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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란 영화를 읽고 있어요"

[인터뷰] 양윤모 영화평론가

등록|2011.12.14 18:43 수정|2011.12.14 18:43
문제의 동영상은 아름다운 풍경의 바닷소리부터 들려준다. 동영상 속 영화평론가 양윤모(55) 선생은 구럼비 바위를 껴안고, 그 위에 누우며 얘기한다.

"이렇게 내가 안으면 인간과 바위가 하나의 스킨십을 이루는 거예요. 부드러워요. 내 님을 껴안듯이 따뜻함이 느껴져요. 이렇게 눕잖아요. 좋잖아. 물침대야. 물침대. 이런 바위가 (현무암만 많은) 제주도에는 없습니다. 이런 인간친화적인 바위를 해군놈들이 국방이라는 이유로, 굴착기로 바위를 깨고 있어요. 가슴이 아파요. 마음이 아파요. 이 바위가 상처를 입으면 내가 상처를 입는 거죠. 이 바위가 깨지면 내가 깨지는 거고, 이 바위가 쓰러져 없으면 나도 죽어요."

절절하게 이어지던 동영상은 아쉬움이 묻어나는 내래이션으로 잠시 끊긴다.

"영화인생 30년을 천국에서 살았다면….  앞으로 30년, 내 나이 80, 90까지 이 아름다운 모습들이 파괴되는 걸 지켜만 보는 게 아니라 내 몸을 던져서 더 오랫동안 이 아름다움이 지켜질 수 있도록 제 한 목숨 바쳐서…."

그후 경찰에 사지가 들려 잡혀가는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고, 바지가 벗겨져 파란 줄무늬 팬티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 동영상이 촬영된 날(지난 4월 6일) 연행돼 구속됐던 양 선생은 6월 1일 집행유예로 석방돼 나온 이후까지 71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였다. 전 세계로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투쟁을 알린 다큐멘터리 <아일랜드 오브 스톤>(Island Of stone)이 바로 그 문제의 동영상이다.

지난 11월 19일 저녁, 부산지역 시민사회종교단체들이 주최한 '제주 강정마을 돕기 일일주점'에서도 문제의 동영상이 나왔다. "저 동영상 볼 때마다 마음 아프지 않으세요?"라고 묻자 양 선생은 "전혀요. 강정주민들이 해군기지 싸움 승리하면 '성자의 팬티'로 저 팬티 경매에 부치기로 했어요"라며 웃었다. 일일주점 전, 근처 커피숍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그는 단식 후유증으로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후원주점에 사람들이 많이 오자 힘이 솟는 것 같았다.

강정마을의 눈물, 외면할 수 없었다

▲ "밥 하는 법 강정에서 배웠다. 남에 의존해 무난히 살았던 내가 강정생활을 통해 눈뜨고 강정문제를 내 문제로 받아들이게 됐다." ⓒ 노동세상


― 강정 해군기지 문제로 오랫동안 단식을 하셨는데, 현재 몸은 어떠신지요.
"단식 마치고 나서는 일반 환자들이 요양하는 것처럼 무난하게 잘 적응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후유증이 무엇인지 몸이 직접 알려주더라고요. 전체적으로 몸이 자신감을 잃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쉽게 피곤해지더군요. 어떤 측면에선 좀 더 신중해지고 조심스럽게 자신을 관리하는 시간을 갖게 된 거죠. 이전에 행동이며, 발언이 거침없었지만 지금은 좀 신중해졌죠. 몸이 힘들어지면서 '단식을 너무 많이 했나'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때는 많이 해야겠다는 것보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해군기지를 저지해야 한다는 필사의 정신이 있었죠."

― 3년 넘게 강정주민들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2007년에 한미FTA 반대투쟁을 할 때 거의 1년 동안 길바닥에서 살았어요. 그해 한미FTA 반대 투쟁이 마무리될 즈음에 몸과 마음을 추스르려고 고향인 제주에 왔죠. 제주도가 고향이긴 하지만, 영화 하는 30년 동안 서울에서 활동했으니까 고향에 대해 잘 몰랐어요. 이곳저곳을 탐방하던 중에 해군기지 문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절차상의 문제나 법적인 문제 등 일반인의 상식으로 볼 때도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 강정에 계속 머물게 된 이유가 있다면.
"처음에 왔을 때, 마침 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를 알리기 위해 제주도 도보순례를 하더군요. 그때 마을 사람들과 함께 걸었어요. 한걸음 한걸음 함께 걸을 때마다 마을 주민들의 아픔과 고향의 문제를 곱씹어보는 시간이 됐습니다. 그들의 친구가 돼 우정도 나누고요. 순례를 성공리에 마치고 '다음에 다시 오겠다' 약속하고 서울로 왔죠.

이듬해인 2009년 도보순례에도 참가했는데 당시 강정에 해군기지를 유치했던 김태환 전 제주도지사 주민소환투표가 있었어요. 공무원들의 조직적인 방해와 감시 때문에 도민들이 투표장에 나가는 걸 겁내더라고요. 결과적으로 투표율이 안 나와서 투표함을 열지도 못했죠.

좌절에 빠져 있는 마을 사람들의 숭고한 노력과 최선을 다한 울림에 사회가 반응이 없었던 겁니다. 당사자들을 앞에 놓고 그 좌절을 목격한 내가 '안녕히 계세요. 내년에 또 오겠습니다'라며 돌아갈 수는 없더라고요. 나이가 50이 넘었는데, 강정이라는 땅에서 만난 저 사람들의 눈물을 보고 떠날 수 없었던 건 흡사 신의 계시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예요. 신의 소리와 같은 내면의 울림이 나로 하여금 그곳에 멈추게 한 것이죠. 이후로 구럼비 바위 위 천막에서 생활하면서 주민들과 함께한 지 벌써 3년이 됐습니다."

― 함께 천막생활을 했던 주민 김종환씨가 아직 구속상태입니다(인터뷰 이후 11월 23일, 김종환씨는 지난 8월 24일 함께 구속됐던 강동균 강정마을회장과 김동원 평화운동가와 함께 석방됐다).
"종환이가 많이 보고 싶죠. 그 친구를 통해 강정을 더 많이 알게 됐고. 강정에 사람이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려준 '강정 입문서' 같은 친구였죠. 제가 6월에 구치소에서 나와 오랜만에 강정을 떠나 서울에서 강정마을을 내려다봤는데, 김종환이라는 친구가 가장 또렷하게 떠오르더라고요. 그만큼 그 친구와 나의 관계가 소중했던 것이고, 한편으로는 '그가 이 저항의 한가운데 있구나'라는 강한 이미지가 떠오르더라고요."

― 처음엔 라면도 잘 못 끓였는데 김종환씨 덕분에 이젠 밥까지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요리는 거의 해본 적이 없었지요. 사실 내 스스로 뭔가를 해결해 본 적이 없어 남들에 의존해서 행복하게, 무난하게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지금과 같은 생활을 통해 내가 얼마나 오만했던지 반성하게 됐어요. 누구나 할 수 있었던 것을 못했던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죠.

마을 주민들과 함께 농사일하면서 노동이라는 것, 노동하는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이 어떤가에 대해서도 눈을 뜨고요. 그러면서 지식인으로서 그들 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똑같은 마을 주민의 입장에서 해군기지 문제를 보고, 공사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도 같이 모색하게 된 거죠.

'강정은 여러분의 문제고, 나는 도와주는 사람이다'가 아니라 바로 내 문제로 받아들인 거죠. 그래서 마을 분들과 종환이에게 감사하고요. 여기서 적응하다 보니 어디서든 잘 적응할 것 같아요. 강정은 인생의 각성, 깨달음을 주는 더없이 좋은 땅이었습니다."

강정은 예술의 보고

▲ 제주 강정 해군기지 투쟁에 함께 하고 있는 양윤모 영화평론가 ⓒ 노동세상

― 강정마을이 예술적 영감을 일깨워주는 곳이라고도 말씀하셨는데요.
"강정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형성이 없는 곳이에요. 바다, 바위 등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도식화돼 있는 상징물이나 고정관념을 강요하는 전형성이 없어요. 전형성이 없으니 자유로울 수밖에 없고요. 열려 있는, 비어 있는 공간이죠.

오묘한 것이 있어요. 강정에 3년을 있으면서 사계절을 다 경험했는데, 매 순간순간 천 번 만 번 바뀌더라고요. 나는 구럼비 바위에 눈이 내려앉아서 하늘과 바위, 바다가 하얀 도화지가 되는 순간을 봤어요. 운무가 끼면 신선의 세계가 따로 없고요. 사람이 자기를 던지고 지속적으로 기다릴 때 얻을 수 있는 선물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내가 받은 감동과 인상을 많은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막혀버린 공사천막을 빨리 걷어내야죠."

― 강정의 아름다움을 보면 영화를 찍고 싶진 않으신지.
"물론 찍고 싶죠. 이미 강정에 매료된 많은 사진가들이 들어와 찍고 있으니까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올 겁니다. 구럼비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예술적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다고 봐요.

벌써 몇몇 감독들이 함께 영화 <잼 다큐 강정>을 만들었고, 미술가들이 '동행'이란 전시회도 열고 있습니다. 세월이 좀 지나 예술가의 현실참여에 대한 새로운 고민들을 논할 때 제주 강정 문제가 좋은 사례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 어렸을 적부터 예술분야에 흥미가 있으셨나요?
"원래 천재성이 있었던 것 같은데….(웃음) 초등학교 3학년 때 미술대회에 나가보라고 해서 나갔는데 입상을 했어요. 그때 파스텔을 처음 만져봤는데 그걸로 그림을 그려서 상까지 받았던 거죠. 근데 부모님께는 인정을 받지 못했어요. 이건 먹고사는 데 도움이 안 되니까 때려치우라고 하셔서 상처를 좀 받았죠.

중학교 때는 만화가가 되겠다고 제주에서 서울로 두 번이나 가출을 했었죠. 빛에 대한 관심도 많았어요. 만화와 영화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죠. 박카스 박스에 구멍을 뚫고 홈을 파서 환등기 비슷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창호지에 먹으로 그림을 그려서 빛을 비춰 하얀 벽에 비추춰서 사람들한테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5칸짜리 만화를 그려서 극장에서 자른 필름을 모아다가 프레임을 만들어 환등기에 비춰보기도 하고요. 동네 돌아다니면서 보여줬죠. 그런 재능은 있었던 것 같아요."

― 만화가의 꿈을 접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영화 <스파르타쿠스>를 보고 나서 아마 영화에 매료됐던 것 같아요. 한창 예민하던 고등학생 시절이었는데 '어떻게 살 것인가' '누구는 왜 가난하고, 누구는 왜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핍박을 받을까' 이런 고민을 하던 차였죠. 그때 밤에 파자마만 입고 극장에 가서 노예해방을 다룬 영화 <스파르타쿠스>를 본 거예요. 그 영화를 보면서 노예란, 또 해방투쟁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됐죠. 영화를 통해 세상을 보고 사회의식에 눈뜨면서 영화를 업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영화과에 들어간 것이죠."

― 대부분은 영화감독을 지망해서 영화과에 가지 않나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감독이 되고 싶어 하죠. 직업적으로 감독 하는 걸 포기한 적은 없는데, 지금은 영화평론가로서 현장수업을 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감독 할 때 가장 유망한 젊은 감독으로 기대를 받았어요. 영화감독 제의가 들어왔었는데 결단을 내렸죠. 88년 올림픽 전후로 미국이 한국 영화시장 개방을 요구하던 때였어요. 그때 소위 말하는 '운동'을 했죠. 영화시장 개방반대 운동. 그때 한국의 유학파 지식인이나 언론인들이 한국영화에 대한 폄하의식이 있더군요. 많이 실망했지요.

저도 대학 때는 교수들이 갖고 있는 한국영화에 대한 비판의식을 배웠지만, 영화 제작 현장에 와보고 나니 현실이 보였어요. 왜 기술이나 미학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영화가 나올 수밖에 없는가를 알게 된 거죠.

당시 있던 영화 허가제나 영화검열제도는 그대로 둔 채, 한국 영화산업을 지원할 제도적 방안도 마련하지 않고, 미국이 담장을 허물라고 하면 그냥 허무는 게 우호적인 한미관계일까요? 그런 상황에서 영화시장을 개방하면 경쟁이 될 수 있겠어요? 그때 꾸벅꾸벅 졸면서 며칠씩 밤샘촬영을 하는 현장을 아는, 비춰지지 않는 화면 뒤 아픈 면도 주목하는 영화평론가가 돼야 겠다고 결심을 했죠. 영화 조감독 경험은 현장성에 눈 뜬 실사구시 평론가로서 소양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내 직업은 자랑스러운 5글자, 영화평론가죠.(웃음)"

― 영화평론을 할 때 10번 이상 본다던데 이유가 있으신지.
"한 번 보고 영화를 다 본 것처럼 얘기들 하는데 영화는 볼 때마다 다 달라요. 기자님과 나도 오랜 시간 가깝게 마주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극히 짧은 시간이죠. 1시간 45분 동안 화장실 안 가고 영화만 본다고 다 본 게 아니에요. 인간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보여줘야 해요. 또, 영화 한 편이 하루에 뚝딱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5~10년 동안 하나의 아이디어가 육화돼 나오는 건데 예술가가 소진했던 시간을 존중해 주고 그가 말하는 바를 발견하려면 많이 봐야죠.

영화는 보면 볼수록 대화가 돼요. 그 영화와 말할 수 있는 교류의 언어가 나오죠. 그렇게 계속 영화와 소통해서 아이디어, 단어가 나와야 그걸 전제로 관객에게도 전할 수 있고요. 관객들이 그런 의미, 단어를 보고 극장으로 가도록 영화로 인도하는 겁니다."

― 제일 많이 봤던 영화를 소개해 주세요.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는 12번쯤 보고 별 5개를 줬어요. 당시 사람들이 깜짝 놀랐죠. 한국영화도 별 5개를 주냐고. <초록물고기>는 우리사회 개발의 허상을 느와르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이에요. 초라한 판잣집에서 살던 가족이 신도시 개발로 어떻게 붕괴되는지, 그 치유를 위해 아픔의 과정을 견뎌내야 함을 잘 묘사했죠. 사회 비판적인 영화들이 단순히 목소리 중심의 발언성 영화가 많은데 그 영화는 영화 자체 완성도가 높았어요. 한석규(막동이 역)가 죽었을 때 가족들의 울음소리라든가, 한 여인이 기차에서 놓친 스카프가 무명처럼 자기 얼굴을 덮었다는 부분은 빛나는 영상이죠.

그 밖에 염재만씨 소설을 각색한 이영실 감독의 영화 <반노> 같은 경우도 단성사에서만 20번 넘게 봤고요. 좋은 영화든 나쁜 영화든 보면 볼수록 교과서가 될 만한 것들이 있죠. 또, 세계 10대 걸작 등 영화의 고전들은 본의 아니게 100~200번씩 보게 돼요. 강의 때도 상영하니까요."

― 이산가족문제를 다룬 영화, <길소뜸>의 평론 도입부에 함경남도 출신의 아버님이 생전에 다시 고향에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좌절하셨다고 쓰셨더군요. 현실과 영화를 연결시키는 평론을 찾기 쉽지 않은데요.
"부모님을 통해 겪었던 내 개인적인 아픔이 경험적인 아이디어가 돼 비평을 쓰는 데 도움이 됐죠. 한편으론 영화비평이 좀 더 열려있으면 좋겠어요. 표현의 영역도 넓히고. 영화평론이 표현논리에 빠져 있는 걸 많이 봐요. 이론서에 써야 할 것을 영화비평으로 오해한다든가, 외국의 입장에서 우리 영화를 평한다든가. 평론가들이 사물을 보는 시각이 고정관념에 갇혀선 안 돼죠. 전 답습하는 것을 싫어해서 이 영화에 썼던 비평 틀거리를 다른 영화에 쓰지 않아요. 영화와 내가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비평을 못 쓰죠. 그래서 글을 많이 쓰지는 않아요. 원고 펑크도 종종 내고요.(웃음)"

― 새로운 시도를 좋아하셔서 그런가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홍상수), <기막힌 사내들>(장진), <투캅스>(강우석), <서편제>(임권택) 등 당시 개봉하는 영화를 대학 강의교재로 채택해서 주목을 받기도 하셨어요.
"그 영화들 다 성공했잖아요. <기막힌 사내들>은 아무도 봐주지 않던 영화였었는데…. 그래서 오해도 많이 받아요. 학교 선후배 관계냐, 청탁받은 거 아니냐고. 그게 아니라 예술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시각에서 세상을 봐야한다는 생각입니다.

어제 강정마을에서 몇몇이 근처에 있는 엉또폭포에 가자고 해서 갔어요. 최근에 강정에 온 만화 그리는 젊은 친구도 같이 갔어요. 다들 멀리서 폭포를 바라보는데 내가 만화가 친구한테 그랬지. '예술가는 경이로운 장면을 가까이서 봐야 한다. 저기 내려가서 보고 오라.' 그 친구가 내려가서 폭포비를 맞으면서 사진을 찍어오더라고요. 그래 내가 '수고했다'며 악수를 청했어요. 아마 그 친구는 알겠죠. 내가 왜 악수를 청했는지."

영화와 현실 사이

― 한국영화평론가협회장이던 2006년, 스크린쿼터 지키기 농성장을 146일 전일 지키셨어요.  미국영화 수입할 때도 앞장서셨다고 하고. 혹시 싸움꾼 기질이 있으신가요?
"내가 원래 착해서 싸움은 잘 안 해요. 그런데 내 양심, 도덕적 외침이 울릴 때는 그에 따르지. 초등학교 다닐 때 친구가 장애인 친구를 막 놀리더라고요. 그때 내가 '얘가 뭘 잘못했기에 손가락질하고 비아냥거리느냐'고 막 뭐라고 했어요.

또, 어느 날 어떤 할머니가 우리집 근처에서 길을 물었는데 나도 처음 가는 길을 한참까지 가서 할머니를 모셔다 드린 적도 있어요. 누구나 어느 순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신비로운 경험들을 하잖아요. 나 역시 인간의 자연스러운 것을 억제하고 통제하는 벽들과 부딪힐 때 그런 초인적인 힘이 솟는 것 같아요. 스크린쿼터나 강정 해군기지나 다 그런 거죠."

― 예술가들의 현실참여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예술가가 현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하는가의 문제는 예술을 보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예술을 생활과 분리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술과 현실이 하나가 돼 움직인다고 보는 사람도 있죠. 다른 사람의 예술에 대해 비판할 생각은 없고 예술의 변화는 현실과 밀착돼 만들어졌으며 그게 바로 예술 미학의 변화라고 말하고 싶네요.

해군기지 저지운동에서 구럼비를 만난 것도 마찬가지죠. 구럼비와 해군기지 반대라는 두 개념이 만나서 지금 많은 예술들을 창출해내고 있어요. 음악, 미술, 문학, 영화 등. 현실의 부조리에 다가가 눈 떠서 만들어진 예술들이 예술의 사상을 바꾸죠. 이것도 예술적 상상력이 없으면 안돼요. 예술적 상상력이 고갈되면 그 사회는 병들고 썩습니다. 예술적 상상력을 계속 병들지 않게 키워내는 것이 현실과의 싸움이죠. 그 고민에서 나오지 않은 작품들은 의미가 없어요."

― 원래 제주에 내려올 때는 '농사짓는 영화학교'를 지을 계획이셨다고 하던데. 농사와 영화는 어떤 상관관계 있죠?
"둘 다 과정이 똑같아요. 씨를 뿌린다고 그대로 수확이 되는 게 아니죠. 천재지변 등 운이 좋아야 풍작이 되는 것처럼 영화도 운이 좋아야 성공해요. 1년 내내 땀 흘려 일한다고 해서 꼭 풍년이 들어 제값을 받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농사를 짓는다잖아요. 영화도 성공의 보장은 없지만 찍고 또 찍죠. 삶의 숙명이랄까? 농사를 이해하는 사람이 영화도 열심히 할 겁니다. 둘 다 건너뛰기가 안 돼요. 농사가 처음에 땅을 일구고 씨 뿌리고 가꾸고 물 주면서 태양, 바람을 살펴야 하는 것처럼 영화도 건너뛰어 좋은 장면만 볼 수는 없죠. 그런 직업적 숙명론에서 똑같은 것 같아요.

근데 한 군데에만 집중하는 성격이어서 이 싸움을 끝나고 나서 준비하려고 해요. 어떤 사람들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하는데 그건 나하고는 안 맞는 방식이죠. 온전하게 싸움에 집중하고 싸움이 끝난 다음에 하려고요. 꼭 내가 아니어도 내가 품고 있는 생각을 아는 사람들이 할 거라고 믿어요."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에게 자랑스러운 다섯 글자, '영화평론가'로 돌아갈 계획을 물었다.

"지금 저는 세상이라는 영화를 평론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내 직접 행동이죠. 해군기지 건설 반대! 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바로 비평이에요. 옛날엔 허상의 스크린을 향해 비평을 했다면, 지금은 세상이라는 실상에 미군기지라는 허상에 대한 비평을 하고 있는 거죠. 그때는 책상에서 펜으로 했다면 지금은 몸으로 하고 있는 거고요. 그러니 지금도 평론가인 셈입니다."

영화평론가 양윤모는 영화를 못 본 지 4년 가까이 됐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아쉬움이 없어 보였다. 강정마을 투쟁은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란다.
덧붙이는 글 월간 <노동세상> 1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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