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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바닷가에서 웨이트리스를 꿈꾸다

좋은 '추억' 만들어준, 오뎅집 사장님 고맙습니다

등록|2011.12.30 11:30 수정|2011.12.30 11:30
숨 쉴 때마다 공기가 찹니다. 오리털 점퍼를 껴입고, 지퍼를 목까지 올립니다. 점퍼 안에는 두꺼운 스웨터까지 입었습니다. 모자를 쓰고, 모자가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목도리로 둘러쌉니다. 까만 장갑을 끼고, 하얀 마스크를 씁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몇 발자국 걷자 오른쪽에 분식집이 보입니다. 분식집 앞에는 어묵이 있습니다. 어묵이 꽂힌 긴 꼬지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물 안에서 삐죽삐죽 솟아있습니다. 차디찬 공기와 뜨끈한 어묵 하나, 그리고 얼어 있는 내 몸을 녹여줄 국물 한 그릇. 생각만 해도 몸이 스르르 녹는 것 같습니다. 그 포근함 속에서, 나는 '삼포오뎅'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나는 처음 그 가게 문을 열던 순간 속으로 다시 걸어갑니다. 

9월 말, 혼자 제주도로 훌쩍 떠난 이유

▲ 오뎅집 입구입니다 ⓒ 이지아


지난 9월 말, 제주도로 늦은 여름휴가를 갔습니다. 남들은 수학여행으로 가고, 졸업여행으로 가고, 신혼여행으로 가고, 그리고 그냥 가기도 한다는 그 제주도를 서른다섯이 되어서야 처음 가보기로 했습니다. 혼자 떠나기로 합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 조금 두렵지만, 두렵기 때문에 더 떠나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3년째, 해마다 소중한 사람을 먼 곳으로 보내고, 점점 혼자 남겨지는 나는 뭐든 혼자 해낼 수 있어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그렇게 훌쩍 떠난 제주도에서,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비행기 탑승 시간을 기다리면서 용담 해안도로를 걷습니다. 남은 시간은 두어 시간, 점점 날씨는 쌀쌀해지고, 어두워집니다. 핸드폰 문자가 도착합니다. 비행기 출발 시각이 한 시간 늦어진다고 합니다.

긴장되었던 마음이 갑자기 쿵 내려앉고, 그 쌀쌀함과 어둑함 속에서 나는 센치(?)해지고 맙니다. 그리고 나는 술을 떠올립니다. '한라산' 소주. 하얀(투명) 병에 담겨 있는 한라산 소주. 그 소주 한 잔을 마지막으로 이 섬을 떠나리라 생각합니다. 술집을 찾습니다. 여자 혼자 들어가서 소주를 마셔도 주눅 들지 않을 것 같은 술집을 찾습니다.

그런 내 눈에 '오뎅집'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오뎅집이라, 해안도로에 쭉 늘어서 있는 큰 횟집사이에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는 가게입니다. 저 작은 가게에선 마음 맞는 사람 몇 명씩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조곤조곤 술을 마시겠구나, 저 가게라면 여자 혼자 들어가 오뎅탕에 소주를 시켜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겠구나, 저 가게라면 주머니 가벼운 여행자도 맘 편히 지갑을 열 수 있겠구나, 생각은 꼬리를 뭅니다.

운이 좋다면 만원으로 오뎅 한 그릇에 소주 한 병까지 마시겠구나, 그러면 나는 소주 한 잔에 내 쓸쓸한 마음을 쓸어내고, 소주 한 잔에 내 아쉬운 마음을 쓸어내고, 소주 한 잔에 내 그리운 이들을 그리워하고, 소주 한 잔에 다시 내일을 얘기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면서 '오뎅집' 문을 열었습니다. 다정한 사람들의 소곤거림과 따뜻한 불빛과 오뎅국물을 기대하면서.

소주 한 잔의 쓸쓸함과, 소주 한 잔의 그리움

▲ 창 밖 풍경 ⓒ 이지아

현실은... 가게는 내가 작기를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작았고, 가게는 텅 비어 있었고, 그리고, 안주는 비쌌습니다. 오뎅탕, 2만 원! 검은 치마에 검은 두건을 쓴 여사장님이 나타났습니다. 나는 뜬금없이 앞뒤도 없이 "안주가 비싸네요"라고 말을 해버립니다. 안주는 비싸고, 나는 그럴 돈이 없고, 소주 한 잔과 함께 할 쓸쓸함과 아쉬움과 그리움과 희망이 무너져 내립니다.

사장님은, 수제 오뎅이라서 맛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내게 필요한 건 수제 오뎅도 아니고, 맛도 아니고, 한라산 소주 한 잔과 쓸쓸함을 채워 줄 값싼 오뎅이었습니다. 나가지도 못하고, 자리에 앉지도 못하자, "양은 많지 않아요, 혼자 먹을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합니다. 저는 돈이 많이 없다고 솔직히 얘기를 합니다.

그렇게 아쉬움을 가득 안고 돌아서려고 하는데, "이왕 들어온 거 커피 한 잔 내려줄 테니 마시고 가요"라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내 가게에 들어온 손님인데 그냥 보낼 수는 없다고요. 결국 뻘쭘하게 의자에 앉습니다. 그러나 소주 한 잔에 쓸쓸함과 소주 한 잔에 그리움과 소주 한 잔에 희망과 뭐 그런 것들이 떠오릅니다.

그리하여 저는, 주방으로 들어가신 사장님께 아주 뻔뻔한 부탁을 드립니다. "저... 죄송한데요, 저, 커피 말고요, 그냥 소주 한 병 주시면 안 될까요, 안주는 없어도 되는데요." 그리고 저는 안주 없는 깡소주가 어쩌면 이 쓸쓸함과 어울릴 거라 생각합니다. 깡소주 한 잔에 쓸쓸함과 깡소주 한 잔에 그리움 말이죠.

주방에 들어가신 사장님은, 알겠다고 하시더니, 한참 뒤에야 주방에서 나옵니다. 한라산 소주 한 병을 가지고요. 아니, 오징어가 들어간 뜨끈한 부침개와 국물이 시원한 김치찌개와 포슬포슬한 달걀찜과 함께 있는, 한라산 소주 한 병을 들고서요.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깡소주 한 잔과 이 여행을 마무리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부침개 한 조각과 소주 한 잔이 여행을 마무리하는데 더 어울리지 않는가, 하는 마음이 솟아오릅니다. 메뉴에는 없는 안주가 뚝딱 만들어져 탁자 위에 놓였습니다. 소주 한 잔이 입 안에서 녹아들고, 기름기 적당한 부침개가 입 안에서 녹습니다. 깡소주 마시겠다고 앉아있는, 손님 같지 않은 손님을 빼면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사장님은 영업 준비를 해야겠다고 주방으로 들어가십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삶이길 바랍니다

▲ 메뉴에도 없는 안주 ⓒ 이지아


사람들의 조곤조곤 얘기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들리길 기대했던 그 오뎅집에서, 나는 부엌에서 들려오는 칼질 소리를 배경으로 소주 한 잔에 부침개 한 점을 먹고, 소주 한 잔에 계란찜 한 숟가락을 먹으면서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살면 참 좋겠구나, 하고요. 돈은 많이 벌지 못해도 되니, 이곳에서 웨이트리스(그 순간에 나는 웨이트리스라는 말이 떠올랐고, 그리고 웨이트리스여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를 하며 살아가면 좋겠구나, 하고요.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빵 한 조각을 먹고, 책 한 권 들고 바닷가로 나와 지겨울 만큼 바다를 보고, 책을 읽고.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이 되면, 웨이트리스가 되어 일을 하고요. 테이블을 닦고, 의자를 정리하고, 주문을 받고, 안주를 나르고, 엎질러진 술을 닦고, 술병을 치우고. 다시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 빵 한 조각으로 늦은 아침을 먹고, 커피 한 잔과 책 한 권을 들고 바닷가로 나가고, 지겨울 만큼 바다를 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 내가 내 의지로는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삶. 다만 책 제목이 달라지고, 해가 지는 시각이 빨라졌다가 늦어지고,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거나 뙤약볕이 쏟아지고,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달라지는 게 없는 삶. 그러한 변화없는 삶. 그런 삶 속에서 웨이트리스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업 준비를 마친 사장님이 주방에서 나옵니다. 옆 탁자에 앉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짧은 대화를 나눕니다. 50대쯤 되어 보이는 사장님은 화장기 없는 얼굴이 오히려 더 생기 있어 보입니다. 사장님은 오 개월쯤 전 서울에서 내려와 오뎅집을 엽니다. 손님은 아직 많지 않습니다. 하루 매상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오뎅집을 둘러싼 횟집들이 매일 수백만원대의 매출을 올려도, 이 조그마한 가게는 아직 벌이가 많지 않습니다. 가게에 들르는 손님들은, 늦은 밤 마무리로 가볍게 한 잔씩 하고 가시는 분들이라고 합니다.

웨이트리스가 돼 제주도로 떠나는 꿈

▲ 작은 가게 풍경 ⓒ 이지아

그러나 그때의 우리는 돈은 관심사가 아닌 듯했습니다. 나는 이미 돈보다는 변함없는 하루에 안도하며 살아가는 웨이트리스를 꿈꾸고 있었고, 오뎅집은 8시가 훌쩍 넘은 시각에도 여전히 손님같지 않은 손님인 나를 빼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웨이트리스가 되고 싶다고 얘기를 합니다. 꽉막힌 도시가 답답하다고, 누구나 다하는 말을, 나만이 알아낸 큰 비밀인 듯 심각하게 얘기합니다. 탁자 옆에 서서 창 밖을 바라보시던 사장님은 벌써 그럴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아직은 세상에서 할 일이 많을 나이라고요. 그러나 또 그러시네요. 젊은 누군가 이 바닷가로 내려와 일하겠다고 한다면 말리지는 않겠다고요. 매일 봐도 신기했던 바다가 결국엔 일상이 되어버리겠지만, 그래도 말리지는 않겠다고 하시네요.

그리고 사장님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한쪽에 세워져 있던 기타를 집어 듭니다. 바로 전날부터 배우기 시작했다면서, 기타 줄을 튕깁니다. 퉁탕퉁탕. 퉁탕퉁탕. 나는, 다정한 사람들의 조곤조곤 이야기 소리가 아니라, 퉁탕퉁탕 기타 소리를 배경으로, 한라산 소주를 빈 잔에 따르고 웨이트리스로 사는 삶에 대해 생각합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하루가 얼마나 고마운 하루일지 생각합니다. 맑은 소주 한 잔에 은근히 취하면서, 빈 잔에 휴가 마지막 날의 쓸쓸함과 아쉬움을 따릅니다.

그리고 나는 미처 다 마시지 못한 소주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나에게는 서울로 돌아갈 비행기 표가 있고, 다음날이면 아무 일 없었던 듯 북적이는 2호선을 타고 출근을 해야 합니다. 지갑에서 돈을 꺼냅니다. 메뉴에도 없는 부침개와 김치찌개와 달걀찜을 먹으면서, 나는 메뉴에도 없는 그 안주에 나름의 가격을 매깁니다.

그러나 기타를 퉁탕거리던, 까만 두건을 쓰신 사장님은 그 돈을 끝내 받지 않습니다. 웨이트리스가 되고 싶어 하는 여자 여행자에게 좋은 여행이었길 바란다면서, 이 제주도 여행이 좋은 기억 속의 여행이길 바란다면서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돈은 받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꼭 신랑이랑 다시 한 번 오겠다는 밑도 끝도 없는 약속을 해버립니다.

제주도의 가을밤이 와 있고, 나는 원없이 한라산 소주를 마셨습니다. 나는 사장님의 말씀처럼 제주도에서 좋은 추억을 가지고 떠나왔고, 그 좋은 기억을 3개월이 지난 지금, 겨울밤이 내리는 지금, 다시 꺼냅니다.

가을이 겨울이 되고, 웨이트리스가 되어 제주도로 떠나는 꿈을 가슴 한 켠에 간직 한 나는,  '오뎅집'이 장사가 잘 되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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