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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석불에 기도올리고 윤관 장군에게 절하니...

[주말여행] 역사와 문화, 음식을 함께 맛보는 파주 나들이

등록|2012.02.03 17:08 수정|2012.02.03 18:03
동장군이 65년만의 한파를 몰고 왔단다. 아닌 게 아니라, 매서운 한기에 며칠 동안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 겨울바람을 가르고 시나브로 입춘이다. 이번 주말 동장군이 봄의 전령을 맞아 심술을 조금 누그러뜨린다고 하니, 가슴을 열고 입춘의 기운을 살며시 받아들이는 건 어떨까. 새해 소망과 행복을 빌기 위해 지난달 먼저 다녀온 파주 나들이를 소개한다.

[용암사 쌍석불] 부처님이 머리에 갓을 올리고 바위와 한 몸이 되셨네

차를 몰아 용암사로 향하는 길, 멀리서 쌍석불의 웅장한 자태가 주변을 아우르며 눈에 들어온다. 쌍석불을 품고 있는 장지산이 숱한 생명을 땅으로 떨군 때문이다. 헐벗은 겨울이, 숲이 우거진 여름에는 볼 수 없던 멋진 광경을 선뜻 내어 준 것이다. 메마른 겨울이라고 덜하지 않은 자연의 위대함이다.

용암사는 자그마하면서 고즈넉하다. 용암사 경내에 들어선 이후 잠시 대웅전을 바라본 것을 빼곤 나의 시선은 줄곧 쌍석불을 향했다. 쌍석불은 자연 상태의 커다란 바위를 몸통으로 삼고 그 위에 별도의 돌을 다듬어 만든 머리를 올린 모습이다. 머리 위에는 별나게도 둥근 갓과 네모난 갓을 각각 씌웠다.

▲ 파주 용암사 쌍석불. 왼쪽은 둥근 갓, 오른쪽은 네모난 갓을 쓴 불상이다. 높이 17m가 넘는다. ⓒ 최육상


자연과 인공이 거친 듯 절묘하게 결합된 쌍석불은 보는 방향에 따라서 형태가 변한다. 몸통은 앞에서 보면 웅장하지만 옆에서 보면 부드러운 곡선으로 석불의 생생함을 더해준다. 정면에서 볼 때 오른쪽, 네모난 갓을 쓴 석불은 몸통의 위쪽 부분을 다른 돌을 이용해 얹어 합장한 모습을 표현했다. 목 부위의 연결부분은 마치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도 하다.

개인적으로 볼 때, 쌍석불의 신비로움은 뒤쪽에 숨겨져 있다. 기슭을 올라 뒤에서 보면 갓을 쓴 석불의 머리 뒷부분만이 드러난다. 목, 얼굴, 갓으로 이뤄진 머리 부분은 마치 한 쌍의 3층 석탑(또는 5층 석탑)처럼 보인다. 몸통의 커다란 바위를 기단으로 해서 곧바로 탑을 쌓은 모양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사람의 힘을 보태 앞쪽에 석불을, 뒤쪽에 석탑을 동시에 만들어낸 것이다.

▲ 뒷쪽에서 보면, 갓을 쓴 머리 부분이 마치 3층석탑(또는 5층 석탑) 같은 모양이다. ⓒ 최육상


쌍석불은 부처님을 바위에 새긴 '마애불'과 돌을 다듬어 세운 '입상'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용미리 석불입상', '쌍미륵마애석불'로도 불리며 흔히 '용암사 쌍석불'이라고 한다. 보물 제93호로 지정된 정식 명칭은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磨崖二佛立像).'

문화재청 사이트에는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 설화가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지방화 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 된다"고 소개되어 있다.

쌍석불에 얽힌 탄생 설화는 고려 선종(재위 1083~1094)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식이 없던 선종은 고민 끝에 왕자 생산을 바라며 원신궁주를 맞이한다. 어느 날 궁주는 '장지산 남쪽 기슭 바위틈에 사는 두 도승이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는 꿈을 꾼다. 꿈 이야기를 전해들은 선종이 알아보니 장지산에는 정말 두 개의 바위가 있었다. 선종이 바위에 도승을 새기게 한 뒤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렸더니, 그 해에 정말 왕자 한산후(漢山候)을 얻었다는 것이다.

한편, 쌍석불에는 고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어머니가 불공을 드리고 이승만 전 대통령을 낳았다는 비화도 전해진다. 실제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중이던 1954년 쌍석불을 방문, 참배하였다고 한다. 당시 참배 기념으로 만들어진 동자상과 7층 석탑은 이를 뒷받침한다. 처음에 동자상과 7층 석탑은 왼쪽 석불의 오른쪽 어깨 옆과 뒤에 각각 세워졌다. 그러나 문화재 원형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1987년 석불 위에서 내려진 뒤 경내의 이곳저곳을 거쳐 지금의 삼신각 옆으로 옮겨졌다.

천 년 세월 세찬 비바람과 거센 눈보라를 맞으면서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켜온 쌍석불의 자태가 한 순간에 뭉개질 뻔했다. 동자승과 7층 석탑이 무슨 죄가 있다고. 자세히 보면, 대웅보전 앞 석등의 기둥에도 '국태민안을 위하여… 대통령 박정희'라고 새겨져 있다. 이름 새기고 기념하기 좋아하는 위정자들의 모습은 문화재를 대할 때 늘 이런 식인 것 같아 뒷맛이 영 씁쓸하다.

[파주 윤관 장군 묘] 문인석과 무인석을 거느린, 왕릉 못지않은 윤관 장군 묘

▲ 홍살문과 신도비가 세워진 '파주 윤관 장군 묘'. ⓒ 최육상


용암사를 벗어나 북쪽으로 약 2km 정도 달리다보면 도로 옆으로 확 트인 곳에 자리한 '파주 윤관 장군 묘'(사적 323호)가 나타난다. 고려 중기 문하시중 자리에 오른 윤관 장군은 익히 알다시피 북방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9성을 쌓아 국방을 튼튼히 했다.

자료에 의하면 윤관 장군(?~1111)은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문과에 합격했다. 문종은 방금 전 보았던 쌍석불을 세운 선종 바로 이전 임금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쌍석불에 이어 윤관 장군의 묘를 찾아 시간 여행을 얼추 맞춘 셈이다.

윤관 장군이 묻힌 묘역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다. 묘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구분해 주는 홍살문을 비롯해 여러 시설들은 어지간한 조선 왕릉 못지않다. 특히 왕릉이 아니면 쓸 수 없는 문인석과 무인석도 봉분 앞에 위풍당당 자리를 잡고 있다. 묘역을 가득 두르고 있는 수많은 소나무들도 여느 조선 왕릉의 풍경과 다르지 않다.

이곳 윤관 장군이 묻힌 묘역은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문중 간 오랜 시간 다툼이 벌어졌던 곳이다. 두 문중 간 다툼은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1593~1662)이 부친의 묘를 윤관 장군 묘역 바로 위쪽에 모시면서 시작되었다. 심씨 문중이 이후 그 일대 땅을 하사받고 묘역을 조성하자 윤씨 문중이 강력히 반발하며 충돌하였다. 영조대왕조차도 이들을 화해시키지 못했는데, 이는 파평 윤씨 가문이 4명의 왕비를, 청송 심씨 가문이 3명의 왕비를 배출했을 만큼 대단한 권세를 지녔기 때문이다.

결국 지난 2007년 말 경기도와 문화재청 등이 나서 문화재 관련 보존과 관리 방법 등을 검토한 끝에, 심씨 문중의 묘를 윤씨 문중이 내어준 땅으로 100여 미터 이전하며 400여 년 간 이어온 다툼에 종지부를 찍었다.

▲ '파평윤씨 청송심씨 화해기념비'. 윤관 장군 묘역과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 묘역을 놓고 벌어지 두 문중 간 다툼이 400여 년 동안 계속되다 지난 2007년 말 극적으로 해결되었다 ⓒ 최육상


그런 이유로 윤관 장군 묘역 입구 왼편에는 '파평윤씨 청송심씨 화해기념비'가 '2008년 10월 20일'자로 세워져 있다. 다소 생뚱맞지만, 뼈대 있는 가문과 조상을 모시기 위한 후손들의 눈물겨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전 국민은 환영의 박수를 보내고 있다"거나 "130만 양 문중은 서로 존경하고 화합하여 이 영광을 후손들에게 남기게 되었다"는 기념비의 글귀는 과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조상들을 모신 무덤은 대부분 자연과 전통문화 보존이라는 뜻하지 않은 선물을 후손들에게 남겼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조선 왕릉 40기'를 비롯해 신라와 백제의 여러 고분들 그리고 윤관 장군 묘와 심지원 묘 등이 그렇다.

산을 깎아 골프장과 케이블카를 놓는 일이나 마구 강바닥을 파내 자연 환경을 훼손시키는 일 등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고 있는, 문명을 거스르는 야만의 시대. 어쩌면 이들 무덤은 그러한 막무가내 개발에 경종을 울리는 조상들의 아우성을 소리 없이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닐까.

[파주 맛고을 오리촌] 북녘 땅 송악산을 바라보며 맛보는 오리 고기의 담백함

너울거리는 해를 바라보며 차를 '파주 성동리 맛고을'로 밟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맛고을의 유명한 음식점인 '프로방스' 부근에 이르자 예의 그 주차전쟁이 시작된다. 그러나 조금 인내심을 가지고 3~400m 정도 직진해 들어가면 그 때부터는 한가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 오리촌에서 내온 생오리 한 마리는 푸짐했다. ⓒ 최육상


이곳저곳 둘러보다 왼편으로 임진강이 한 눈에 들어오는 오리전문점 '오리촌'을 선택했다. 널찍한 돌로 둥글게 만든 탁자 한가운데 참숯을 피우고 생오리를 올렸다. 붉은 숯 기운을 받은 오리고기는 금세 취~익 하며 맛좋은 흰 연기를 뿜어낸다. 인상 좋은 안주인이 직접 고기를 구우면서 말을 걸어온다.

"오리는 직접 농장에서 키워요. 생고기만 사용하니까 맛이 좋을 거예요. 쌀은 파주에서 농사짓고요. 나중에 돌솥 밥과 누룽지도 나오니까 천천히 많이 드세요."

굵은 소금을 대충 뿌려 구은 고기는 안주인의 안내대로 소금을 살짝 찍거나 강된장을 찍어 먹으니 오리 특유의 담백함이 더해진다. 찬으로 내온 명이 나물, 무쌈, 백김치, 양파무침과 곁들여도 좋다. 어느새 생오리 한 마리(4만5000원, 돌솥 밥은 덤)에 소주 4병이 몸 안으로 사라졌다. 닭에 비해 훨씬 큰 오리 한 마리를 이 가격에 3명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건 고마운 일이다. 나도 모르게 '쌍석불에 올린 기도가 벌써 효력을 발휘했나보다'고 웃었다.

누룽지를 떠낸 숭늉을 마시며 안주인의 손짓을 따라 임진강변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여러 능선 중 맨 오른쪽 병풍처럼 희미한 것이 송악산. 오늘은 흐리지만 날씨가 좋으면 선명하게 보인단다. 고려가 옛 도읍으로 터를 잡았던 송악. '저 얼어붙은 강만 넘으면 북한 땅, 북한이 이렇게 가까운데…', 오리촌 앞 우뚝 선 전봇대에 붙여진 '위험'이라는 글자가 유난히 가슴을 파고든다.

▲ 멀리 붉은 기운이 도는, 임진강 건너편이 북녘 땅이다. 오른쪽 전봇대 뒤쪽 희미하게 보이는 곳이 송악산 자락이다. 왼쪽 전봇대에 새겨진 '위험'이라는글귀가 가슴에 남는다. ⓒ 최육상


쌍석불, 윤관 장군 묘, 오리촌으로 이어지는 파주 여행을 마치니, 북녘 땅에 고이 깃들어 있을 고려와 고구려 역사가 못내 그리워진다. 그곳으로 주말여행을 떠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덧붙이는 글 *지면 관계상 기사에 싣지 못한 관련 사진은 블로그 http://blog.ohmynews.com/run63/ 에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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