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을 금함'이라는 간판이 붙은 여관에서 쓰는 시
[서평] 시인 이현채 첫 시집 <투란도트의 수수께끼>
▲ 시인 이현채시인 이현채가 첫 시집 <투란도트의 수수께끼>를 펴냈다. ⓒ 이종찬
세월은 내 얼굴에 그림을 그려놓고 날마다
내 자신과 작별을 한다
수치는 자살을 하고 사랑은
날 죽인다
빚을 내어 산 욕망은 이글거리고
퉁퉁 부은 말소리로
"세상을 귀에 가득 담아 올 거예요."
숨은 그림에 귀를 대고 낯선 소리를 듣는다
- <도로시 다이어리> 몇 토막(12쪽)
시인 이현채가 첫 시집 <투란도트의 수수께끼>를 펴냈다. 이 시집은 제목 그대로 고대 중국 황제의 딸이었던 토란도트가 타타르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에게 구혼을 하는 젊은이들에게 내는 세 가지 수수께끼 같은 시들로 가득하다. 마치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품고 있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참수형이라도 시킬 것처럼 그렇게.
이 시집에 담긴 시들을 꼼꼼하게 읽다보면 시인 이현채는 투란도트가 낸 수수께끼를 푼 칼라프 왕자 같은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하자면, 시인은 스스로 가시를 뾰쪽하게 내밀고 있지만, 그 가시를 꺾는 아름다운 사랑을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다. 시인은 이 시집 곳곳에 박힌 가시 같은 시로 어지럽고도 힘겨운 세상을 마구 찌른다.
시인의 시는 세상에 맞서기 위해 들고 창이기도 하고 방패이기도 하다. 시인이 시집 곳곳에서 이 세상과 맞서며 좌충우돌하는 것도, 삶이란 화두를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거울에 비춰보며 우왕좌왕하는 것도 참 사람살이를 찾기 위한 '군중 속의 고독'을 지독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 쌍둥이들이 좌지우지하는 세상
▲ 이현채 첫 시집 <투란도트의 수수께끼>이 시집에 담긴 시들을 꼼꼼하게 읽다보면 시인 이현채는 투란도트가 낸 수수께끼를 푼 칼라프 왕자 같은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 지혜
시인에게 있어 첫 시집은 '시인의 알몸'이라 할 수 있다. 시인 이현채가 펴낸 첫 시집 <투란도트의 수수께끼>는 시인이 그동안 살아온 삶이자 앞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아우성이다.
시인이 <시인의 말>에서 "아무 생각도 없이 / 생각이 걸어가요"라고 쓴 까닭도 생각을 아무리 골똘히 해도 어쩌지 못하는 세상, 차라리 아무런 생각 없이 주어지는 그대로 사는 것이 어쩌면 자연 그대로 사는 길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집에 담긴 총 67편의 시는 '빨리빨리'를 외치며 물질로 바뀌는 세상, 한순간 스치는 생각이나 그 어떤 사상마저도 물질 앞에 폭 고꾸라지는 이 세상과 힘겨운 씨름을 하고 있다. 제1부 '다른 나라 다른 계절', 제2부 '투란도트의 수수께끼', 제3부 'M1', 제4부 '망각의 음료'에 실려 있는 <공기인형> <숨바꼭질> <고독 수집가> <난파선에 실린 밤> <M2-몽유병자> <집시의 달> <금지된 숲> <박물관에서는 모두가 시간 속에 갇힌다> 등이 바로 그 시편들이다.
"넘쳐나는 말의 시체들
허풍쟁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미는 죽었다
옷매무새를 고치고
립스틱을 바르고
허영심에 들뜬 위선자들 사이에서
진실도 죽었다
......
자살인가
타살인가
포크에 찔린 채 싸늘하게 죽어 있는
그믐달을 본다"
- <마키아벨리> 몇 토막(50~52쪽)
시인 이현채가 바라보는 세상은 마치 외줄을 타는 곡예사처럼 아찔하고도 위태롭다. 세상은 '말의 시체'들로 가득하며, 허풍쟁이들이 너무 많아 아름다움마저 죽고 없다. 속내보다 겉치레를 더 신처럼 믿는 가짜들 때문에 진실마저 죽고 없다. 마치 절대군주론을 내세운 '마키아벨리'란 쌍둥이들만이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이 바라보는 이 세상에는 가치 있는 아름다운 거울보다 그 거울을 감싸고 있는 금테가 더 빛나고 있다. 시인이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짓밟힌 웨딩케이크에 불과한 말들'만 비릿하게 쏟아내고 있다. '머리에 이기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술집에서 철학을 얘기하며 떠들지만 / 식어버린 사랑을 논하는 거'나 다를 바 없다.
시인 눈에 비치는 모든 것들은 마키아벨리가 촘촘하고 튼튼하게 쳐놓은 덫이다. 세상 곳곳에서는 툭하면 자살인지 타살인지도 모르는 슬픈 자살사건과 실종사건 같은 물음표만 쏟아지는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오죽했으면 그믐달마저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나 쓰는 포크에 찔려 싸늘하게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겠는가.
시인 이현채가 이 세상을 덫으로 바라보며 '맞장'을 뜨는 시들은 시집 곳곳에 널려 있다. '나는 낡은 인형이다 / 새 인형의 생일날 나는 버려졌다'(<공기인형>)라거나 '이제 우리는 다른 나라 다른 계절'(<다른 나라 다른 계절>), '나는 챠트 속에서 나온 환자'(<거짓말을 디스플레이하다>), '내 눈물이 다 말라버리면 물고기는 빼빼 말라 죽어 버릴 거야'(<블루 2>), '자살을 금함이라는 간판이 붙은 여관'(<기억은 잠들지 않는다>), '집에서 숨을 곳이 없을 때 / 컴퓨터를 열고 전원을 켠다'(<컴퓨터에 뜨는 별>) 등이 그러하다.
시인 이현채는 아이를 키우며 혼자 살아가는 여자다. 시인은 의식주를 위해 마포에서 논술교사를 맡아 아이들과 함께 아등바등거리고 있다. 그런 시인에게 온통 거짓과 껍데기로 화장한 물질만능주의 세상은 가혹하다. 시인이 세상에 맞서 시를 무기로 삼아 좌충우돌하는 것도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을 똑바로 세우기 위해서다. 그래야 시인 자신도 참살이를 할 수 있으므로.
수수께끼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여자가 비추는 거울
"빈 사무실에 앉아 창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 시계의 초침소리마저 꺾는데 / 컴퓨터 옆 동그란 거울이 빤히 나를 쳐다본다 피식, 웃으며 / 얼른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리다가 / 가고 싶은 곳이 없어, 그 어느 곳도 / 그래서 찾아왔지, 네 거울 속으로 / 거울 속에서 / 박은옥의 '사랑하는 이에게'가 흘러나온다" - <나는 낯선 나라에 와 있다> 몇 토막(130쪽)
<투란도트의 수수께끼>는 그야말로 투란도트가 내는 세 가지 수수께끼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여자가 스스로에게 비추는 거울이다. 이 낯선 세상이란 거울 속에 비친 한 여자는 저 혼자 쪼그리고 앉아 훌쩍훌쩍 울기도 하고, 몽유병 환자처럼 실눈을 뜬 채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그 울음과 허우적거림은 곧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저항이자 어디론가 도망칠 수도 없는 삶을 이어가기 위한 끝없는 몸부림이다.
시인 유안진은 시인 이현채의 시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현채의 시를 읽다 보면 절망이 발자국을 찍는 것 같다. 시인은 '고독을 나의 귀중품'으로 삼고(<도로시 다이어리>), 금지된 숲이나 낯선 나라로 간다. … 자본의 도시 어디에도 갈 곳을 잃은 시인은 '텅 빈 도서관으로 들어가 누에잠'을 자며 '머릿속에 음지식물'을 키우며(<공기인형>), '퉁퉁 붓'는 말을 하며 떠돈다(<도로시 다이어리>)."
문학평론가 이경호는 "이현채 시인의 시집 <투란도트의 수수께끼>는 물에 흠뻑 젖어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어 그는 "이 시집은 마치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잠기지를 않아 그냥 콸콸콸 쏟아질 뿐'(<블루2>)인 눈물로 흠뻑 젖어버린 손수건 같기도 하고 온몸에서 흐르는 핏물을 닦아내는 더러운 걸레 같기도 하다"며 "이 시집은 물에 떠다니는 종이배 같기도 하다"는 평을 남겼다.
시인 이현채는 1966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2008년 계간 <창작 21>여름호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일간문예뉴스 <문학in> 편집기자를 맡고 있으며, 애지문학회, 현대시학회, 시에문학회, 시산맥, <창작 21> 작가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 마포에서 독서토론 및 논술교사로 일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문학in>에도 보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