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금강산' 해금강과 아름다운 외도보타니아 여행
60년지기 초등학교 동창 부부들의 남도 여행
▲ "아름다운 외도보타니아"를 떠나기전 선착장에서 서녘 하늘에 노을을 배경으로 다섯쌍 부부 10명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 윤도균
▲ 바다의 금강산 "해금강"바다의 금강산이라 불리워도 손색없는 "해금강"을 유람선을 타고 에돌아 관광을 하면 찍은 동영상이다. 그런데 파도로 배가 너무 심하게 흔들려 동영상이 고르지 못하다. ⓒ 윤도균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있는 갈현초등학교 한때는 재학생 수가 500여 명을 넘은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학생 수가 줄어 폐교 위기에 처했다. 이 학교의 제10회 60년 지기 초등학교 동창생 7명이 모교의 뒷동산인 "당산"이란 이름을 따 "당산회"란 친목회를 결성하여 35년간이나 운영했다.
그러던 차 지난 10월 모임에서 12월 중 남해안으로 2박 3일간 부부동반 여행을 하기로 했다. 여행지와 여행 일자는 총무인 내가 회원들 일정에 맞추어 결정하기로 하여 이 친구 저 친구 일정 고려 끝에 지난 9일부터 11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남해안 일대 여행을 떠나기로 계획을 세우고 친구들에게 연락하니 모두 다 좋다고 한다.
그래서 지난봄 다녀온 청산도, 보길도, 완도 방면을 제외한 한려수도, 거가대교, 남해안 일대 명소를 찾아 여행키로 하고 KTX 기차 여행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업무로 불참하는 회원을 빼고 5쌍 부부 10명에 대한 예약을 마치고 여행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친구의 아내가 여행을 포기한다고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불참하겠다고 통보를 한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거가대교를 줌으로 당겨 보았다. ⓒ 윤도균
▲ 거가대교 해저터널을 진입하면서 차안에서 찍은 해저터널 입구 모습이다. ⓒ 윤도균
아니 자기들이 먼저 여행 가자며 총무가 알아서 예약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출발 며칠 남기지 않고 예약 취소를 하다니…. 맘 같아선 총무 못 해먹겠다고 한소리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지만, 어디 우리 사이가 한두 해 우정도 아니라 꾹 참고 다른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그러니 그럼 그냥 네 집 부부 8명이서 떠나자고 한다.
솔직히 내 심정도 그러고 싶지만, 그놈의 우정이 뭔지 다시 못 가겠다고 한 친구에게 연락해 그러지 말고 아주머니와 함께 가자고 마지막 통보를 하였다. 곧이어 친구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다. 참석을 하겠다고. 이렇게 해서 60년 지기 초등학교 동창생 다섯 쌍 부부 10명이 9일 오전 8시 30분 서울역에서 부산행 KTX 열차에 몸을 싣고 우리의 남도 여행이 시작했다.
서울에서 오전 8시 30분 출발한 우리 일행을 싫은 KTX 열차가 2시간 40여 분 달려 오전 11시 10분 부산역에 도착했다. 홍익여행사 강동원 팀장이 25인승 버스를 대기 시켜놓고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이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25인승 버스에 다른 여행객은 보이지 않고 달랑 우리 10명이 전부다.
아마도 최근 올겨울 들어 지속적으로 쌀쌀한 날씨가 지속되다 보니 여행객이 많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로선 좌석이 여유롭고 다른 일행 없이 우리뿐이니 너무 편안한 여행길이 시작됐다. 강 팀장의 자상하고 정성스런 안내를 받으며 우리는 세계 최장의 다리 거가대교 전망대로 달려가 거가대교 건설 과정에 있었던 일들에 대하여 관람을 한다.
▲ 바다의 금강산이라 불리우는 해금강을 에돌아 관광을 하는데 세찬 풍랑으로 사진을 찍기가 쉽지 않다. ⓒ 윤도균
▲ 바다의 금강산이라 불리우는 해금강을 에돌아 관광을 하는데 세찬 풍랑으로 사진을 찍기가 쉽지 않다. ⓒ 윤도균
그런데 거가대교를 건설하는 과정에 우리나라 토목 기술의 우수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기록을 세운 "가덕 해저터널 5개의 세계기록"을 살펴보면, ☞ 세계 최장 함 체 (길이 180m) ☞ 세계 최초 파도와 바람 조류가 심한 외해 건설 ☞ 가장 수심 깊은 (48m) ☞ 초연 약 지반 ☞ 세계 최초 2중 조인트 함 체, 연결이란 세계 기록을 세우며 거가대교가 건설되었음을 알게 되며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어 우리는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먹고, 거제 선착장에 도착해 유람선을 타고 '바다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해금강 일주 관광을 하였다. 유람선에도 관광객은 우리 일행을 포함하여 30여 명 이내의 승객을 싣고 갔다. 이날따라 세차게 출렁이는 파도를 헤치며 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해금강 일대를 에돌아 관광하였다. '하늘도 십자 모양, 바다도 십자 모양'이 되어 "십자 굴" 코스가 있는데, 이날따라 파도로 "십자 굴" 관광을 할 수 없는 것이 아쉽기 짝이 없다.
그러나 제아무리 좋은 관광도 우리에겐 무엇보다 안전이 우선이기에 아쉬운 마음을 접었다. 우리 일행을 실은 유람선은 우리나라 최고의 관광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름다운 섬 외도항으로 달려갔다. 유람선 선장님의 말씀에 의하면 외도에는 원래 후박나무 약수터가 있어 그 우물가를 중심으로 7~8가구 섬주민이 모여 살며 주로 고구마를 키우거나 어업에 종사하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황무지나 마찬가지인 바위투성이 섬에 1969년 7월 이북에서 피난 나와 서울 동대문 시장에서 사업하시던 이창호씨가 이곳으로 바다낚시를 하러 왔다 태풍을 만나 이곳 외도에서 우연히 하룻밤 민박을 하게 된다. 그 시절 외도란 섬의 땅값은 돈 가치로 따질 수 없을 정도로 헐값이었지만, 시가보다 수십 배나 더 비싸게 값을 치르며 3년여에 걸쳐 외도 섬 전체를 이창호 최호숙씨 부부가 샀다고 한다.
▲ 바다의 금강산이라 불리우는 해금강을 에돌아 관광을 하는데 세찬 풍랑으로 사진을 찍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명소 십자굴을 관람하지 못한것이 안타깝기 짝이없다. ⓒ 윤도균
▲ 아름다운 외도보타니아를 소개하는 남근목 대형 표지목 ⓒ 윤도균
그 후 초창기에는 밀감나무와 80여 마리의 돼지를 키웠지만 계속된 실패 과정을 겪으며 농장 사업을 접고 대신에 식물원을 조성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식물원은 근 30여 년이란 긴 세월의 꾸준한 투자와 관리로 현재의 아름다운 외도보타니아 모습을 갖추어 1995년 "외도 해상농원"이란 이름으로 일반에게 공개를 하게 되었던 것. 그러던 중 그 당시 최고의 인기 드라마였던 <겨울연가>의 마지막회가 외도에서 촬영되면서 외도가 우리나라 남해안 관광지로 크게 알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설립자 이창호씨는 1934년 태어나 2003년에 작고하시고, 지금은 부인인 최호숙씨와 그 아들이 '외도보타니아'를 관리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우리가 방문한 시기가 겨울철이었다. 때문에 아름다운 외도보타니아가 지닌 풍성한 아름다운 풍경인 봄, 여름, 가을에 비교할 바는 못 되었다. 하지만 겨울의 "외도보타니아"는 또 그 나름대로 다른 아름다움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60년 지기 초등학교 동창 부부들에게는 마냥 즐거운 낭만의 여행이 되어 아주 좋다.
이렇게 아름다운 외도보타니아를 돌아보면서 한 가지 크게 아쉬움이 남는 것이 있었다. 이 황무지나 다름없는 척박한 땅 외도 섬을 사들여 30여 년에 걸쳐 고생고생하며 이룬 아름다운 외도보타니아에서 설립자 이창호씨가 노년의 여생을 좀 더 오래오래 수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안타깝게도 이창호씨는 고희 연세도 못 살고 하늘나라에 가시게 되어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러다 보니 전직 교사생활을 하셨던 고 이창호씨의 아내 최호숙씨가 아름다운 식물원을 일구고 가꾸시다 먼저 간 남편을 애틋하게 그리는 시를 썼다고 한다. '아름다운 외도보타니아'와 고인을 기리는 내용의 시를, 한쪽 벽에 설립자 이창호씨의 초상화 동판 작품을 걸고 옆에 최호숙씨의 시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를 아로새겨 보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 "아름다운 외도보타니아"에 정성으로 다듬어진 녹색 향나무 모습이 신기하고 아름답다. ⓒ 윤도균
▲ "아름다운 외도보타니아" 식물원을 설립하신 "고 이창호님" 인물 동판 모습이다. ⓒ 윤도균
아래에 최호숙씨가 고인이 된 남편 이창호씨에게 바친 시를 소개한다.
그리워하는 우리를 여기에 남겨두시고 그리움의 저편으로 가신 당신이지만 우리는 당신을 임이라 부르렵니다. 우리가 모두 가야 할 길이지만, 나와 함께 가자는 말씀도 없이 왜 그리 급히 떠나셨습니까? 임께서는 가파른 외도에 땀을 쏟아 거름이 되게 하시었고 애정을 심어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지게 하시었으며 거친 숨결을 바람에 섞으시며 풀잎에도 꽃잎에도 기도하셨습니다. 더 하고픈 말씀은 침묵 속에 남겨두시고 주님의 품으로 가시었으니 임은 울지 않는데도 우리는 울고 있고 임은 아파하지 않는데도 우리는 아파하며 임의 뒷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임이시여 이창호 씨여, 임께서 못다 하신 일들은 우리가 할 것으로 믿으시고 주님의 품에 고이 잠드소서. 이제 모든 걱정을 뒤로하신 임이시여 임은 내 곁에 오실 수 없어도 내가 그대 곁으로 가는 일이 남아 있으니 나와 함께 쉬게 될 그날까지 다시 만날 그날까지 주 안에서 편히 쉬세요. 2003년 3월 4일 하늘에 가시다. 부인 최호숙 드림 |
▲ "아름다운 외도보타니아" 풍경이다. ⓒ 윤도균
위에 시를 감상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우리 60년 지기 초등학교 친구들(69세)은 고인 된 이창호씨와 비슷한 나이 친구들이라 부인 최호숙씨의 애절한 시가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함께 시를 읽던 아내의 손을 꼭 잡으며 "여보! 당신도 그동안 두 아들 키우며 없는 살림에 고생 많이 했으니 우리도 이제 남은 삶 너무 아등바등 살지 말고 당신과 나 건강할 때 여행도 다니고 우리만의 인생을 즐기며 삽시다"하고 말하니, 아내도 말없이 내 손을 꼭 쥔다.
그런데 우리를 싣고 온 유람선 선장님께서 오후 4시 45분까지 선착장에 오시면 외도보타니아에 근무하는 직원 70여 명 퇴근객과 함께 거제로 돌아간다고 했는데도 친구들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벌써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 아름다운 외도보타니아 섬을 떠나면 언제 또다시 오기 쉽지 않다는 생각에 느긋한 마음으로 이 섬 풍경을 디카에 정신이 없이 담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결에 서녘 하늘에 붉그스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외도를 떠나기 전 선착장에 먼저 내려와 서성이던 60년 지기 초등학교 부부들과 함께 나란히 붉게 물든 노을을 배경으로 강 팀장에게 단체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다 함께 웃는 모습으로 "김치" 하고 포즈를 취하며 아름다운 외도보타니아 여행을 마치고 거제로 향했다.
▲ 아름다운 외도보타니아아름다운 섬 외도를 초등학교 60년지기 동창생 부부들과 관광을 하며 찍은 사진과 동영상으로 소개를 한다. ⓒ 윤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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