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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아비뇽 페스티벌을 다녀와서 - 1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 관람기

등록|2011.12.26 09:17 수정|2011.12.26 09:17
연극 보기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꿈꾸는 아비뇽 축제에 다녀왔습니다. 공연을 보기까지 수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하나씩 넘다보니 어느덧 아비뇽 교황청 앞뜰에서 관객으로 자리에 앉아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2011년 여름, 한국에서 온 관객의 입장에서 제가 경험한 아비뇽 축제와 공연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2011 아비뇽 페스티벌아비뇽 거리를 도배하다시피 한 공연 포스터들 ⓒ 정진세


일단 그 '난관' 들의 정체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비뇽 페스티벌은 7월 한달 동안 프랑스의 지방도시에서 벌어지는 세계적 예술축제입니다. 유럽의 입장에서 한참 변방인 아시아의 한국에서 아비뇽 관객이 되기란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페스티벌에 대한 정보와 프랑스어를 잘 모른다면, 그 어려움은 더해지지요. 게다가 유럽의 바캉스 기간과 맞물려 이어지는 축제의 성격상 공연 관람을 위해서는 아비뇽에 머물러야 하는데, 전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 때문에 숙박을 잡기rk 매우 어렵습니다.

주요 공연의 상연 시각은 대체로 밤 9시에 시작하고, 서너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고려하면 자정을 넘어 끝나는 공연도 태반입니다. 따라서 공연관람과 숙박은 연관되어 있지요. 그러하기에 아비뇽 페스티벌에 처음 가는 분들은 그런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아비뇽의 저렴하고 괜찮은 숙박공간은 연초에 이미 동이 난다고 합니다. 저 역시도 큰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아비뇽에 머물수 있게 되었지요.  

아비뇽 페스티벌은 주최 측에서 초청, 제작하는 공연 중심의 본 페스티벌과 자유참가 형식의 무수한 공연으로 짜여진 오프(off) 페스티벌이 있습니다. 인(in)-공연은 대체로 유럽에서 혹은 전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유명 연출가들과 안무가들의 신작입니다. 따라서 티켓을 구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인터넷으로 오픈되는 티켓은 며칠 만에 판매가 완료됩니다. 

2011 아비뇽페스티벌아비뇽 페스티벌의 책자들, 오프공연 프로그램(왼쪽)과 인공연 프로그램(오른쪽) ⓒ 정진세


2011년 페스티벌의 면면을 살펴보니, 예술감독인 보리스 샤르마츠의 개막작을 필두로 안무가 Anne Teresa de Keersmaeker의 무용공연과 연출가 기 카지에와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신작, 그리고 케이티 미첼과 Fredreic Fisbach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연출한 <미스 쥴리>, 빈센트 맥케인의 <햄릿>, 그리고 Wajdi Mouawad 가 소포클레스 비극의 여인 3부작을 연이어 공연한 <여인들> 등 영상, 음악과 결합한 연극과 무용 공연 등이 눈에 띄었습니다.

올해는 총 30명이 넘는 연출가와 40편의 작품이 인-공연에 프로그래밍 되었습니다. 대체로 내용이 공개되지 않은 새로운 작품인데다, 프랑스어를 중심으로 하는 공연이기에 어떤 작품을 관람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당연합니다. 게다가 수백편의 오프공연까지 고려한다면, 그 고민의 여지는 더욱 커지게 되는 것이지요. 허나 개개의 미학성과 예술적 도발성을 가지고 있다고 예상되는(?) 아비뇽 공연을 고르는 일은 어쨌든 행복한 일임에 분명합니다.

2011 아비뇽 페스티벌공연 티켓들 ⓒ 정진세


티켓 가격은 가장 비싼 공연이 33유로(한화 5만 원)에서 27유로이고, 할인을 받으면 21유로(3만 원) 정도에 볼 수 있답니다. 한국에서 외국공연의 티켓가격이 대략 4~5만 원 정도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다만 청소년 할인(만 24세 미만)이 적용되면 15유로 내지 13유로에 볼 수 있으니, 학생들에게는 매우 저렴한 가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비뇽에 도착했을 때는 프랑스의 혁명기념일(7월 14일)이었습니다. 프랑스 전역에서 불꽃놀이가 벌어진다는 사실에 맘이 한껏 부풀어 올랐지요. (물론, 강풍으로 인해 불꽃놀이는 전면 취소되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 아비뇽의 정경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거리는 북적이는 관(광)객들과 홍보용으로 짤막한 공연을 선보이는 배우들, 그리고 거리 곳곳에 도배된 공연 포스터들로 요란하고 시끌벅적했습니다.

오프 공연 중에는 유난히 중국 공연이 많았습니다. 여기저기서 중국계 제목과 이미지를 딴 포스터가 눈에 띄었습니다. 어림잡아 열편 정도의 작품이었고, 아예 전용관도 따로 마련해놓고 있었습니다. 한국 공연은 도합 네 편이 오프 공연으로 참가하였습니다.

한국의 예술경영 지원센터와 프랑스 한국문화원에서는 한국관을 운영했습니다. 시기가 절묘하게도 파리에서 불어온 K-POP 열풍 등으로 한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을 때였지요. 작은 교회 공간을 빌어 꾸민 한국관에는 국내 공연들의 책자 등이 전시되었고, 우리의 희곡들이 영어와 불어로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한켠에선 공연 영상을 상영하기도 했습니다. 유럽의 십대들이 보여준 열렬한 반응은 없었지만, 한국관에서는 이미 여러 관광객이 다녀간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기념일 다음날, 제일 먼저 관람한 공연은 우연찮게도 한국 공연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한불 합작 공연이지요. 한국의 젊은 배우들과 프랑스 연출가 알랭 티마르의 <코뿔소>입니다. 이 작품은 작년 여름에 오프 아비뇽의 작품으로 초연되었고, 가을에는 서울국제 공연예술제의 초청작으로 한국에서도 공연한 바 있습니다. 한국에서 공연을 보지 못한 제게는 아비뇽에서 만나는 한국공연이 반가웠습니다.

할 극장(Halle theater)에서 오전 11시에 상연이 되었습니다. 이른 시간임에도 객석은 만원이었습니다. 다수가 프랑스인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에겐 이오네스코라는 작가는 각별한 존재겠지요. 그들은 한국인 배우들이 해내는 <코뿔소>를 매우 진지하게 관람하였습니다.

2011 아비뇽 페스티벌할극장 앞 <코뿔소>의 공연소개와 극장입구 ⓒ 정진세


<코뿔소>의 캐릭터들은 하얀 와이셔츠와 검정 정장을 맞추어 입은 세련된 도시의 회사원으로 바뀌었습니다. 작품은 부조리한 언어의 의미와 상황 대신 그러한 말이 가지고 있는 음악적 리듬과 반영적 속성을 지닌 거울이라는 주요 오브제에 초점을 맞추어 표현되었습니다.
1인에서 다수화된 논리학자들은 절도있고 세련된 말과 행동으로 조직 내 부속으로 전락해버린 한국의 회사원들을 연상시켰습니다. 그 사이에서 비상식적인 사건을 경험한 베랑제는  더욱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존재로 그려졌지요. 다수의 무관심과 경멸어린 눈초리 속에서 베랑제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나중에는 자신의 여자친구를 학대하는 괴물로 변해갔습니다. 한국의 배우들은 종반으로 갈수록 에너지 분출을 더했고, 프랑스 관객들은 그러한 감정 변화에 몰입하여 관람했습니다.
공연이 끝났고, 세 번의 커튼콜이 있었습니다. 아비뇽 관객들은 박수가 참 후한 편입니다. 공연자체도 대단했지만, 관객들은 새로이 해석된 작품에 대해 관심과 호의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특히 작품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던 악사에게 제일 큰 박수가 돌아갔지요. 

2011 아비뇽 페스티벌대표적인 오프-공간 할극장의 입구 ⓒ 정진세


축제기간에는 아비뇽의 많은 실내공간들이 극장으로 탈바꿈 합니다. 인-공연이 자랑하는 역사적 공간으로서의 교황청, 교회, 오페라 극장은 물론이거니와 화려하고 번듯한 상업극장에서부터, 블랙박스 형태로 급조된 간이극장까지 수많은 극장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공간에서는 시간대별로 나누어서 몇 편의 공연이 차례대로 상연됩니다.

공연은 오전 10시부터 밤 11시까지 계속되는데  다수의 공연들이 한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지요. <코뿔소>를 상연했던 할 극장은 오프 공연의 상연장소였지만, 규모도 있고 시설도 괜찮은 극장이었습니다. 비슷한 규모의 극장을 3관이나 가지고 있으며, 올라가는 작품들도 나름이 미학적 완성도를 지닌 작품이었습니다. <코뿔소>의 공연이 올라갔던 그 곳에선 창작 판소리 '자' 팀의 <사천가> 공연이 네시 반에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2011 아비뇽 페스티벌오프 아비뇽 책자에 나온 할극장의 프로그램 ⓒ 정진세


작은 연극판 덕인지 먼 이국땅에서의 반가움 덕인지, 한국의 배우들은 서로의 얼굴들을 알아주었고, 이는 한국에서 온 관객들에게도 이어졌습니다. 다른 팀에 있지만 한국의 배우들은 힘을 합쳐 국악기를 이용, 즉흥적으로 거리 홍보를 하기도 했습니다. 흥겨운 장단과 어우러지는 춤사위는 금세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지요. 아비뇽 거리에서 잠깐 벌어진 공연이었지만 배우들과 관객들이 하나로 어우러진 참으로 근사한 광경이었습니다. 

2011 아비뇽 페스티벌아비뇽 거리에서 펼쳐진 한국배우들의 난장 ⓒ MOK


덧붙이는 글 (이어 2부와 3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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