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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명 기생이 달리기 경주, 입이 쩍 벌어졌지

[자전거, 그땐 그랬지12] 자전거초창기, 페달 굴린 여성들

등록|2012.02.14 15:02 수정|2012.02.14 15:02
해방 전 조선은 자전거의 나라였다. 자전거는 자동차 등 다른 교통수단을 압도했을 뿐만 아니라 통근, 통학, 업무, 레저 등 여러 분야에 두루두루 쓰였다. 그 시대 자전거문화는 어땠을까. 역사는 반복된다는 데 앞으로 다가올 자전거 시대에 비슷한 모습으로 재현되진 않을까. 그 시절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본다. - <기자 말>

1890년대 서양에선 자전거와 여성 의복 논란, 조선에선 갓 도입

▲ 19세기 여성들은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넓고 무거운 빅토리아식 옷을 입고 다녔다. 19세기 후반 몇몇 여성들은 좀더 가볍고 활동하기 좋은 옷을 입기를 원했고, 자전거는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좋은 도구였다. 사진은 외출용 옷을 입는 귀부인과 옷을 입혀주는 하인. ⓒ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1890년대 중반 서양에서는 '여성과 자전거'에 대한 주제가 화제였다. 여성운동가들은 여성들에게 자전거를 타라고 적극 권장했다. 자전거를 타기 위해선 오랫동안 입은 긴 치마 대신 가벼운 바지를 입어야 했으니 기존 의복관습에 대한 큰 변화였다. 당시엔 여성 투표권이 없던 시대였다. (미국은 1920년, 영국은 1928년 여성참정권을 받아들임) 남성이나 기존 관습을 고수하던 이들에겐 불쾌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불만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1893년 몸에 붙는 옷을 입고 근처 공원에 나타난 앤젤린 앨런이라는 여성에 대해 잡지 <아메리칸 애슬릿>은 기사를 내보냈다. 옷차림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일간지 <내셔널 폴리스 가제트>도 비난에 가세했다. 기자는 '그럴듯한 수영복'이라고 조롱했다.

워싱턴 여성구조연맹이라는 단체는 자전거가 불임을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1895년 보스턴산부인과 학회에서 발표한 논문과 같은 글들이 근거가 됐다.

뉴욕 서부 목사 클리브랜드 콕스는 여성 라이더를 '빗자루를 탄 노파'에 비유했다. 관습을 고수하는 이들이 보기에 자전거는 부도덕하고 위험했다. 이들은 힘이 있었다. 조롱이나 기사를 통한 비판으로 안 될 때는 법을 통해 압박했다. 1895년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빅토리아 경찰청은 "블루머(1849년 뉴욕의 블루머 부인이 고안한 여성용 바지)가 여성들 거리 복장은 물론 자전거 복장으로도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서양에서 여성이 자전거를 타고 기존 권력에 도전하던 시기, 조선에선 갓 자전거가 들어왔다. 주로 외국 선교사들과 개화파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을 모두 더해도 자전거 숫자는 몇 대 되지 않았으나 놀랍게 그 가운데 여성운전자가 있었다. 그 기록이 대한제국 시대 외교관이었던 호러스 알렌이 1896년 8월호 <더 코리안 리포지토리>에 기고한 글에 남아 있다.

글에 따르면 서울 거리에 운행 중인 자전거는 총 14대. 그 중 자전거를 타는 여성이 4명이다. 같은 글에서는 남녀 각 3명이 자전거를 타고 동대문으로 가다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기사를 종합하면 자전거를 타는 남녀는 서로가 아는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외국 선교사나 그 일행이었던 듯하다.

한동안 자전거 기사에서 여성은 사라진다. 자전거를 타는 여성은 많았겠지만, 뉴스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1920년대 조선에서 자전거경기가 한창 인기를 끌 무렵 여성이 자전거 계에 나타난다. 깜짝 놀랄 모습으로.

자전거대회에 3국 선수 참가, 조선에선 기생 출전

▲ 자전거경기가 인기를 얻기 시작할 무렵 여성자전거선수가 나타난다. 여성선수가 부족한데다 혹시나 모를 비난을 피해갈 묘수가 있었으니 바로 기생선수였다. 사진은 영화 <방자전>에 나온 춘향. ⓒ 영화 <방자전>



1920년대는 여성 스포츠가 기지개를 켜던 시기였다. 1923년 <동아일보>사는 제1회 전조선여자정구대회를 연다. 이후 정구는 여성들 사이에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자리 잡는다. 그 해 제1회 전조선여자올림픽대회가 열렸고, 1925년 11월엔 미국여자야구선수단이 내한해 조선팀과 경기를 벌였다. 이런 분위기를 바탕으로 1930년 5월엔 조선여자체육장려회가 만들어진다.

신문 또한 '미국여류수영가 영불해협횡단 세계수영계 신기록', '여성, 자전거 타고 세계 일주' 등 스포츠 분야에서 활약하는 외국여성들을 소개하는 기사를 관심 있게 다뤘고, 여성스포츠를 적극 독려했다. 당시 여성체육을 장려하는 목적은 일관됐으니 대략 다음과 같았다.

"우리 장래를 생각하는 자로는 여러 가지 중에도 여자의 건강과 그리하야 그 체력으로부터 일어나는 생활개선과 자녀의 생산이 신조선의 토대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소위 직업 부인 노릇을 아니하고 가정의 주부가 되어서 이전과 같이 남편의 경제력에 기생적 생활로 일생을 망치는 여자에게도..." - <동아일보>(1925년 6월 6일)

당시 주요 매체가 여성의 사회생활을 적극 강조했다는 것은 실제 사회는 그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기사가 쓰인 시점으로부터 10년 뒤인 1935년, 여성의 사회진출이 매우 많아졌다고 소개한 기사(<동아일보> 1936년 1월 18일)에서 여성 직업인구는 7만 5600여 명 수준이다. 당시 인구가 2300만 명 정도 됐으니 대부분 여성은 사회생활과 거리가 멀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들이 자전거를 탄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자전거는 비쌌고 대부분 여성은 경제권이 없었다. 여성이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도 낯선 일이었다. 게다가 긴 치마를 입고는 자전거를 탈 수 없었으니 복장 또한 달라야 했다. 여성이 자전거를 타는 건 여러 가지 걸리는 점이 많았다.

1931년 2월 5일 <동아일보>에 연재된 이영철의 단편소설 '타국녀의 일생'에 자전거를 타는 여성의 옷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여자용 자전거를 타고 제비같이 날쌔게 하얀 종아리를 드러내고 널따란 뜰앞을 돌고 돌 때 몹시 발을 놀리다가는 슬그머니 핸들을 돌리면 사르르 굴러 내려가는지라 바람은 펄럭하고 그의 치마를 들어 가뜩이나 짧은 치마가 무릎까지 내보이거나 새파란 재킷이 양쪽 옆구리로 날리거나 하였다."

남들과는 달랐으니, 여성들이 타는 자전거는 그만큼 눈길을 끌기 좋았다. 그 점을 조선상인들로만 이뤄진 서울윤업회가 주목한다. 전까지 서울에서 열리는 자전거대회를 주도한 단체는 일본인상인들로 이뤄진 경성윤업회였다. 서울윤업회는 처음 치르는 자전거경기에서 색다른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 카드는 바로 여성선수 출전이었다.

주최 측은 여성선수에 초점을 맞췄다. 조선과 일본, 서양 3국 여성선수들이 출전한다고 크게 홍보를 했다. 주최 측이 여성선수에게 바란 건 기록이 아니었다. 바로 흥행이었다. 그래서 빼낸 카드는 바로 기생선수였다. 경성에서 내로라하는 기생 10명이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유명 영화배우가 나타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자전거를 타니 관중은 모두 넋을 잃었다.

"여자가 자전거를 탄다는 말을 듣고 좋아서 사람들이 더 많이 와서 여자들이 '턱' 타고 운동장을 '빙' 도니까 입이 모두 '턱턱' 벌어져 가지고 기뻐하는 것은 참 과연 과연이든 걸."-<동아일보>(1925년 10월 6일)

20일 뒤 인천의 한 매립지에서 열린 전조선자전거경주대회에도 경성기생선수 10여 명이 참가한다. 비슷한 시기에 열린 두 자전거대회에 기생선수가 나란히 참가한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 힘들다.

흥행을 노림과 동시에 여성선수가 없었던 사정도 감안했음 직하다.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여성을 출전시키면 되지만 아무래도 여성들은 사람들 시선에 부담을 느꼈을 듯하다. 여성이지만 도덕이나 관습 문제에서 비껴가는 방법이 바로 기생선수 출전이었다. 

부드럽고 섬세하며 연약한 존재... 자전거 타는 여성을 보는 시선

▲ 우리나라 초창기 여자비행사 박경원(1901-1933)을 다룬 영화 <청연>에 나오는 당시 자전거 타는 장면. ⓒ 영화 <청연>



기생선수 출전이 깜짝 놀랄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1923년 10월 5일~24일 열린 조선부업품공진회에서도 100여 명 기생이 출전해 달리기경주를 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 행사에선 기생 궁술대회도 열린 만큼 기생선수를 섭외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반년 뒤 서울윤업회는 여름에 다시 경기를 연다. 이 때 기생선수가 출전했다는 기사는 없다. 일부러 기생선수라는 표현을 뺏거나 일반여성선수가 출전했다고 봐야 한다.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겠다. 첫 번째 대회에서 기생선수 출전으로 재미를 본 상황이니 굳이 숨길 까닭은 없었다. 또한, 첫 번째 대회 우승자가 이후에도 여러 대회에 꾸준히 참여하며 성적을 올린 것으로 봐선 이때 전문여성자전거선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서울윤업회가 주최한 1회 대회 여류부문 우승자는 이옥화. 그 해 11월 경성자전거선수회가 주최한 경기에도 참가한 이옥화는 1928년 6월 24일 열린 전조선남녀자전거경기에서도 2등을 차지하며 초창기 자전거경기계에서 꽤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친다.

주목할 점은 여성에 대한 인상이었다. 여성은 부드럽고 연약하며 섬세한 존재였다. 여성이 자전거를 타는 건 새로운 일이었으나 여성에 대한 인상은 기존 그대로였다.

"남자선수의 굳센 모양과 여자선수의 섬세한 그림자가 한 번 번득일 때마다…월계관은 이옥화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우승기는 연 줄기 같은 가늘은 그 손에 굳세게 쥐어지게 되었는바..."와 같은 당시 <시대일보>(1926년 6월 22일) 기사에서 그 점을 엿보게 된다.

1926년에 들어서면서 남녀자전거경기대회라는 명칭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나름대로 여성자전거경기가 청중 동원면에서 꽤 매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성선수는 여전히 부족했다. 자전거경기가 끝난 뒤 각 신문은 결과발표를 하면서 여류부문 결과를 종종 빠트렸다. 여성선수가 적게 참가했거나 아예 참가하지 않아서 결과를 발표할 수 없었던 게 아닌가 추측한다.

당시 신문기사를 분석해보면 북조선 쪽에서 여성선수들이 활발하게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북쪽 지방에서 열린 자전거대회의 경우 여류부문 참가자 숫자와 결과까지 꽤 자세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927년 7월 2일~3일 평양에서 열린 자전거대회엔 여성선수 12명이 참가했고, 1928년 6월 24일 평양에서 열린 자전거대회에도 역시 여성선수 10명이 참가했다. 1932년 5월 14일~15일 개성에서 열린 전조선남녀자전거경기대회에도 여성이 많이 참가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전체 경기 결과를 봤을 때 여성자전거선수는 북조선 쪽이 많았고, 사회 분위기 또한 북쪽이 관대하지 않았을까 짐작하게 된다.

사회를 바꾸는 발언을 하지 못한 여성 자전거, 지금 남겨진 과제

▲ 네덜란드에선 왕족들도 자전거를 즐긴다. 엄마가 아이들을 태우고 다니는 모습도 자연스럽다. 이웃나라 덴마크에선 여성 국회의원들이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한다. ⓒ 김대홍



여성선수가 꾸준히 참여했지만 제대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정작 경기가 열렸지만, 여류경기 입상자 명단이 빠진 기사가 절반이 넘는다. 아마 여성선수가 참가하지 않았거나 1~2명 정도 참가했을 것이다. 이때는 순위가 의미가 없어진다. 당시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이벤트로 경기 도중 열렸다는 표현이 종종 나온다. 남녀자전거대회라는 이름까지 내건 걸 보면 처음부터 이벤트경기로 계획했다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고 봐야겠다.

또 하나는 일부러 결과를 누락시켰을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은 떨어진다. 당시 신문에선 여성경기를 적극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여성이 자전거를 타는 것에 대한 비판기사 또한 없었다. 여류부문 순위를 게재했을 경우 그에 관한 설명을 실은 것을 보면 여성 참가가 매우 적었다고 봐야겠다.

여성참가가 적었으니 큰 흐름으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엄복동이나 이윤백, 조성만, 김운학과 같은 대형 스타가 나오지 못했고, 기록 면에서도 눈에 띄는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대신 남해에서 보는 야자수처럼 색다른 역할에 머물렀을 뿐이다. 비록 여성자전거선수가 이벤트경기에 출전해 자전거대회 인기를 끌어올리는데 한몫했지만, 그 이상 역할을 하지 못한 건 아쉬운 점이다.

19세기 유럽에서 여성은 자전거를 앞세우고 의복개혁과 참정권운동을 벌인 역사에 비춰보면 말이다.

어쩌면 그때 못한 일을 지금 우리가 해야 할지 모른다. 여성이 자전거를 앞세우고 내야 할 목소리는 꽤 많다. "아이들과 함께 안전하게 자전거 타고 갈 수 있게 해달라", "자전거를 타고 편안하게 장을 볼 수 있게 해달라", "자전거를 타고 쾌적하게 출퇴근할 수 있게 해달라"
여성이 편안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도시라면 안전하고 여유 있는 도시라 봐야 한다. 그만큼 삶의 질이 높은 도시일 것이다.

자전거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나라들이 그러하다. 네덜란드 여왕은 자전거를 타고 나들이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왕자 부부 또한 아이들을 자전거에 붙어있는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즐긴다. 역시 자전거선진국인 덴마크에선 여성 국회의원들은 주로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한다. 여성 국회의원은 전체 의원의 40% 정도에 이른다.

교통정체와 짜증, '빵빵'거리는 소음과 매연이 난무하는 차도와 여성용 자전거는 어울리지 않는다. 여성들이 자전거 앞에 아이들을 태운 채 시장에 가기 위해 여유 있게 차도를 달리는 상상을 해본다. 뒤에서 자동차가 '빵빵'거리면 어디선가 나타난 아줌마 부대들이 차도를 점령한다. 그들도 모두 자전거 앞에 아이들을 태운 채 시장이나 공원에 가는 중이다. 아마 21세기 관중은 기생선수를 보고 입을 벌린 것보다 더 감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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