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일 버틴 스스로학습 선생님들 "우리도 노동자다"
[현장] 재능교육 천막 농성 1500일... "소수지만 뭉치면 살 수 있어"
▲ 재능교육 노조 투쟁 1500일을 맞아 28일 오후 3시 서울시청 앞 재능교육 빌딩 앞에서 정당, 노동자, 시민, 대학생 단체에서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노동자 결의대회가 열렸다. ⓒ 김시연
"이렇게 많은 기자들과 동지들이 모인 게 150일, 아니 15일째였으면 1500일 아니라 벌써 끝났을 싸움입니다."
'학습지 교사도 노동자'란 '현실'을 일깨운 재능교육 투쟁이 28일로 1500일을 맞았다. 이날 오후 3시 서울시청 앞 재능교육 빌딩 천막 농성장은 모처럼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정당과 노동자, 시민, 대학생 단체에서 모인 200여 명의 동지들이 천막 농성 투쟁 1500일을 맞은 재능교육 해고자들을 격려하고 나선 것이다.
한겨울 날씨 속에 2시간 넘게 격려사가 이어지는 동안 정작 해고자들은 좀처럼 무대에 나서지 않았다. 해고자 12명 가운데 지난 13일 암으로 숨진 이지현씨를 향한 동료 여민의씨의 눈물어린 추모사가 전부였다. 대신 강종숙 전국학습지산업노조 위원장이 이들 목소리를 대변했다.
대교지부 소속인 강 위원장은 "이렇게 모든 부문 운동이 한데 모인 걸 보면 1500일 투쟁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면서도 "1500일 돼서야 사람이 이만큼 모이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결국 사회적 무관심이 오늘날 장기투쟁 사업장을 만들고 있다는 얘기였다.
▲ 재능교육 노조 천막 농성 투쟁 1500일을 알리는 입간판 ⓒ 김시연
쌍용차 희망텐트 노동자 참가단 일원인 조현철씨는 "예전에는 1년만 해도 장기투쟁이라고 했는데 요즘엔 500일, 1000일 해서는 명함도 못 내미는 게 노동자들의 냉혹한 현실"이라면서 "(해고자들이) 매일 저녁 7시에 모여 외롭게 투쟁하고 있는데 평일에도 하루라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그나마 이들에겐 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 진보신당 등 젊은 대학생들의 관심과 지원이 큰 힘이다. 이들은 명동, 신촌 등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갑자기 등장해 춤과 손팻말로 재능교육 투쟁을 알리는 '플래시몹'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안효상 사회당 대표는 "우리는 재능 노조 투쟁에 진 빚을 갚아야 한다"면서 "재능노조는 신자유주의시대 노동자 권리를 부정당해온 특수노동자들 가운데 처음 노조를 설립해 비정규직의 처지를 알렸고 농성장에만 머무르지 않고 움직이는 연대 투쟁은 희망버스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오는 2월 15일 투쟁 1000일째를 맞는 쌍용자동차 노조를 비롯해 1년 넘게 장기투쟁 중인 조합원들도 참여해 연대를 과시했다. 지난해 9월부터 비정규직들의 동등한 임금 인상과 부당 전보 취소를 요구하며 120일째 투쟁 중인 세종호텔 노조도 힘을 보탰다.
▲ 재능교육 노조 투쟁 1500일을 맞아 28일 오후 3시 서울시청 앞 재능교육 빌딩 앞에서 열린 노동자 결의대회에서 대학생들이 재능교육 투쟁을 알리는 플래시몹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 김시연
"특수노동자, 소수 문제로 취급해선 안돼"
재능교육에서 '스스로학습선생님'이라고 부르는 학습지 교사들은 '특수고용노동자'로 분류돼 노조 활동 등 노동기본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은 1999년 노조를 결성한 뒤 사측과 오랜 투쟁을 벌여 임금단체협상을 이어왔지만 지난 2008년 임금 삭감에 맞서 파업을 벌이다 노조 간부 등 12명이 해고됐다. 결국 한때 조합원이 3000명에 이르던 노조는 와해됐고 해고자 12명만이 단체협약 원상 복귀와 복직을 요구하며 1500일째 외로운 투쟁을 이어왔다.
"굴복하거나 포기 못하고 버티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죠. 해고자 11명과 현직에 있는 10여 명이 고작이지만 숫자가 많다고 꼭 투쟁에 성공하는 건 아니잖아요. 소수니까 여기까지 왔지 아마 수천 명이었으면 못했을 거예요."
이지현씨가 숨지면서 이제 11명으로 줄어든 조합원을 이끌고 있는 유명자 학습지노조 재능지부장은 "그동안 조명받지 못한 것보다 이벤트처럼 몰아가는 투쟁 사업장들의 현안 요구에 가려 우리 문제가 소수 노동자 문제로 취급되는 게 안타깝다"면서 "사업장마다 다른 현안 요구에 몰려가기보다 비정규직들이 연대해 총체적으로 투쟁하게 만드는 게 상급단체 몫"이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 재능교육 노조 투쟁 1500일을 맞아 28일 오후 3시 서울시청 앞 재능교육 빌딩 앞에서 열린 노동자 결의대회에서 재능교육 해고자인 여민의씨가 지난 13일 숨진 해고자 동료 이지현씨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 김시연
작지만 큰 연대의 힘... 장기투쟁 사업장 '희망 뚜벅이'로 연대
'OCCUPY 재능교육 희망색연필'로 이름 붙은 1500일 투쟁 행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날 오후 8시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앞으로 이동해 투쟁 문화제를 연 뒤 1박 2일 점거 노숙 행사를 벌인다. 유 지부장은 30일부터 시작하는 '희망 뚜벅이' 행사에도 작지만 큰 기대를 걸었다.
유 지부장은 "1년 이상 악질 자본 탄압에 맞서 투쟁해온 사업장들이 다 모여서 비정규직 문제를 의제화시키려고 시작하는 것"이라면서 "작은 행사여서 큰 관심을 끌기는 힘들겠지만 작은 힘들이 함께 모여보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13일간 장기투쟁 사업장을 찾아다니는 '희망 뚜벅이'에는 코오롱, 대우자판, 콜트-콜텍, 쌍용자동차, KEC, 풍산마이크로텍, 한국3M 등 정리해고 노동자들과 재능교육,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해고자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 세종호텔과 유성기업 등 노조 탄압에 맞선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오는 30일 오전 10시 서울 재능교육 본사를 출발해 과천-안양-인천-안산-수원-둔포을 거쳐 오는 2월 11일 평택 쌍용차 희망텐트 농성장까지 도보 행진을 벌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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