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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관, 시진핑·유방과 닮은 꼴이네!

"경상남도에 투자하라" 대 중국 비즈니스 행보

등록|2012.02.10 10:42 수정|2012.02.10 20:42

▲ 김두관 경상남도지사 베이징대학 초청 강연회 ⓒ 최종명


"한 고조 유방처럼 제가 마을 이장 출신입니다."

김두관 경상남도 지사가 베이징대학 한국 대학원생이 주최한 초청강연회에서 한 말이다. 이제는 진부한 '마을 이장'이라는 말이 인상적인 이유는 베이징에서 유방을 거론했기 때문 아닐까? 현 정치권 대권주자이자 '잠룡'다운 언급이었다.

김 지사는 2월 8일 베이징대학 정다(正大)국제센터에서 열린 '한중 수교 20주년 기념 양국 발전방향' 주제 강연에서 "천하의 인재인 전략가 장량(张良), 이재에 밝은 소하(萧何), 맹장 한신(韩信)을 얻어 나라를 세웠다"며 고사를 거론했다. 마을 이장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유방을 인용한 것은 겸손이자 권력에 대한 의지로 읽혔다.

김 지사는 참가 대학원생들에게 "중국전문가로서 큰 포부를 가지고 나라를 위해 꿈을 키워갈 것"을 당부하면서 "한미동맹만큼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수 차례 강조했다. 또한, 박정희 이래 역대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한 소견을 자신만의 해석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 한고조 유방(왼쪽)과 시진핑 국가부주석(오른쪽 위). 베이징대학에서 강연하는 김두관 지사(오른쪽 아래). ⓒ 최종명


이날 강연이 끝날 무렵 설명한 '유방'의 고사는 또 한 명의 정치지도자를 연상시켰다. 바로 시진핑(习近平) 국가부주석. 시 부주석은 자신과 닮은 역사인물 중 한 명으로 유방을 공개적으로 손꼽은 것으로 유명하다. 진시황, 한 무제, 당 태종보다 한 고조처럼 인화단결에 재주가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시 부주석 역시 유방이나 김 지사처럼 지방말단 현 서기를 역임했다. 1953년 생인 그는 장래가 보장된 군인의 길 대신 1982년 허베이성(河北省) 시골 정딩(正定) 현으로 내려가 1983년부터 3년 동안 현 정치와 행정을 총괄하는 서기를 맡았다. 베이징(옛 지명 베이핑)에서 태어났기에 진핑이라 불린 그가 이후 푸젠과 저장, 상하이를 거쳐 다시 베이징에 돌아와 공산당 총서기 및 국가 주석 취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대선 출마?" 질문에 즉답은 피했지만...

▲ 베이징대학 김두관 지사 초청 강연회 ⓒ 최종명


중국에서는 유방을 관덕(官德, 관리의 품성)의 표상처럼 인식한다. 시 부주석도 2004년 잡지 <구시(求是)> 칼럼(중국공산당 중앙이 주관하는 정책지)에서 "위민은 관덕의 핵심('为民'是官德的核心)"이라고 해 중국 공무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기초 행정단위부터 시작해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를 것이니 '위민의 관리'로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김 지사는 시 부주석과 닮았다. 그렇기에 유방을 끄집어낸 것이 아주 흥미로웠다.

김 지사는 약 2시간에 걸쳐 진행된 강연과 질의응답을 통해 한국사회의 주류가 미국 유학파로 구성된 편향이나 한미FTA 문제, 대기업 위주의 경제정책, MB정부의 대북정책 등을 비판했다. 또한, 총선과 대선의 해외 거주민 참정권, 동남권특별자치도 추진, 경상남도 지방정부의 대 중국 교류 등에 대해 설명했다.

학생들도 중국에 대한 관점, 한중 교류 및 남북교류 문제 등에 대한 질문을 이어갔다. 이날 유일한 중국인 참가자로 한반도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는 장바오윈(张宝云)씨는 "한국 언론을 통해 지사님에 대해 아주 좋은 분으로 알고 있다. 대통령이 되실 생각이 없으신지?"라고 질문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 지사는 "경상남도 행정책임자로서 대권에 도전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말로 즉답은 피했지만, 마을 이장 출신인 유방처럼 나라를 위해 일할 준비를 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 인민일보 자매지 <민생주간> 2012년 제1기에 실린 김두관 지사 관련 기사 ⓒ 최종명


한편, 김 지사는 2004년 중국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베이징대학에서 8개월 동안 중국 현대사 인물의 리더십 강의를 들었다고 밝혔다. 당시 중국어 공부를 도와준 중국여학생 스멍린(石梦林)씨와의 인연도 소개했다. 스멍린이 김 지사와 그의 딸의 중국어 선생이 된 사연은 중국 주간지인 <민생주간>을 통해 상세히 보도되기도 했다.

2012년 1월 2일 치 <민생주간>은 '김두관의 중국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김 지사가 이장에서 도지사에 이르는 과정을 소개했다. 또한 김 지사를 '한국의 지중파'로 소개했으며 '허물 없는 친구' 사이인 스멍린의 인터뷰를 담았다.

"베이징대학 기간 김두관은 스멍린에게 자기 딸이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고 장래에 반드시 중국 대학에 입학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스멍린은 그저 농담으로 여겼는데 그게 진심이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이후 스멍린은 아버지에 이어 그의 딸 중국어 공부를 돕게 됐다." (<민생주간> 번역>

경상남도 베이징 투자설명회

김 지사의 이번 방중은 중국기업 앞에서 경상남도 투자유치를 위한 설명회가 목적이었다. 이 설명회는 8년 전 중국어 선생 스멍린이 도와줬다.

▲ 경상남도 제1회 베이징 투자 설명회에서 중국어로 인사말을 하고 있는 김두관 지사 ⓒ 최종명

2월 7일 베이징 리쥔(励骏)호텔에서 열린 제1회 경상남도 베이징 투자 설명회에 전 산시(山西) 성장 류전화(刘振华) 부회장을 비롯 100여 명의 기업 대표자와 실무자들이 참석했다.

국무원 비준기관으로 상무부가 지휘하는 중국국제다국적기업촉진회(촉진회)가 주선한 상담회에서 김 지사는 중국비즈니스 전문가로서의 가능성을 선보였다.

촉진회 회장은 정완퉁(郑万通) 전국정협(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이 맡고 있으며 10여 명의 현직 장관과 해외 노벨상 수상자들이 고문을 맡고 있다.

지방정부 성장 출신과 그룹 총수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는 비정부 조직이기도 하다. 전경련처럼 세계 500강 기업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어 국제경제교류에서 중국에서 영향력이 크다.

이날 설명회는 김 지사의 중국어 인사말을 시작으로 경상남도 홍보물 상영과 투자유치 설명, 질의 응답으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중국 기업인들은 경상남도의 산업단지와 부동산 입지조건, 관광 산업 등에 큰 관심을 보였다. 또한, 경상남도와 촉진회는 상호 업무교류를 위한 협정을 체결했으며 재중국한인회가 주최한 만찬이 이어졌다.

▲ 경상남도 제1회 베이징 투자설명회에서 중국기업인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김두관 지사 ⓒ 최종명


▲ 경상남도 투자설명회에 참가한 중국기업 대표가 질문하고 있다. ⓒ 최종명


2월 8일 오전에는 촉진회 류 부회장의 인솔로 부동산, 백화점 등 최고의 북방 민간기업으로 평가되는 완다(万达)그룹 왕젠린(王健林) 동사장과 비즈니스 미팅을 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다섯 차례나 중화자선상(中华慈善奖)을 수상한 인물인 왕젠린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진솔한 대화가 오갔으며 경상남도의 관광리조트 사업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했다.

▲ 경상남도 제1회 베이징 투자설명회 만찬에서 건배 제의를 하고 있는 김두관 지사. 류전화 전 산시 성장이자 중국국제다국적기업촉진회 부회장이 주빈으로 초청됐다. ⓒ 최종명

김 지사의 투자 유치 일행은 도 투자유치 과장을 비롯 창원시, 진주시, 남해군, 창녕군 해당 공무원 20여 명과 도 상하이 대표로 구성됐으며 김철수 베이징 소장이 현지 실무를 담당했다.

김철수 소장은 "평소 사람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하는 김 지사가 만들어낸 중국비즈니스 기회였다"고 밝혔다.

이번 설명회를 통해 경상남도의 중국 투자유치 및 교류에서 성과를 이뤄낸다면 중국을 이해하는 정치지도자로서 더욱 각광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과의 인연을 중시해 중국비즈니스에 뛰어든 김 지사. 유방이나 시진핑이 '위민'과 '관덕'을 갖춰 국가지도자가 된 것처럼 김 지사가 다가오는 대선에서 어떤 역할을 자임하게 될 지 주목된다.

갈수록 중국과의 교류가 중요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는 최초의 지도자'로 불릴지 기대해봐도 좋을 듯하다.

중국 인민일보 자매지 <민생주간> 2012년 제1기 김두관 지사 관련 기사 전문 번역

2010년 6월, 한국 경상남도 지사 선거의 장막이 걷혔다. 선거 결과는 한국 정계인사들을 아주 놀라게 했는데, 마을 이장부터 시작해 한발한발 올라와 정치 명문가도 아니며 재벌 배경도 없을 뿐 아니라 유명대학 간판도 없는 김두관이 도지사로 당선된 것이다.

이런 결과는 줄곧 한나라당이 당선되던 역사를 바꾼 것이며 한국정당의 정치판도를 바꾼 것이었다. 한국정치권에서 '리틀 노무현'으로 불리는 이 정치스타는 중국에 대한 아주 속 깊은 마음을 담아 중국과 진지한 교류를 하고 있다.

이장에서 도지사까지

54세의 김두관은 스스로를 '촌사람'이라 부르는 것은 40년 넘게 농촌에서만 살았기 때문이다. 마을 이장을 시작으로 군수, 정부 장관과 현재 도 지사에 이르렀다. 그 동안의 기복과 굴곡은 김두관의 불굴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김두관의 고향은 남해군의 한 작은 섬이다. 지난 세기 70~90년대 한국경제는 지속적으로 발전했기에 젊은 이들은 모두 대도시로 향했지만 김두관은 오히려 대부분 사람들과 달리 고향에 남아 농촌 발전을 위해 힘썼다.

1986년 김두관은 남해군 이장으로 농민들과 농사 짓고 함께 생활하며 나날을 보냈다. 이 기간 김두관은 자기 집 땅을 팔아 <남해신문>을 발행했는데, 이는 최초의 지방 신문사이다.

신문은 농민의 입장에 서서 생활모습과 사상을 보도했으며 부패공무원의 탐욕을 폭로하고 막아내는데 심혈을 쏟아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다. 남해신문은 남해군에서 점점 전국으로 퍼져 인구가 5만 명뿐인 도시임에도 발행부수가 30만 부를 넘었다.

1995년 한국 지방선거가 시작됐다. 김두관은 남해군 군수로 당선돼 한국 최연소 군수가 됐다. 군수가 된 김두관은 이장 시기의 친민적인 사업태도를 지속했다. 그는 남해군은 자원이 부족하지만 환경이 아름다워 반드시 여행업을 발전시켜 지방경제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군분투한 결과 남해군은 한국에서 유명한 스포츠센터를 조성했으며 유명 관광지가 됐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많은 나라 선수들이 이 스포츠센터를 자신들의 훈련기지로 활용했다. 1988년 김두관은 남해군수 연임에 성공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 후 김두관은 남해군수에서 직접 행정부 장관으로 임명됐으며 당시 한국 최연소 장관 중 한 명이 됐다.

변화무쌍한 시국으로 인해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는데 7개월 후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한국대학총학생연맹(한총련) 시위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김두관의 사직을 요구했다. 얽히고 설킨 정국이 순조롭지 않게 돌아가고 대통령을 난처하게 하지 않기 위해 김두관은 의연히 사직하고 고향 남해로 돌아가 경상남도 지사 선거 준비로 뛰어들었다.

4차례의 경선 실패를 거친 후인 2010년 6월 김두관은 결국 한나라당의 강력한 상대와 맞서 승리해 경상남도 지사에 당선된다.

경상남도는 18개의 현과 약 330만 명의 인구를 지닌 한국의 아주 중요한 지방이다. 경상남도 50년 역사에서 민주당 출신 지사는 없었기에 김두관의 당선은 한국 정치판도를 바꿨다.

한국의 지중파

2004년 미국 정치권 인사는 수 차례에 걸쳐 당시 사직 상태이던 김두관의 미국 유학을 요청하며 생활비와 학비까지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김두관은 중국유학을 선택한다.

이것은 대담하고 남다른 선택이었다. 현재 한국의 많은 지도자들이 중국에 오기는 하지만 당시 한국 고위지도자가 중국에 오는 것은 드물었고 한국의 행정고위층의 중국에 대한 이해는 아주 적었다.

현재 한국의 국회의원은 모두 299명인데 영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대략 반 정도이지만 중국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중국에 한 달조차 머문 사람이 없다. 한국의 18명이나 되는 현 정부 장관들도 대부분 영국이나 미국 유학파이다.

2004년 8월부터 2005년 1월까지 김두관은 베이징대학에서 중국에 대한 심층연구를 했다. 이 기간 중국에 대한 깊은 이해를 시작한 것이다.

"그의 중국에 대한 각별한 마음이 한눈에 잘 드러나는 것은 중국에 대한 이해가 특별했기 때문이다. 중국에 왔으니 단지 보도기사뿐 아니라 책을 통해 중국의 진면목을 이해하는데 목 말라 했다"라고 베이징대학 기간 그의 중국어 교육을 담당했던 스멍린(石梦林)은 깊은 감명을 받아 이렇게 말했다.

학습 외 시간에 시안에 간 것은 물론 선양 등 대도시를 방문했으며 김두관은 중국의 2~3선의 도시들에 대한 실제 상황을 이해하고자 했으며 때로는 아주 산간지방을 가기도 했다. 스멍린은 김두관을 따라 친황다오에 있는 아주 작은 산촌마을을 가기도 했다. 김두관은 일반 가정 안으로 들어가 그곳 촌민이 살아가는 상황이나 수입 정도, 아이들은 몇인지, 생활 정도는 어떤지 등등 물어보지 않은 것이 없다.

김두관은 한국의 미래가 중국과 아주 깊이 함께 연결돼 있어 중국과의 관계를 잘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돌아간 후 김두관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을 중국 대학에 입학하도록 했다. 지금 딸은 이미 중국인민대학을 졸업해 한국으로 돌아가 중국은행의 한국지점에서 근무하고 있다.

2011년 6월 11일 경상남도 북경사무소를 정식으로 개소했는데 이는 경상남도가 중국에 설립한 3번째 사무소이다.

2012년 김두관은 또한 중국 선양에 4번째 사무소를 설립할 계획이다. 한국의 17개 지방행정기관 중 대부분은 중국에 1개의 사무소만 두고 있지만 경상남도처럼 중국을 중시하는 곳은 거의 없다.

김두관은 중국에 넓은 인맥을 지니고 있으며 깊은 우의를 나누고 있다. 중국공청단 중앙과 상무부 및 많은 지방 성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경상남도 지사로서 1년 좀 넘는 기간에 수 차례 중국을 방문했다.

한국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김두관은 김대중과 노무현 이후 가장 중국을 잘 아는 지중파 정치권 인사이다.

중국 여자아이와의 허물 없는 벗

2004년 아주 우연한 기회에 베이징어언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스멍린은 김두관을 지도하게 됐다.
베이징대학에 재학 중인 김두관에게 매일 1~2시간 정기적으로 중국어 공부를 지도한 스멍린은 중국어 학습뿐 아니라 가끔 영문 번역도 도왔다.

"그의 겉모습은 장대하고 우람했고 아주 엄숙한 편이지만 어떤 낯선 생소함도 없었다"는 것이 스멍린의 김두관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베이징대학 기간 김두관은 스멍린에게 자기 딸이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고 장래에 반드시 중국 대학에 입학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스멍린은 그저 농담으로 여겼는데 그게 진심이 될 줄은 생각지 못했는데 이후 스멍린은 아버지에 이어 그의 딸 중국어 공부를 돕게 됐다.

김두관 및 딸의 언어 선생이 된 스멍린은 김두관과 더욱 깊은 친교를 나누게 됐다. 김두관의 언행도 점점 스멍린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됐다.

김두관도 마음 씀씀이를 아주 중시했다. 대학 졸업 후인 스멍린은 직장을 구하지 않고 한국으로 가서 한국어 연수를 선택했다. 서울에 도착한 스멍린은 김두관의 업무가 바쁜 것을 고려해 연락하지 않았는데 얼마 후 김두관이 이를 알고 즉시 스멍린과 연락한 후 부인을 시켜 스멍린의 숙소에 김치를 보내주기도 했다.

김두관은 스멍린을 집에 손님으로 초대했으며 한국 생활에 불편한 건 없는지 물었다. 스멍린은 한국농산품 가격이 너무 비싸고 사과조차 사기 힘들고 베이징 여자아이들은 늘 과일 먹는 것을 즐긴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뜻밖에도 스멍린이 매번 집을 찾아갈 때마다 김두관의 부인이 큰 접시에 사과를 깎아서 접대했으며 집을 나설 때면 싸주기도 했다.

"진짜 저에게 큰 감동이었는데 사과는 한국에서 정말 비싸기도 하지만 김두관의 집은 그리 부유하지도 않기 때문이에요"라고 스멍린은 말한다.

2006년 설날 한국에서 공부하던 스멍린은 처음으로 집으로 가지 못하고 새해를 보냈다. 스멍린은 김두관과 함께 남해에 있는 고향집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따뜻한 설날을 보냈다.

김두관이 고향집에 가자 온 마을에 큰 일이 벌어졌다. 촌민들이 모두 와 돌아가며 김두관과 함께 식사하자고 청하며 그를 문안하는 것이었다. 김두관은 아주 겸손하게 사람들을 맞았으며 전혀 관료의 냄새를 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처럼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똑같이 실컷 마시고 즐기는 것이었다. 마을의 연로한 할머니를 보자 그는 겸손한 동작으로 부축하더니 휠체어에 태워주기도 했다.

"한국에서 적지 않은 사람을 만났지만 김두관과 같은 사람은 정말 흔치 않다. 외유내강인데다가 마음이 세심해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가 아주 깊다"고 스멍린은 말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13억과의 대화(www.youyue.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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