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떠나는 빵집 주인 "왜이리 눈물이..."
[기획-사라지는 동네 빵집①] 30년 만에 문닫는 리치몬드과자 홍대점
재벌가 자녀들의 이른바 '대기업 빵집' 논란이 거세다. 여론에 밀려 일부 대기업은 사업 철수를 선언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대형마트와 대형슈퍼마켓(SSM),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에 시달려온 지역 소상인들의 생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지난 31일 결국 문을 닫은 홍익대 앞 리치몬트 과자점과 최근 프랜차이즈 빵집 등장으로 위기를 맞은 이화여대 후문 '이화당'을 찾아 '동네 빵집' 주인들의 애환을 들어봤다. [편집자말]
▲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리치몬드 홍대점 앞에 붙은 폐점 안내보이다. 리치몬드 과자점은 1월 31일 폐업했다. ⓒ 김혜승
"그동안 고마웠어요. 리치몬드"
리치몬드 과자점은 1986년 창업 이래로 30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며 손님들에게 행복을 준 '전통 빵집'이다. 서울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5번 출구를 나와 사거리 모퉁이를 돌면 보이는 이곳은 264㎡(80평)에 이르는 넓은 매장에 맛있고 다양한 빵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하지만 지난 1월 31일을 마지막으로 리치몬드 과자 홍대점은 30년 흔적을 정리하고 문을 닫았다.
"철의 여인이 이렇게 눈물이 나서 어째."
지난달 31일 마지막 영업 중에 만난 리치몬드 과자점 안주인 김종수 대표는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30년 단골이라는 한 손님은 오자마자 "아쉬워서 어째, 본점 있다고 해도 여기 없어진다니 서운해서"라며 김 대표를 와락 껴안았다.
마지막을 배웅 나온 단골 손님에서부터 폐업 소식을 듣고 처음 방문한 손님까지 매장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손님들은 뭐가 그리도 아쉬운지 빵을 한 아름씩 사고서도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리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은 리치몬드는 왜 이곳을 떠나야만 할까.
김 대표는 "건물주가 2011년 4월 내용 증명서를 보내 공식적 해약 통보를 해왔다"면서 "그것은 임차인인 우리와 어떤 상의도 하지 않은 결정"이라고 말했다. 30일 한 언론의 보도 내용과 달리 리치몬드 홍대점 폐업 이유는 임대료 인상이 아니라 대기업 입점이었다.
그는 "건물주는 우리에게 롯데만큼 임대료를 줄 수 있느냐, 당신은 그 돈 주고 못 산다, 말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사실 이 자리에 누가 들어서는지도 트위터를 통해 알았다"면서 "27일 폐업 현수막을 붙인 뒤 트위터에서 롯데 계열사가 들어온다고 밝혀 주었다"고 말했다.
"더 높은 임대료를 주고서라도 이곳을 지켜내고 싶다"
▲ 31일 리치몬드 과자 홍대점 내부이다. 12시도 되지 않은 오전 시간 사람들로 발 디딜틈이 없었다. ⓒ 김혜승
리치몬드는 5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 김 대표는 "5년 전에도 건물주가 SPC(파리바게뜨)와 계약을 했다며 나가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그때도 이미 계약이 결정된 상태에서 건물주의 일방적인 통보였다. 김 대표는 "우리는 차마 동종업종에 이 자리를 내 줄 수 없었다"면서 "결국 SPC가 제시한 보증금 100%와 월 임대료 115%를 주겠다고 하고 자리를 지켜냈다"고 털어놨다.
이후 리치몬드는 이 약속을 지키려고 권리금을 2억5천만 원에서 5억 원으로, 월 임대료를 2500만 원으로 올렸다. 부담되는 선택이었지만 제과점을 지키려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가능했던 선택이었다. 김씨는 "오랜 영업한 탓에 세금도 계속 오르는 상황이었고 5년 동안 수익 면에서 참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 이후 힘들게 쫓기는 마당에 더 잘해보고자 2010년 10월에 한 달 반이 걸려 리모델링을 했어요. 리모델링 비용만 3억5천만 원 들었는데 6개월이 지난 2011년 4월 건물주가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통보했어요. 리모델링 하고 1년 3개월도 안 돼서 문을 닫게 돼 힘들게 시작한 리모델링도 소용이 없게 되었어요. 이건 건물주에게나 우리에게나 손해예요. 나아가 국가적 손해죠."
인터뷰 중간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김 대표를 찾았다. 이 노인은 리치몬드 홍대점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찾았다는 단골손님이었다. 그는 김 대표 손을 어루만지며 말로 다 못할 위로를 눈빛으로 전했다. 만감이 교차하는지 눈이 빨갛게 충혈된 김 대표도 손수건을 자꾸만 눈에 가져갔다.
김 대표는 "건물주와 5년 동안 동종업계만큼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각서를 썼다"며 "어차피 언젠가는 나가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는 아니다, 사실 지금이라도 더 높은 임대료를 주고서라도 이곳을 지켜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씨 부부 자녀로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권형준 리치몬드 팀장은 "아버지가 지금 내 나이 때 가게를 열었고 나는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 폐업하게 됐다"며 안타까워했다. 권 팀장은 "지금 홍대점에 20명 정도가 근무하고 있지만 낙오자 한 명 없이 모두 안고 갈 생각"이라면서 "우리도 부담이지만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도 부담을 느끼고 서로 미안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리치몬드 과자점 자리에 입점을 준비 중인 엔제리너스 쪽은 "밀어낸 것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의 거리 '홍대', 산업 자본의 텃밭으로
'홍대'를 걷다 보면 같은 프랜차이즈 매장들을 여러 개 발견할 수 있다. 홍대 특유의 맛집이나 카페들로 가득 찼던 거리는 프랜차이즈 업계들이 장악하면서 차별성이 사라져가고 있다. '리치몬드 과자점'이 있던 자리 근방에도 까페베네, 미스터 도넛, 스타벅스, 커피빈, 던킨도너츠 등 커피 관련 프랜차이즈 매장들이 이미 비집고 들어왔다.
엔제리너스만 하더라도 현재 홍대역 부근에만 모두 3개(마포구 동교동 2개, 서교동 1개)가 있다. 이밖에 홍대 부근에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은 S사 4개, T사 3개, T사 1개, C사 3개, C사 3개, C사 4개, I사 2개 등 20개가 넘는다. 한 블록 건너 같은 커피전문점이 있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다. 이것은 비단 커피 전문점만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제빵 업체, 패스트푸드 업체, 레스토랑 등 각종 음식 업계의 프렌차이즈점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한 트위터 사용자(@studioxga)는 "이제 홍대는 더 이상 뜨거운 동네가 아니라 그저그런 대기업 프랜차이즈의 경연장이 되었다"면서 "홍대에서 장사를 해서 자리가 잘 될 때쯤이 되면 대기업이 들어와 밀어낸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트위터 사용자(@mjay_y)도 "홍대가 매력있는 건 스타벅스보다, 커피에 목숨 거는 바리스타가 만들어주는 그들만의 카페가 있기 때문"이라며 "홍대의 매력이 없어질 날이 얼마남지 않았구나"고 우려했다.
홍익대에 다니는 홍다경(22)씨는 "일부러 프랜차이즈 카페를 가지 않는다"면서 "가격대가 비슷하거나 비싸더라도 되도록 개인 소유 카페를 애용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권 팀장도 "일본에는 100년 전통의 음식점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대기업 프랜차이즈점의 공격적인 횡포로 전통을 유지하기가 힘들다"고 안타까워 했다.
"3개월이 되었든, 1년 후가 되었든 다시 이곳에 돌아오고 싶어요. 2~3평의 작은 평수이건, 하루에 만원만 팔리더라도 상관없어요. 사람들에게 홍대에 리치몬드 과자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고 싶어요."
추후 리치몬드가 있던 자리에는 생활용품 판매점인 다이소(1~3층)와 롯데 계열사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 엔제리너스(1~2층)가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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