계 거물들에게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언론보도를 믿고 패스21의 주식을 산 보통 사람들은 졸지에 쪽박을 찼다. 이른바 '윤태식 게이트'가 터진 것이다.
주가조작 및 가장납입 등을 통해 수십억 원의 부당이익을 챙긴 뒤 이 돈으로 정치권을 상대로 로비를 벌인 혐의에 대한 처벌과 더불어, 그는 마침내 살인행위에 대한 처벌까지 받게 되었다. 검찰은 사체의 머리 부분이 베갯잇으로 가려져 있었고 김씨가 혀를 깨문 흔적이 있는 등 교살(絞殺)의 흔적을 포착, 취조를 통해 윤씨로부터 범행사실을 자백 받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서울지검 외사부는 김씨가 남편인 윤태식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결론 짓고 2001년 11월 윤씨를 살인 및 시체 유기 등의 혐의로 전격 구속 기소했다. 그 후 2002년 5월, 검찰은 윤씨에 대한 결심공판에서 살인 혐의에 대해서는 무기징역을, 사기 등 나머지 혐의에 대해서는 징역 3년씩 모두 6년을 구형했다. 이어 2003년 5월 대법원 상고심에서 윤씨는 징역 15년 6월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한편 억울하게 '간첩가족'으로 몰려 온갖 고초를 겪어온 김옥분의 유족들은 2002년 5월 국가 등을 상대로 108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그리고 서울지법 민사합의41부는 2003년 8월 14일 "국가는 유족들에게 42억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국가기관인 국가안전기획부는 김씨가 윤씨에게 살해됐고, 김씨가 북한 공작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남북관계 등을 고려한다는 명목 아래 진실을 은폐·조작함으로서, 원고들이 김씨 죽음의 진상을 밝혀내고 법적으로 고인의 원한을 풀어줄 기회를 박탈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면 뭐하랴. 승소했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김씨 유족들은 그 세월 동안 온 가정이 풍비박산 났다. 어머니 김성순씨는 사건 당시 안기부에 끌려가 욕설과 구타를 당한 뒤 실어증을 앓다가 1997년 화병으로 사망했다. 언니 김옥녀씨는 '간첩가족'의 낙인이 찍혀 직장에서 해고된 뒤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 같은 해 겨울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김씨의 오빠 김만식씨 역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택시 운전을 하면서 어렵게 살다가 주위에서 당한 비인간적 대우를 참지 못해 알콜중독자가 된 후 사망했고, 그의 아들은 주변의 눈총 때문에 중학교 2학년 무렵 중퇴했다. 여동생들도 이혼, 울화병과 노이로제, 대인 기피 증세에 시달려야 했다.
만약 김옥분의 가족들이 많이 배우고 힘이 있었다면, 과연 국가가 나서서 한 가족을 '국면전환용'으로 희생시킬 수 있었을까. 혹시 김옥분이 '수지 김'이라는 이름의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인권쯤은 간단히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었다고 판단했던 건 아니었을까. 수지 김 사건을 '정치적 대공사건'으로 조작하는 데 참여한 1987년 당시의 안기부뿐 아니라 민주적이라는 '국민의 정부'하에서도 그에 대한 재수사를 방해할 정도로 대한민국은 오만하고 잔인했다.
김옥분의 가족들은 보상금 42억 원으로 그들을 간단하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해당한 것도 모자라 간첩이라는 허울을 억울하게 뒤집어쓴 채 14년 동안 울면서 구천을 헤맸을 김옥분의 영혼도 대한민국을 용서했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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