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달사 앞 봉우리가 된 '스님들 신 턴 흙더미'
여주 고달사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다
▲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혜목산에 자리하고 있는 사적 제382호 고달사지. 위에서 아래로 본 전경이다 ⓒ 하주성
사적 제382호 여주 고달사지.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혜목산에 자리하고 있었던 고찰이다. 이 고달사가 언제 무슨 이유로 폐사지로 변했는지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절이 모두 소실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봉황암이란 사명으로 창건이 되었다고 전한다.
고달사는 도대체 언제 화를 입은 것일까?
고려시대의 기록에서 그 맥이 끊기고 만 고달사. 1260년대까지 기록에 보이는 고달사가, 그 이후 기록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1260년까지 보이던 기록이 그 이후 사라졌다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달사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그 중간에 고달사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고달사를 드나드는 스님들이 신에 묻은 흙을 털어 생겼다는 봉우리. 중앙에 나무가 자라고 있는 섬 모양의 봉우리가 '신 털이 봉'이다 ⓒ 하주성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 부도는 고려 초기에 조성이 된 부도이다. 보물 제8호인 석불좌 역시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조물이다. 보물 제7호인 원종대사 혜진탑은 고려 초기인 975년에 조성한 석조부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옮겨 간 보물 제282호 쌍사자석등 역시 고려시대의 석등이다.
현재 고달사지에 남아있는 모든 석조문화재들의 대개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들이다. 고달사의 명칭도 이 석조물들이 모두 '고달'이라는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기 때문에, 절 이름을 고달사라고 했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그런데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달사가 나타난다는 것 하나 만으로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어 고달사가 사라졌다고 하면, 330년 동안의 사라진 역사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고려시대의 석조 ⓒ 하주성
▲ 고려 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석조. 온전한 모습으로 간물지 내에서 발견이 되었다 ⓒ 하주성
'신 털이 봉'과 고려시대의 석조
고달사지가 소재하고 있는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주암리에서 고개를 넘어 고달사지로 향하다 보면, 우측으로 참숯 찜질방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그 길 좌측에는 작은 흙더미 봉우리가 자리하고, 그 위에는 나무들이 자란다. 마을에서는 이 흙더미를 '신 털이 봉'이라고 부른다.
이 신 털이 봉은 고달사에 드나들던 스님들이,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 밖에서 묻은 흙을 털어내 생겼다는 봉우리이다. 얼마나 많은 스님들이 이곳을 드나들었기에, 신발에 묻은 흙을 털어낸 것이 이렇게 흙이 쌓여 봉우리를 이룬 것일까? 그 답은 고달사 안에 남아있는 석조물 등을 돌아보면 가늠이 간다.
▲ 석조의 밑 바닥부분에는 배수구로 보이는 구멍이 뚫려있다. ⓒ 하주성
▲ 아래편에서 본 고달사지 모습. 사적인 고달사지에는 고려시대에 조성한 문화재가 전한다 ⓒ 하주성
현재 고달사지 안에는 두 기의 석조가 있다. 그 규모가 작지 않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고달사지 석조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기도 내에서도 보기 드문 석조문화재이다.
석조는 대개 절에서 물을 담아 두거나 곡물 등을 씻을 때 사용한다. 절의 중심 공간에 석조가 있을 때는 법당을 들어갈 때 정결히 하기 위해서, 손을 씻거나 입을 행구는 데 사용한다. 그러나 고달사지에 있는 문화재로 지정된 한 개의 석조는 건물지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석조는 목욕을 하기 위한 석조가 아닌가도 생각이 든다.
색다른 이런 석조물들이 자리를 하고 있는 여주 고달사지. 아마도 이 고달사지에서 보는 것들이 색다르게 느껴지는 것들 때문에, 고달사지의 폐사가 더욱 안타깝다. 앞으로 더 연구가 되면, 속 시원한 고달사에 대한 내력이 더 나오려는지.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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