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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 이게 숭례문이 아니라고?

[나주와 목포의 문화유산을 찾아 떠난 여행 ①] 나주목 내아와 관아

등록|2012.01.18 09:45 수정|2012.01.18 12:01

▲ 남고문 ⓒ 이상기


나주 가는 길은 멀다. 버스로 네 시간은 걸린다. 광산구를 지나 나주 시내로 들어서니 옛 도시의 풍모가 조금은 느껴진다. 그런데 시내 중심가에 플래카드가 요란하다. 호남선 KTX 신노선이 광주에서 나주역을 지나 목포로 가게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다. 현재 호남선 KTX는 나주역을 거쳐 목포로 간다. 그런데 새로운 노선이 만들어질 경우, 나주 쪽으로 날 수도 있지만 무안공항 쪽으로 날 수도 있다.

신노선은 양 지역의 경제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나주와 무안 주민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상이다. 구호를 보니 나주 시민은 신노선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 같다. 이들 플래카드를 보면서 우리는 남고문(南顧門)을 지난다. 남고문은 나주읍성의 남쪽문으로, 1993년 12월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팔작지붕 건물이다.

▲ 나주목 내아와 관아 지도 ⓒ 이상기


겉모습이 서울성곽의 숭례문(남대문)과 흡사하다. 그것은 나주읍성이 당시 한양도성과 4대문을 모방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주읍성은 조선 태종 때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고문을 지나 우리는 금성관 앞으로 간다. 이곳에는 나주목사(牧使) 내아(內衙: 살림집)인 금학헌(琴鶴軒), 객사인 금성관(錦城館), 관찰부 아문(衙門)인 정수루(正綏樓), 나주목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문화관이 있다.

▲ 관찰부 아문 정수루 ⓒ 이상기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금성관 앞에 조성된 곰탕 거리로 간다. 나주곰탕은 양지와 사태를 고아 나온 육수로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 먹거리에 있어서는 남도지방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기대가 크다. 곰탕집에 들어가니 방송사 프로에 출연했다는 내용이 창문에 그득하고, 입구에는 여수엑스포 공식음식점 선정업소라는 플래카드도 걸려 있다.

안에는 사람들이 버글버글하다. 나주의 문화관광해설사인 이성자씨가 미리 예약과 주문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자리에 앉자 바로 곰탕이 나온다. 뽀얀 국물에 고기가 잔뜩 들어가 있다. 밥을 말아 한 입 먹어보니 맛이 정말 괜찮다. 간단하게 소주도 한 잔 곁들인다. 나주곰탕의 이름이 허투루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나주에서는 곰탕 외에 영산포 홍어, 구진포 장어가 유명하다. 

곰탕으로 맛보고, 나주목 문화관에서 알게 된 나주

▲ 나주목 문화관 ⓒ 이상기


점심 식사 후 우리는 나주목 문화관으로 간다. 이곳에는 나주목의 역사가 6개 부분으로 나눠 설명되고 있다. 입구에는 금성별곡 제1장이 적혀 있다. 이 노래는 1480년(성종 11년) 박성건(朴成乾: 1418-1487)이 나주의 경관과 유적을 찬양한 경기체가다.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성건은 1472년 55세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후, 나주에서 교수로 사마시에 응시하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금성별곡은 <함양박씨세보>에 실려 있다.

바다의 동쪽, 호수의 남쪽, 나주 큰 고을에,
금성산, 금성포, 예로부터 고개를 흘러 도네.
아! 빼어난 인재들이 모여드는 광경, 어떠한가.
천년 승지에, 백성이 편안하고 물산이 풍부하니,
아! 아름다운 기가 푸르고도 성한 광경, 어떠한가.

海之東 湖之南 羅州大牧
錦城山 錦城浦 亘古流峙
爲 鍾秀人才 景幾何如
千年勝地 民安物阜
爲 佳氣蔥籠 景幾何如    

▲ 나주읍성 축소모형 ⓒ 이상기


입구 왼쪽의 두 번째 부분에는 나주의 역사와 인물이 소개되어 있다. 나주의 인물로는 세종과 세조 때 신숙주가 있고, 목사(牧使)로는 임진왜란 전후의 김성일과 유백증이 가장 유명하다. 세 번째 부분에는 나주목사 부임장면이 미니어처로 재현되어 있다. 네 번째 부분은 나주읍성 둘러보기다. 나주읍성의 실제모습을 축소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다섯 번째 부분은 관아 둘러보기로, 동헌과 객사 향청 등을 매직비전으로 보여준다. 마지막 부분에는 다시 태어나는 나주라는 이름으로 현재 나주의 모습이 보여진다. 

나주목 내아에서 만난 두 목사, 김성일과 유석증

▲ 나주목 내아 ⓒ 이상기


나주목 문화관 옆에는 나주목 내아가 있다. 내아로 들어가는 문에 보니 금학헌(琴鶴軒)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금학은 현학금의 다른 표현으로 거문고를 말한다. 그러므로 금학헌에는 남성적인 악기인 거문고를 타면서 지음(知音)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이 표현되어 있다. 예로부터 시와 음악 그리고 술은 풍류를 아는 문사(文士)의 필수조건이었다.

내아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간채 옆에 두 동의 사랑채가 있고, 정면에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열린 ㅁ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마당 건너 안채 가운데는 대청이 있다.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김성일 목사 방이 있고, 왼쪽으로 유석증 목사 방이 있다. 이들 두 사람은 나주목사 중 백성들을 가장 잘 다스린 목민관이었다.

▲ 김성일 목사방 안내판 ⓒ 이상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우리가 잘 아는 선조 때의 관리다. 퇴계 이황의 제자로 1583년 8월 나주목사를 제수받는다. 그는 3년 동안 나주목사직을 수행하고 1586년 11월 파직당한다. 당시는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시작된 때로 상대적으로 서인이 득세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김성일은 나주목사 재임시 대곡서원을 세워 유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수많은 송사를 훌륭하게 해결했다고 한다.

그는 1590년 일본에 통신사 부사로 갔다가 1591년 귀국해, 일본이 침략할 것 같지 않다는 보고를 해 역사적인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시 그는 경상우병사로 진주성 전투에 참여했다. 그리고 경상감사가 되어 진주성에서 왜구와 대치하다 1593년 전염성 열병(癘疫)으로 죽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졸기를 보면, 그는 성품이 강직 방정하고 자질이 아주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593년 진주성에서 백성을 잘 다스리며, 관군과 의병 등 모든 군사를 잘 조화시켰다. 그리고 1년 가까이 진주성에서 적과 싸우며 훌륭한 통솔력을 발휘했다. 4월 1일 그가 죽자 군사와 백성들이 마치 친척의 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 유석증 목사방 ⓒ 이상기


유석증(兪昔曾, 1570~1623)은 오히려 처음 들어본 인물이다. 그런데 이번 답사에 함께 간 유병태 회원의 12대조 되는 분이란다. 자료를 찾아보니 성호 이익이 쓴 <성호사설> '선정재임' 항목에 유석증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참의 유석증(兪昔曾)이 고을 백성들의 호소로 인하여 다시 나주목사에 제수되었다'고 하는데, 이같은 이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유석증은 1610년 7월과 1619년 3월에 나주목사에 부임한다. 1620년 5월 8일 <광해군 일기>에 보면, 유석증을 목사에 제수한 은혜에 보답코자 나주 백성들이 쌀 300석을 바쳤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이듬해인 1621년 2월 18일에는 대미(大米) 1000석을 영건도감에 바치고 유석증의 유임을 청하기도 한다. 유석증은 나중에 전라감사를 지내기도 했다.

"나주의 백성들이 쌀 300석을 바쳐, 유석증을 특별히 목사에 제수한 은혜에 사례하였다. 석증이 전에 나주를 다스릴 때에 유애(遺愛)가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가 떠난 뒤에도 사모하는 상소를 올려 목사를 삼아 주도록 청하였고, 왕명으로 다시 부임해 오자 고을 백성들이 쌀을 바쳐서 사례한 것이다."

사적 제483호 나주목 관아 복원 계획

▲ 나주목 관아 ⓒ 이상기


나주목 내아를 살펴본 우리는 자연스럽게 관아로 향한다. 나주목 관아는 도심 가운데 옛 모습을 상당부분 간직하고 있으면서 복원 가능한 공간을 갖추고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그 가치를 인정, 나주목 관아와 향교를 사적 제483호로 지정하였다. 나주시에서도 관아와 향교를 역사문화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65억 원을 투입하여 8334㎡ 부지를 매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월말까지는 사적내 건물 철거공사를 완료하고 발굴조사를 실시할 것이라고 한다. 장기적으로는 나주목 동헌인 제금헌을 복원하여 객사인 금성관과 함께 옛 모습을 재현할 계획이다. 현재 관아에서는 금성관이 그나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금성관은 나주목의 객사로 조성 성종 20년(1489) 처음 지어졌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크게 중수를 했고, 고종 21년(1884) 삼창을 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금성관 ⓒ 이상기


금성관 정문이 망화루로 우리는 이 문을 통해 관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망화루는 2층 형태의 누각으로, 일제강점기에 없어졌던 것을 2003년 복원하였다. 조금은 현대적이어서 친근감은 떨어진다. 관아 안으로 들어가니 공간이 의외로 넓다. 중간에 3칸짜리 맞배지붕 건물이 있고, 그것을 지나자 웅장한 금성관 건물과 좌우익헌이 나타난다. 오른쪽 건물에는 벽오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금성관(錦城館)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그런데 칸넓이나 높이가 다른 건물보다 커서 객사치고는 웅장한 느낌을 준다. 이제 우리는 금성관과 벽오헌을 지나 관찰사와 목사 선정비를 보러 간다. 선정비는 대개 관아 밖에 있는데, 이곳에는 관아 안에 있다. 나는 혹시 김성일과 유백증의 선정비가 있나 찾아본다. 그러나 그들의 것은 없고, 비슷한 시대 살았던 우복룡(禹伏龍)과 장유(張維)의 선정비는 찾을 수 있다.

▲ 금성토평비 ⓒ 이상기


그리고 조선 말기 안동김씨 세도가인 영의정 김좌근의 영세불망비도 보인다. 또 그 옆에는 금성토평비(錦城討平碑)가 있다. 1894년(고종 31년)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관군이 동학군과 싸워 나주성을 지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다. 비문에는 동학군이 나주목으로 쳐들어오게 된 과정, 관군과 동학군이 싸우는 과정 등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비문은 기우만이 지었고, 비석은 1895년에 세워졌다.
덧붙이는 글 1월14~15일 나주와 목포로 문화유산 답사를 다녀왔다. 주제는 나주의 고대와 중세 문화유산, 목포의 해양과 근대 문화유산이다. 이들 문화유산에 대한 답사기를 6회 연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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