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어 도리 없이 명명백백하게 60대 중반 시절로 접어든 나이가 되었습니다. 지금이니까 정도껏 기개와 풍채를 유지하며 살지, 옛날 같으면 거지반 고리삭은 신세를 면치 못할 나이입니다. 하여간에 요즘도 하루 2시간 30리씩을 걷고, 이리저리 몸도 많이 움직이며 부지런 바지런하게 삽니다.
그런데 이 나이에도 지혜롭지 못한 구석이 많고 동작이나 행동에 조심스럽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그것의 실례가 새해 초하루 이른 아침에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태안반도태안청년회'에서 주최하는 '백화산 새해맞이 행사'에 참석하여 '신년 축시' 낭송을 하기 위에 새벽 6시쯤 고장의 명산 백화산을 올랐습니다. 같은 아파트에서 사는 반도청년회원 한 분의 승용차를 타고 중턱 '태을암'까지 올라갔습니다. 태을암 주차장에서 내려 100미터가량 산길을 밟고 정상으로 올라가며 중간에서 고무풍선과 행운권 등을 받았습니다.
행운권 번호를 보니 '100번'이었습니다. '100'이라는 숫자가 상큼한 기분을 갖게 했습니다. 당첨되지는 않더라도, 100이라는 숫자가 적힌 행운권을 받은 것만으로도 '행운'일 거라는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핸가, 당첨된 10명 중에 첫 번째로 당첨되어 금 1돈의 '황금돼지'를 탔던 기억도 나고, 은근히 기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새해맞이 행사의 마지막 순서는 '행운권 추첨'이었습니다. 행운권을 받아간 500여 명 중에서 30명이 당첨되어 상품권을 받아갔습니다. 나는 그 30명 안에 들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신년 축시를 낭송한 사람으로서 추첨함에 손을 넣어 행운권 한 장을 집어낼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졌습니다.
내 손에 의해 새해 초하루 새벽에 행운을 안게 된 사람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내 손에 의해 행운을 안게 된 사람은 과거 한때 태안성당 성가대원으로 나와 함께 활동했던 후배여서 공교롭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행운권 추첨도 끝나고, '백화산 새해맞이 행사'에 참가했던 주민들 모두 태을암 마당으로 내려가 떡국으로 아침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태을암의 너른 마당에 여러 개의 차일을 치고 식탁들을 놓고 큰 솥에서 떡국을 끓여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백화산 마루에서 태을암으로 내려가는 길은 두 갈래였습니다. 하나는 공군부대로 연결되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이용할 수 있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곧바로 내려가는 지름길이었습니다. 나는 백화산 태을암에서 정상을 오르고 내릴 적마다 대개는 지름길을 이용하곤 합니다. 지름길에는 가파른 비탈도 있고, 좀 불편한 편입니다.
지름길이 좀 불편함에도 비교적 안전한 시멘트 포장도로를 이용하지 않는 데에는 내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 길은 옛날 1960년대 초 미군들이 개설한 길입니다. 백화산은 남봉과 북봉,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태안 사람들은 1950년대 말 일방적으로 미군에게 백화산의 북봉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백화산의 북봉은 갈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미군은 백화산 북봉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했고, 1970년대에 태안에서 철수를 하면서 그 미사일 기지를 한국군에게 넘겨주었습니다. 한때는 그 기지를 육군에서 관할을 했는데, 90년대부터 공군부대로 운용되고 있지요.
나는 그 포장도로를 밟을 때마다 한마디도 못하고 미군에게 빼앗겨 버린 백화산 북봉, 우 리 고장의 명산임에도 갈 수 없는 북봉을 생각하면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박탈감과 상실감을 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지는 현상 때문에 여간해서는 그 포장도로를 밟지 않고, 태을암과 정상 사이의 불편한 지름길을 밟곤 하는 것이지요.
새해 초하루의 이른 아침에도 그런 평소의 내 정서가 알게 모르게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외면하고 나는 굳이 너덜겅도 있고 불편한 지름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너덜겅은 잘 통과했고, 바위와 바위 사이의 나무뿌리와 돌이 많은 비좁은 길을 조심조심 걸어서 거지반 내려왔을 때였습니다. 한 순간 나는 방심을 하고 말았습니다. 길바닥에 노출된, 비스듬히 누운 소나무 뿌리를 대수롭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나무뿌리를 밟은 거지요.
길바닥에 노출된 그 소나무 뿌리는 상고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기를 머금었고, 그 물기는 얼어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뿌리를 밟는 순간 나는 미끄러졌고, 옆으로 넘어지면서 비탈길이었던 탓에 앞으로인지 뒤로인지 한 바퀴 크게 굴러서 1미터 아래 구덩이로 떨어져 박히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이었고, 정신이 없었지요. 사람들이 와서 부축을 해주어서 간신히 일어났는데, 다행히 깨지거나 부러진 데는 없었습니다. 양쪽 엉덩이가 되우 아팠지만 걸을 수는 있었습니다. 한 손은 묵주를 쥐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프린트한 신년 축시를 끼운 케이스를 들고 있었는데, 신년 축시 케이스만 땅에 떨어져 있어서 얼른 주워들었지요.
옷을 털고 태을암 마당으로 가서 떡국을 먹으려는 사람들의 열 뒤에 섰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아무것도 없어서 내가 넘어졌던 곳으로 다시 올라가 납작한 스마트폰과 차 열쇠꾸러미를 쉽게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제대로 미끄러져서 호되게 넘어지면서 크게 한 바퀴 굴러 1미터 아래 구덩이로 떨어져 박혔는데도, 왼쪽 이마만 조금 긁혔을 뿐 터지거나 깨지거나 부러진 데가 없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천만다행, 운수대통, 액땜, 행운 등등의 단어들이 줄줄이 내 의식 안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 단어들의 실체를 확인하고 즐기면서 나는 떡국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한 그릇을 말끔히 비우고도 반 그릇을 더 받아서 먹었지요. 그리고 엉덩이의 통증을 즐기는 기분으로 산을 내려갔습니다. 또 산을 내려와서는 내가 사는 아파트까지 반 마장 거리를 즐겁게 걸었습니다.
집에 오니 식탁 앞에 여러 개의 달력들을 펴놓고 우리 가족과 우리 집안의 갖가지 주요 사항들을 일일이 표시하는 일을 하고 있던 아내가 내 왼쪽 이마의 상처를 보고 연유를 물었습니다. 실토를 했습니다. 아내의 입에서도 천만다행, 운수대통이라는 말이 나오더군요. 아내는 내 이마에 일회용 반창고를 붙여주고 엉덩이에 파스를 붙여주면서도 액땜이니 천운이니 따위의 말을 입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내가 미끄러져 넘어진 장소를 자신의 눈으로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새해 초이틀인 어제 오후 백화산을 올랐습니다. 부부가 함께 백화산을 오르기는 오랜만이었습니다. 아내는 카메라를 준비했고, 조금씩 날리는 눈발을 보고 불안해하면서도 즐거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태을암 근처 '태을동천' 바로 옆 내가 넘어진 장소를 카메라에 담았고, 내가(우리 가족 모두가) 새해 첫날 큰 행운을 온몸으로 담뿍 안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왼쪽 이마에 일회용 반창고를 붙이고 엉덩이에는 파스를 붙였지만, 내가 새해 첫날 이른 아침 산행 길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것은 결코 불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상서로움과 행운을 상징하는 용의 해, 2012년 첫 아침의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이에도 지혜롭지 못한 구석이 많고 동작이나 행동에 조심스럽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그것의 실례가 새해 초하루 이른 아침에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 백화산 새해맞이 행사 새해 첫날 새벽, 충남 태안군 태안읍 백화산 정상에서 거행된 '새해맞이'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백화산을 오른 주민들 ⓒ 최경자
행운권 번호를 보니 '100번'이었습니다. '100'이라는 숫자가 상큼한 기분을 갖게 했습니다. 당첨되지는 않더라도, 100이라는 숫자가 적힌 행운권을 받은 것만으로도 '행운'일 거라는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핸가, 당첨된 10명 중에 첫 번째로 당첨되어 금 1돈의 '황금돼지'를 탔던 기억도 나고, 은근히 기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새해맞이 행사의 마지막 순서는 '행운권 추첨'이었습니다. 행운권을 받아간 500여 명 중에서 30명이 당첨되어 상품권을 받아갔습니다. 나는 그 30명 안에 들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신년 축시를 낭송한 사람으로서 추첨함에 손을 넣어 행운권 한 장을 집어낼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졌습니다.
내 손에 의해 새해 초하루 새벽에 행운을 안게 된 사람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내 손에 의해 행운을 안게 된 사람은 과거 한때 태안성당 성가대원으로 나와 함께 활동했던 후배여서 공교롭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행운권 추첨도 끝나고, '백화산 새해맞이 행사'에 참가했던 주민들 모두 태을암 마당으로 내려가 떡국으로 아침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태을암의 너른 마당에 여러 개의 차일을 치고 식탁들을 놓고 큰 솥에서 떡국을 끓여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 백화산 산길 구덩이내가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한 바퀴 굴러 떨어진 구덩이의 모습 ⓒ 구갑회
백화산 마루에서 태을암으로 내려가는 길은 두 갈래였습니다. 하나는 공군부대로 연결되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이용할 수 있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곧바로 내려가는 지름길이었습니다. 나는 백화산 태을암에서 정상을 오르고 내릴 적마다 대개는 지름길을 이용하곤 합니다. 지름길에는 가파른 비탈도 있고, 좀 불편한 편입니다.
지름길이 좀 불편함에도 비교적 안전한 시멘트 포장도로를 이용하지 않는 데에는 내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 길은 옛날 1960년대 초 미군들이 개설한 길입니다. 백화산은 남봉과 북봉,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태안 사람들은 1950년대 말 일방적으로 미군에게 백화산의 북봉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백화산의 북봉은 갈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미군은 백화산 북봉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했고, 1970년대에 태안에서 철수를 하면서 그 미사일 기지를 한국군에게 넘겨주었습니다. 한때는 그 기지를 육군에서 관할을 했는데, 90년대부터 공군부대로 운용되고 있지요.
나는 그 포장도로를 밟을 때마다 한마디도 못하고 미군에게 빼앗겨 버린 백화산 북봉, 우 리 고장의 명산임에도 갈 수 없는 북봉을 생각하면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박탈감과 상실감을 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지는 현상 때문에 여간해서는 그 포장도로를 밟지 않고, 태을암과 정상 사이의 불편한 지름길을 밟곤 하는 것이지요.
새해 초하루의 이른 아침에도 그런 평소의 내 정서가 알게 모르게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외면하고 나는 굳이 너덜겅도 있고 불편한 지름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너덜겅은 잘 통과했고, 바위와 바위 사이의 나무뿌리와 돌이 많은 비좁은 길을 조심조심 걸어서 거지반 내려왔을 때였습니다. 한 순간 나는 방심을 하고 말았습니다. 길바닥에 노출된, 비스듬히 누운 소나무 뿌리를 대수롭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나무뿌리를 밟은 거지요.
▲ 백화산 산길 구덩이새해 첫날 이른아침에 하산을 하다가 미끄러져 넘어진 장소를 2일 오후 아내와 함께 다시 가서 살펴보았다. ⓒ 구갑회
길바닥에 노출된 그 소나무 뿌리는 상고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기를 머금었고, 그 물기는 얼어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뿌리를 밟는 순간 나는 미끄러졌고, 옆으로 넘어지면서 비탈길이었던 탓에 앞으로인지 뒤로인지 한 바퀴 크게 굴러서 1미터 아래 구덩이로 떨어져 박히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이었고, 정신이 없었지요. 사람들이 와서 부축을 해주어서 간신히 일어났는데, 다행히 깨지거나 부러진 데는 없었습니다. 양쪽 엉덩이가 되우 아팠지만 걸을 수는 있었습니다. 한 손은 묵주를 쥐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프린트한 신년 축시를 끼운 케이스를 들고 있었는데, 신년 축시 케이스만 땅에 떨어져 있어서 얼른 주워들었지요.
옷을 털고 태을암 마당으로 가서 떡국을 먹으려는 사람들의 열 뒤에 섰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아무것도 없어서 내가 넘어졌던 곳으로 다시 올라가 납작한 스마트폰과 차 열쇠꾸러미를 쉽게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제대로 미끄러져서 호되게 넘어지면서 크게 한 바퀴 굴러 1미터 아래 구덩이로 떨어져 박혔는데도, 왼쪽 이마만 조금 긁혔을 뿐 터지거나 깨지거나 부러진 데가 없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천만다행, 운수대통, 액땜, 행운 등등의 단어들이 줄줄이 내 의식 안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 단어들의 실체를 확인하고 즐기면서 나는 떡국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한 그릇을 말끔히 비우고도 반 그릇을 더 받아서 먹었지요. 그리고 엉덩이의 통증을 즐기는 기분으로 산을 내려갔습니다. 또 산을 내려와서는 내가 사는 아파트까지 반 마장 거리를 즐겁게 걸었습니다.
집에 오니 식탁 앞에 여러 개의 달력들을 펴놓고 우리 가족과 우리 집안의 갖가지 주요 사항들을 일일이 표시하는 일을 하고 있던 아내가 내 왼쪽 이마의 상처를 보고 연유를 물었습니다. 실토를 했습니다. 아내의 입에서도 천만다행, 운수대통이라는 말이 나오더군요. 아내는 내 이마에 일회용 반창고를 붙여주고 엉덩이에 파스를 붙여주면서도 액땜이니 천운이니 따위의 말을 입에 올렸습니다.
▲ 상고대와 같은 나무뿌리갈바닥 위에 비스듬히 노출된 소나무 뿌리를 밟은 것이 화근이었다. 내가 가리키는 나무뿌리를 밟으면서 미끄러져 넘어졌고, 비탈인 탓에 한 바퀴 크게 굴러 내가 서 있는 구덩이로 처박혔다. ⓒ 지요하
그리고 아내는 내가 미끄러져 넘어진 장소를 자신의 눈으로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새해 초이틀인 어제 오후 백화산을 올랐습니다. 부부가 함께 백화산을 오르기는 오랜만이었습니다. 아내는 카메라를 준비했고, 조금씩 날리는 눈발을 보고 불안해하면서도 즐거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태을암 근처 '태을동천' 바로 옆 내가 넘어진 장소를 카메라에 담았고, 내가(우리 가족 모두가) 새해 첫날 큰 행운을 온몸으로 담뿍 안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왼쪽 이마에 일회용 반창고를 붙이고 엉덩이에는 파스를 붙였지만, 내가 새해 첫날 이른 아침 산행 길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것은 결코 불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상서로움과 행운을 상징하는 용의 해, 2012년 첫 아침의 큰 행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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