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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치부가 이근안 목사를 만들었다"

한국종교개혁시민연대 "이근안을 목사직에서 사임시켜라"

등록|2012.01.03 19:19 수정|2012.01.03 19:19

▲ CIA 소속 최고의 고문기술자 H가 일언반구 없이 고문실로 들어가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유수프의 새끼손가락을 손도끼로 잘라낸다(영화 '언싱커블' 장면 중에서) ⓒ 오마이뉴스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는 사람이 목사가 되고나면 성자가 되는 것으로 치부되는 작금의 한국교회 치부가 바로 이근안이라는 기형적인 목사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종교개혁시민연대·한국교회정화운동협의회(대표 이하 한종연)은 지난 1월 1일 <이근안과 한국교회에게 고한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종연은 성명서를 통해 민주화의 대부로 일컫는 김근태 통합민주당 상임고문의 사망소식을 먼저 애도했다. 이어 사망의 주요 원인제공자였던 이근안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 전 경감)에 대한 목사직 박탈을 요구해 향배가 주목된다.

이근안을 보면 한국교회의 값싼 용서와 은혜 발견돼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이근안 인터뷰 기사 중에서)

1985년 12월 19일 법정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바로 고문기술자로 악명 높았던 이근안 전 경감의 김근태 선생에 대한 고문진술이 흘러 나왔기 때문. 이근안은 진술을 통해 약 20여일간 자행된 전기고문과 물고문 방식을 뚜렷이 기억해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나오지 않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튼 사건.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하하기 위해 가한 물고문 현장. "최후의 만찬""장례식 날"등의 표현을 서슴지 않고 자행했던 집단구타와 가혹한 인권침해 등등.

이근안 스스로도 고문기억을 상기시키기엔 너무 끔찍스러웠던지 중간에 어지러운 듯 말을 중단한다. 그러며  이근안은 난간을 붙들고 쉬기까지 한다. 당시 법정 현장은 그야말로 인간괴물의 포효 그 자체였다.

한종연은 위와 같은 이근안의 행태를 보며 값싼 용서라는 표현으로 비난했다.

"민주화 운동을 하시다 고문을 받은 분은 그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하셨지만 수많은 사람을 고문했던 이근안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며 목사를 하고 있다. 자신이 했던 일은 애국으로 그 때로 돌아가도 또 다시 그 일을 하겠다는 말을 하는 이근안을 보며 한국교회의 값싼 용서와 은혜를 발견하게 된다"

한종연은 이어 한국교회 일부 종단의 목사허가 남발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근안 목사와 소속교단에는 목사직 사임을 종용했다.

네티즌 분노..."공안목사에겐 용서가 면죄부?...안돼!"

▲ 포승줄에 묶인 김근태 전 의원. 김 전 의원은 수사과정에서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해 오랫동안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 오마이뉴스


한종연에 이어 네티즌들도 각종 포탈을 통해 서명과 청원캠페인을 벌이는 등 이근안 목사에 대한 비난여론이 들끓고 있다.

네티즌 A씨는 고문사건을 인용해, 이근안 스스로도 자백과 사과를 하지 않은 현재진행형 범죄라면서 당장 고인과 가족들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성토했다. A씨는 이어 김근태 고문의 이근안 면회 기록을 찾아내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상황이라고 질타했다.

당시 김 고문은 "사죄하면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이근안을 보며 차마 용서하지는 못했다. 악어의 눈물이 아닐까, 혹시 내가 또 둘리는 것은 아닐까? 또 둘리면 과거에 당한 것의 곱빼기로 당하는 기분이었을 것 같았다"며 심경을 토로했다.

또 다른 네티즌 B씨는 이근안의 끝 모를 궤변이 아직도 진행중이라며,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 전문을 공개했다.

"공안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은 비밀 결사 등 조직에 소속돼 있다. 조사를 받은 이들 상당수는 해당 조직 기밀을 당국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원래 조직으로 복귀한 뒤 대접이 예전만 같겠는가. '배신자' 소리 듣지 않으려면 비밀 누설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대야 한다. 결국 '고문에 못 이겨서'라는 대답이 제일 타당하지 않겠냐."(이근안 인터뷰 중에서)

네티즌 C씨는 강조한다.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라고. 이근안은 그 용서를 품에 안고 감화 받아 기독교에 귀의했다고. 그러나 단 한 가지, 목회자로서 자질은 차치하고 용서를 품에 안은 당사자가 자신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을 또 다시 능욕하는 행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최근 이근안 목사는 자신의 직을 이용해 대외활동을 하며 자신의 안보관을 설파하고 있다. 그가 한 주요 발언으로 "전교조가 학생들에게 북한을 찬양하는 교육을 하고..""무수히 많은 간첩들이 버젓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데도..""대공분야, 간첩사건 수사는 속수무책의 지경" 등이 있다.

한편 김근태 고문은 서울대 재학 중이던 71년 서울대 내란음모사건, 민청련 사건ㆍ전민련 활동 등으로 수배와 투옥을 되풀이 했다. 이후 15대부터 17대까지 내리 3선 국회의원을 지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이르러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다.

김 고문은 군사정권 시절인 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기술자로 불린 이근안 전 경감 등에게 무려 10차례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는 등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평생 식사도 제대로 못하며 파킨슨병을 앓다 지난 12월 30일 오전 뇌정맥 혈전증으로 숨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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