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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반가워요. 처음 뵙네요

[고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도식 현장에서 쓴 편지

등록|2012.01.15 14:03 수정|2012.01.15 14:03
종철이형, 형이라고 불러서 기분 나쁜 건 아니죠? 형은 큰 안경을 쓰고, 형 마음처럼 새하얀 눈 같은 무대 배경 위에서 형을 기억하는 100여 명의 친구들을 지켜보고 있네요. 87년 1월 14일 형이 지금의 저보다 어린 23살 때,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던 이곳(현 경찰청인권센터)에서 단지 다른 선배가 어디 있는지 말하지 않고 고문을 견디다 먼저 다른 곳으로 가셨죠.

그 사실을 숨기려고 권력자들은 "탁하고 치니깐, 억하고 죽었다"라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형의 친구들을 속이려 들었죠. 그러나 속지 않았죠. 속지 않고, 분노했어요. 공분했어요. 그렇게 일어난 '6월 항쟁'은 대한민국 헌법을 직선제로 바꿔 놓았죠. 그런 형의 25주기 추도식이 열린다고 해서 이렇게 참석해 형을 보고 있어요.

▲ ▲ 14일 오후 (구)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에서 고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 김혜원

사실 여기 오기 전에 친구를 만났어요. 1부로 11시 마석열사공원묘지에서 묘소참배가 있었는데, 거긴 남양주시라 너무 멀었거든요. 2부는 2시에 (구)남영동 대공분실 마당(현 경찰청인권센터)에서 열린다고 해서요, 시간이 남아 방학을 맞아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온 친구를 광화문에서 만났어요.   여행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 친구에게 형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많이 멋쩍어하더라고요. 형에 대해 잘 몰랐거든요. 그래도 광화문에서 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요즘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광장으로 나와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거든요. 많이 좋아졌다고들 해요. 그런데 형이 당한 물고문은 없어졌지만, 추운 겨울 물대포를 많은 시민에게 쏘기도 해요. 억압하려는 것이 씁쓸하게도 그때와 닮은 것 같아 슬프네요.
이런 슬픔을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님은 자작시 '그게 바로 너였구나'로 읊었지요. 형도 느꼈죠? 박 소장님의 쩌렁쩌렁 하신 기백을요. 형을 기억하는 친구 분들도 그 힘찬 기백에 놀랐거든요. 박 소장님이 형이 우리와 함께 한다고, 촛불을 들 때도, 희망버스가 달릴 때도, 맨 앞에서 같이 한 것이 형이었다고 할 때,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어요.

사회를 본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님은 아프리카 어느 부족이야기를 하면서, "한 사람이 죽었을 때, 한 명이라도 기억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저승으로 가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한다고 믿는다"고 했을 때 거기 모인 형의 친구 분들은 형과 같이 있었어요.

▲ ▲추도식이 열린 14일 오후 (구)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에 100여명이 넘는 추모객들이 참석했다. ⓒ 김혜원

그런데 아쉬운 것은 형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거예요. 추도식에서 유수진 양(서울대단과대학생회장연석회의 의장)처럼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 되어버린 형을 기억하며 힘찬 추도사를 읊는 친구도 있는가 하면요,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쥐꼬리만 한 알바비에 치이고, 비싼 등록금에 치이고, 취업난에 치이는 현실 속에서 많이 힘들어 하고 있거든요.

이렇게 당장 처한 현실이 힘들어요. 너무 힘든 거죠. 그런데 아무도 우리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아요. 그래서 거리로 나가는데, 나가면 유 양이 말한 것처럼 '선배'가 그러했듯 맞고 끌려가고 감옥에 갇혀요. 이러한 현실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나도 엄숙한 추도식 무게 때문인지 다들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더라고요.

점점 무거워지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덜어준 건 신주희(서울대 관악노래패협의회 회장) 학생처럼 형을 기리기 위해 추도식에 참석한 대학생들이었어요. 형이 즐겨 불렀던, '그날이 오면'을 다 같이 불렀잖아요. 또한 마음으로나마 형을 기리는 많은 후배들이 우리나라에 있잖아요.

그런데 이런 후배들이 모두 다 와서 헌화하기에는 형의 마지막 공간이 너무 좁더군요. 빛도 잘 안 들어오는 좁은 나선형 계단을 5층이나 올라 들어갔을 그 고문실이요. 작은 욕조, 세면대, 좌변기, 책상, 침대 하나, 의자 두 개 이렇게 딱 들어가 꽉 찬 3평 남짓한 그 고문실은 너무 좁더군요.

세면대 위에서 우리를 보고 있는 형에게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어요. 손 하나 들어갈 좁고, 위로 긴 창문 두 개로 보이는 밖이 전부인 그 공간에서 어떻게 형의 눈을 마주보겠어요. 차라리 밖이 잘 보이지 않는 창문으로 지나가는 기차를 보는 것이 더 쉽더군요. 두껍고 어두운 초록색 철문, 거기에 달린 밖에서만 보이는 작은 구멍, 그 구멍에서 느껴졌을 차가운 시선, 형은 어땠을까를 생각하니 그 고문실에 오래 있지 못하겠더군요.

▲ ▲ (구)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에 고인이 물고문을 받아 사망한 509호 고문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있다. ⓒ 김혜원

형, 저는 형이 내려오지 못한 그 좁은 나선형계단을 뱅글 뱅글 돌며 내려왔어요. 5분 남짓 걸리는 그 계단을 내려오면서 지금 우리들이 하고 있는 문화제 형식의 집회가 미안하게도 느껴졌어요. 그런데 형 우리는 지치지 않으려고 이 방법을 선택했어요. 절대 가볍지 않아요. 우리의 마음은 지금 이곳을 짓누르고 있는 살아 있어 미안한 마음만큼이나 진실 되거든요.

검은 건물보다 더 짙은 검정색으로 칠해진 철대문을 나서기 전에 조국 교수님한테 여쭤봤어요. "20대들이 많이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조 교수님은 " 20대 관심이 (박종철 열사와) 연이 없어 지속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나이 때 이야기니 많이 확산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기사 아닌 편지를 써 봐요. 형이 읽어줬으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면 우리 친구들이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요.

형, 반가웠어요. 기억할게요. 그리고 전할게요.
덧붙이는 글 필자가 추도식에 참석해 작성한 편지형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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