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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벌은 은혜를 모르는 나쁜 맏아들"

[인터뷰] 재벌 비판 나선 '친재벌' 경제학자 유진수 교수

등록|2012.02.21 18:44 수정|2012.02.21 18:44

▲ <가난한집 맏아들> 저자 유진수 숙명여대 교수 ⓒ 이동철


"나는 굳이 분류하자면 '친재벌' 쪽에 가까웠던 성향이다. 그렇지만 최근의 사회적 양극화 문제 등을 보면서 지금까지 우리 경제학자들이 너무 효율성 중심의 공리주의적 사고에 젖어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사회 갈등도 커지면서 주류 경제학이 욕을 많이 먹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자신의 학문적 성향을 '친재벌' 쪽으로 분류한 유진수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에게 요즘 진보 매체의 인터뷰 요청이 몰리고 있다. 지난달 나온 저서 <가난한 집 맏아들>(한국경제신문)에서 재벌 기업의 탐욕을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한 인터넷매체는 진보적 경제학자 정승일 교수와 함께 <가난한 집 맏아들> '북콘서트'를 개최하겠다고 나섰을 정도다.

"마이클 샌델 '정의', 한국경제에 적용해 봤더니..."

지난 20일 용산구 갈월동 숙명여대 근처 찻집에서 만난 유진수 교수는 요즘 언론의 관심에 "원래 남 앞에 나서는 성격이 아니라 조금 쑥스럽고 어색하다"며 부담을 드러냈다.

"주류경제학이 너무 싸잡아 매도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지만 이 책을 쓰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한국 경제에 적용해 보고 싶었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을 쓰게 된 것이다."

유 교수가 속된 말로 '탐욕스런 재벌을 까는 책'을 쓴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친재벌 성향인 자신이 봐도 지금 재벌 기업의 행태는 일반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나쁜 맏아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합리적 보수주의자의 시각에서도 한국 사회의 '경제정의'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재벌은 은혜를 모르는 나쁜 맏아들"

2006년 한 중앙일간지에서 한국과 중국 국민들에게 '기업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A나라 국민은 59.4%가 "기업의 이익과 발전에 있다"고 대답했고 "사회와 국가의 발전에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12.4%에 불과했다. 반면 B나라의 국민들은 기업의 목적이 "기업의 이익과 발전에 있다"고 대답한 비율이 16.7%에 불과했고 34.4%가 "사회와 국가의 발전에 있다"고, 27.8%는 "근로자의 복지와 발전에 있다"고 답했다.

A나라와 B나라 가운데 한국은 어디일까?

정답은 B다. 30여 년에 불과한 자본주의 역사를 가진 중국 국민들이 60여 년의 자본주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 국민들의 기업에 대한 인식보다 더 '자본주의적'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가난한 집 맏아들>에서 유 교수는 기업에 대해 '사회와 국가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한국 사람들의 의식의 기원을 '가난한 집 맏아들' 정서에서 찾는다. 어렵고 배고픈 시절 소 팔고 논 팔아서 장남을 공부시키면 출세한 장남이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한국적 성공스토리는 감동적이다.

유 교수는 '가난한 집 맏아들'을 정부의 집중적 선택과 지원을 통해 성장한 삼성, 현대차와 같은 재벌기업에 대비시킨다. "재벌 기업은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장한 만큼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 유 교수 주장이다.

그러나 통속 드라마처럼 모든 불행은 장남이 탐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성공을 뒷바라지한 동생과 가족들에 대한 부양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 발생한다. 이것이 우리 국민 10명 중 7명이 "기업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한 이유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인식에 재벌기업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국민들의 인식을 재벌 측에 유리하게 바꾸려하는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예를 들면 (자신들에 유불리하게 작용하는) 입법 과정에 로비를 한다든지, 자신들이 언론사나 방송사를 갖고 싶어 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유 교수는 최근의 유통재벌들의 공격적 골목상권 진출 행태에 대해서는 부모와 동생들에게 성공의 혜택을 나누지 않으려 하는 '나쁜 맏아들'에 비유했다.

▲ 한국 재벌을 비판한 <가난한 집 맏아들>을 쓴 유진수 숙명여대 교수 ⓒ 이동철

"골목 상권을 위협하는 유통 재벌들은 내가 책에서 밝힌 나쁜 맏아들의 전형적인 사례다. 일부에서는 대기업들이 빵집이건 유통이건 어떤 분야에 진입하건 소비자에게 좋은 물건을 싸게 제공할 수 있어서 좋다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골목마다 SSM(대형슈퍼마켓)이 자리 잡으면 소비자가 좋은 물건을 조금 싸게 살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자영업이 다 망하고 일자리라고는 대형유통업체의 비정규직 밖에 안 남는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최근 정치권에서 대기업 경제력 집중 규제 등 재벌개혁 움직임에 대해서는 "재벌기업 스스로 초래한 자업자득"이라고 꼬집었다.

"자신의 도덕적 의무를 하지 않으면, 나쁜 맏아들인 경우에 부모가 야단칠 수도 있고, 주위의 비난도 받는 게 당연한 거다. 재벌이 사회적 의무를 다하지 않는 현실에서 규제로 가야하는 게 맞다. 다만 그것을 위한 연구가 많이 필요하다. 가령, 재벌 해체 같은 방향은 말은 시원한데 너무 추상적이다."

과도한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에 재계와 보수지식인들이 기업 규제라고 반발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 과도하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며 "효율성이 저해된다는 측면에서 과도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공평성을 추구한다는 관점에서는 과도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재벌 사회 기부 확대와 소득세 인상 필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유한양행의 유일한 박사나 최근 기부재단을 설립하고 재산을 기부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기부는 규모면에서 의미 있고 모범적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유 교수는 책에서 '적산 불하'와 '외화 배정' 특혜 그리고 정책 금리 등 정부로부터 '선택과 집중'의 혜택을 받은 기업이 "사회적 의무에 대해서는 너무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다.

대표적인 예로 선진국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기업의 기부액을 지적했다. 유 교수는 "2009년 매출액 1조 원 이상의 대기업 110개의 2006~2007년 기부금 지출 내역을 분석한 결과, 순수 사회기부금이 이들 기업 당기순이익의 2.6%에 불과했다"며 재벌 총수들의 기부 약속도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이를 무마하기 위한 임시방편이 대부분"이라고 비판했다.

부자 증세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부자들이 자신의 도덕적인 의무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 가진 사람이 부담을 더 많이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소득세 인상 필요성을 강조했다. 유 교수는 책에서 정부에 의해 진행된 도시 개발 혜택으로 부를 늘린 부자들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재벌의 탐욕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에 비해 대안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대해서 유 교수는 "재벌 기업이 도덕적 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이 부족했다"라고 인정하면서도 "을 읽고 공감한 이들이 많아지면 경제정의에 대한 사회적 요구도 그만큼 늘어나고 대기업 규제나 증세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최선은 아니지만 나름의 의미는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소감을 묻는 질문에 유 교수는 <오마이뉴스> 독자들에게 "재벌 개혁에 대한 강한 멘트를 기대하셨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죄송하다"며 솔직한 심경을 밝혔다.

"내 책을 읽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재벌만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부자나 성공한 사람이 사회에 대해, 선진국들은 개도국에 대해, 특혜를 받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이들에 대해서 일반적 의미의 책임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언론에서는 대기업 쪽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센 책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뭐 그렇더라도 잘못된 이야기를 한 건 아니지만…."
덧붙이는 글 이동철 기자는 오마이뉴스 15기 대학생 인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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