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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청와대..."

[5·16쿠데타 50년, 박정희권력 평가⑮ ] 독재정권의 사생활문란 그리고 정인숙의 피살

등록|2011.12.14 17:23 수정|2011.12.14 18:48
5·16 군사 쿠데타 50년이 되는 시점에 박정희 통치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금의 대한민국에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해 따져봐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권력자들의 음모와 살생 게임, 야만적 고문과 공포정치, 한강의 기적의 실제 경제성적표, 그리고 대통령의 술과 여자...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를 일주일에 2회 정도 풀어나갈 예정이다. - 기자말

그녀가 들은 마지막 팝송 <제발 나 좀 놔줘요!>

1970년 3월 17일 오후 8시 30분, 서울 남산 중턱의 장충동 타워호텔 18층 나이트클럽. 바깥은 이른 봄기운이 스산하지만 눈까지 내려 데이트를 즐기는 청춘 남녀들에게 더 없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선사하는 듯했다. 아늑한 클럽 안에선 밴드가 팝송을 끊임없이 연주하고 있었다.

20대 중후반쯤 돼 보이는 한 여인이 스탠드에 홀로 앉아 연신 칵테일을 주문해 마신다. 연초록 원피스에 분홍 머플러를 맨 여인은 차림새와 다르게 왠지 우울해 보였다. 적당히 큰 키에 균형 잡힌 몸매, 하얗고 갸름한 얼굴이 보기 드문 미모다. 술을 몇 잔 마신 여인은 메모지에 신청곡을 써서 웨이터에게 내민다. 여인이 신청한 노래가 이내 애잔한 울림으로 클럽 안을 촉촉하게 적신다.

Please release me let me go 
제발 나 좀 떠나도록 놔줘요 
For I don't love you anymore
이젠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
I have found a new love dear
난 새로운 사랑을 찾았어요 
And I will always want her near
그녈 늘 내 곁에 두고 싶어요
Her lips are warm while yours are cold
당신 입술은 차갑지만 그녀 입술은 따듯해요 
Release me My darling let me go
제발 나 좀 떠나도록 놔줘요 
(……)

▲ 정인숙 ⓒ 연합뉴스


영국의 잉글버트 험퍼딩크가 불러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한 <Release me>다. 여인은 이 노래를 세 번이나 연속으로 틀어줄 것을 부탁했고 디스크자키도 선선히 그에 따랐다. 뭔가 내밀한 사연을 가진 듯, 여인은 칵테일과 노래를 음미하다가 오후 9시가 좀 지나 나이트클럽에서 일어섰다.

그로부터 두 시간 후인 오후 11시경, 새로 완공한 강변도로를 달리던 코로나 승용차가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부근을 지날 즈음 느닷없이 두 발의 총성이 울리더니 코로나가 멈춰 섰다. 운전자가 다리에 피를 흘린 채 절룩거리면서 나와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타고 급히 병원으로 갈 것을 부탁했다.

코로나 승용차 안에서는 현장에서 숨을 거둔 여인이 발견됐다. 연초록 원피스에 분홍색 머플러… 호텔 클럽에서 <Release me>를 신청해 듣던 바로 그 여인, 정인숙이었다. 당시 정인숙 피살사건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 뒤에도 두고두고 의문과 소문을 만들어낸 박정희 정권 시기 최대의 섹스 스캔들이었다.

검찰의 지휘를 받아 일 주일 남짓 수사한 경찰은 "정인숙이 요정에 나가면서 많은 남자들과 사귀었고, 심지어 아들까지 낳아 기르는 등 사생활이 좋지 않아 운전을 하던 오빠 정종욱이 나무랐으나 모욕적인 말을 하면서 반발하자 정종욱이 권총으로 살해했다"고 결과를 발표했다.

그녀의 오빠 "고위층이 뒤를 봐준다 해서 거짓 자백했다"

그러나 정인숙을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년 감옥살이를 한 뒤 1989년 출소한 그녀의 오빠 정종욱은 끈질기게 이 수사 결과를 전면 부인했다.

"나는 범인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내 동생을 죽일 수는 없다. 아버지가, 동생과 관계했던 고위층이 우리의 뒤를 봐준다고 했다면서 회유하기에 거짓 자백을 했을 뿐이다. 강변도로의 집 앞에 있던 괴한들이 총을 쏘았다. 내가 억울하지 않다면 수감생활까지 다 하고 나와서 "내가 쏘지 않았다"고 하겠느냐. 마지막으로 재심 청구를 해서 반드시 누명을 벗겠다."

꼭 정종욱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당시 검경의 수사 결과를 보면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정종욱의 옷소매에서 탄흔이 나왔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 결과를 증거로 유죄가 선고됐다. 그러나 후에 한 방송사의 특집 프로그램에서 실험해 보니 본인이 총을 직접 쏘지 않았어도 자동차 안에 총탄이 발사됐으면 옷에 탄흔은 묻어났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기보다 서둘러 종결짓고 덮으려 한 수사였다.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 가까이 된 1970년 5월 13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 1969년 9월, 박정희는 그의 세 번째 연임 길을 터놓기 위해 공화당 의원만으로 3선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그 후 국회는 마비상태가 장기화되다가 이듬해 5월 초 신민당 총재 유진산의 타협노선 때문에 다시 문을 열었다.

▲ 1991년 3월 6일 정일권 전 국무총리가 대한항공편으로 하와이로 출국하기 위해 김포공항을 나서며 한강변에서 의문의 죽음을 한 정인숙 여인의 아들 정성일씨의 친자 확인 소송에 대해 처음듣는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의원들의 대정부 질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전날 법무장관 이호가 정인숙 피살사건을 장황하게 보고한 데 대해 야당 의원들이 "이상한 태도"라며 계속 꼬집었다. 우선 의원들이 묻지도 않은 사건을 장관이 자진해서 길게 설명한 것이 화근이었다. 게다가 4월 7일 와우아파트 붕괴사고가 터져 33명이나 죽었는데도 정부 측 보고는 정인숙 피살사건에 더 집중돼 있었다. 장관들의 보고를 보면 국회 속기록도 정인숙 사건은 4페이지, 와우아파트 사고는 3페이지다.

야당 의원들은 "제 발이 저린 것 아니냐"고 비꼬았다. 당시 내로라는 권력자들 수십 명이 정인숙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풍문이 시중에 파다했기 때문이다. 거기엔 대통령 박정희, 국무총리 정일권,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경호실장 박종규 등이 포함됐다. 그 면면을 보면 모두가 5·16쿠데타세력이라는 것이 공통점이다.

이들은 당시 정권의 최고실력자들이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란 불가능했다. 개별적으로 일일이 조사할 수는 없었지만 사회 지배층이 단체로 연루된 섹스 스캔들이라는 점에서 최근의 장자연 성상납 사건과 유사했다. 그래도 그때는 언론사 사주 족벌의 이름이 거명되지는 않았다는 점이 달랐다. 그나마 기자들이 사건을 추적 보도했던 것은 그래서 가능했을 것이다.

"닭의 목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민주화 막을 수 없다는 격언과 동류

▲ 정인숙 피살 사건은 당시 박정흐 쿠데타 세력의 도덕성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당시 권력자들의 사생활 문란이 대중 앞에 드러난 게 바로 정인숙 피살 사건이었다. ⓒ 연합뉴스


신민당 의원 김상현이 국회 대정부 질의를 위해 단상에 올랐다. 그는 투사 이미지가 강한 소장파였다.

"정 여인에 관계된 사람이 스물여섯 명이나 된다고 하고 총리가 관계되었다, 대통령이 관계되었다, 이렇게까지 얘기가 돌아다닌다. 그런 판에 이 법무가 자진 보고하는 것이야말로 '꿩이 봄을 만나 저절로 우는' 격이요, 도둑이 제 발 저린 격 아닌가." 

"꿩이 봄을 만나 저절로 우는" 것은 "제 허물을 스스로 드러내어 화를 자초한다"는 뜻의 춘치자명(春雉自鳴)이다. 그만큼 시중에는 말로 이루 다 옮기기조차 민망한 섹스 스캔들에 관한 풍자가 난무하고 있었다. 야당이 굳이 정치공세를 펴지 않아도 정권 측이 자진해서 해명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상현은 여기서 '꿩과 봄'으로 정권의 난잡함을 풍자했는데, 그로부터 9년 뒤 김영삼은 박정희 정권이 자신의 <뉴욕타임스> 인터뷰 내용을 '국가모독죄'로 몰아 자신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하자 '닭과 새벽'으로 정권의 종말을 예언했다.

"닭의 목소리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제아무리 독재정권이 날뛰어도 민주화의 날이 멀지 않았다."

민주화 투쟁사에서 유명해진 이 격언은 이양우의 시에서 따온 말이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새벽은 언제나 원통을 굴러나와
지구 한 바퀴를 달려 나온 천사,
아침을 안겨 우리에게
희망찬 하루를 선사한다.
그것이 생의 찬미롭기엔
너나 할 것 없이 일터로 나간다.

(……)

닭의 목을 비틀어도
태양은 뜨지 않는가,
비방과 협박이 난무한다 해도
문학의 즐거움 동호회는
고고히 태어날 것이다.
보라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노호怒虎하며 노를 젓노라.

 --이양우,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중에서

박정희 권력이 무너진 10·26 거사는 안타깝게도 '민주화의 새벽'이 되지 못했다. 그 친위세력 전두환 일당에 의해 가증스러운 정권찬탈 내란을 겪어야 했다. 국민의 힘으로 만들어내지 못한 민주주의란 의미가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긴 셈이다.

그러나 길게 보았을 때 박정희 권력과 그 후계체제에 금을 낸 것은 역시 10·26이었고 거기엔 권력자들의 사생활 문란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그 권력자의 섹스 스캔들은 바로 정인숙 피살사건이 원조였고 이때 처음 국민 앞에 드러난 것이다.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 1991년 2월 28일, 3공화국 당시 한강변에서 의문의 피살체로 발견된 정인숙(당시 26세)씨의 혈육인 정성일(21,미LA거주)씨가 정일권씨가 아버지라는 친자확인 소송을 내기 위해 김포공항에 귀국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인숙이 피살된 직후 경찰이 서울 중구 필동 그녀의 집을 수색했을 때 그곳엔 그녀의 어머니와 세 살짜리 아이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처음에 아이를 정인숙의 동생이라고 했다. 나중에 수사가 본격화된 후 그 아이가 정인숙 소생임을 밝혔다. 아이의 이름은 처음엔 정승일이었다가 나중에 정성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에 관심을 집중했다. 온갖 설과 풍자가 돌아다녔다. 마침 한창이던 대학가의 봄 축제 무대에서도 정성일의 아버지가 과연 누구인가가 극화되곤 했다. 민심의 표출 양태는 항상 노래와 춤과 해학이다.

당시 널리 유행하던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노래가 어느새 가사가 바뀐 개사 가요로 대학가와 술집에서 애송되고 있었다. 이 풍자 가요는 국회 대정부 질의에 등장해 정치문제화되기에 이른다.

신민당 조윤형 의원이 등단했다. 그는 준비한 질의 원고와 국무위원석의 정일권 총리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풍자 가요를 시를 읊듯 낭송했다.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
나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영원히 우리만 알았을 것을
죽고 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성일이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고관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그대가 나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그렇게 모두가 밉지는 않았을 것을
죽고 나도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조윤형은 낭송을 마친 뒤 정일권을 정면으로 가리키며 직격탄을 날린다. 

"내가 존경하는 정 총리입니다마는, 지금 세상에서는 모두가 다 이 양반 아들이라고 그래…."

이날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은 정인숙 피살사건의 수사 결과에 많은 문제점을 제기했다. 검경의 수사가 워낙 날림이고 사전에 정해진 방향으로 간 것이어서 의문투성이였다. 무엇보다도 범행에 쓰인 결정적 물증인 권총이 발견되지 않았다. 사건 수사의 중요한 단서가 될 코로나 자동차를 비롯한 현장이 불과 2시간여 만에 번개작전과도 같이 깨끗이 치워졌다는 점이 문제였다. 자동차 번호판도 위장번호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명확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 정인숙은 당시 고위공직자나 재벌 같은 특권층의 상징과도 같던 복수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때는 일반인의 경우 한번 해외에 나갔다 오면 효력이 끝나는 단수여권을 사용했다. 5년이나 10년간 몇 번이고 해외 나들이를 할 수 있는 복수여권은 고위층에게만 제한적으로 허용돼 있었다.

또 정인숙의 가방에서 미화 2000여 달러가 현금으로 나왔는데 이 정도면 당시는 외환관리법상 출처가 규명돼야 할 큰 액수였으나 별 조치가 없었다. 엄밀하게 보면 살인사건인데도 수사를 검찰 형사부가 아니라 공안부가 맡았다. 공안부라면 정치사회적 사건을 수사하는 부서다. 통상의 형사사건 처리처럼 법과 원칙대로 하지 않고 정치적 조정과 해결이 필요했던 것이다.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의 질문 공세에도 정일권은 정인숙 피살사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았다. 다른 문제들만 간단히 답변하고 그 사건은 일체 입에 올리지 않은 것이다.
덧붙이는 글 독재자의 술과 엽색행각은 항상 나라를 거덜냈다. 10·26의 원인 중 중요한 것은 박정희의 사생활 문란이었다. 술과 여자를 조달하던 중앙정보부 수뇌부가 그에 대한 인간적 환멸감을 폭발시킨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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