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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할수록 멀어지는 그 한 장

생생한 삶의 한 느낌

등록|2012.02.24 15:42 수정|2012.02.24 19:45
생생히 느껴지는 아버지의 마음

스마트폰에 영하 17도라고 나와 있다. 체감온도인지 실 온도인지 잘 모르지만 새벽 5시에 간단한 먹거리를 들고 묵향작업실로 나왔을 때 하늘은 쪽빛이었다. 추사 선생도 이러한 날씨에는 손이 아니라 붓과 얼어버린 벼루의 먹물을 호호 불어 녹이면서 <세한도> 작품을 하셨다고 했으니 그 시대에 비하면 등가에 따스한 난로를 틀어놓고도 손을 호호 부는 정도야 새 발의 피일 것이다.

쪽빛 하늘에는 별이 드문드문 보였는데 그 별 하나는 살아 계실 때 새벽에 지필묵연을 챙겨들고 나가면 호박죽을 끓여 보온병에 넣어주셨던 돌아가신 엄마의 별같이 느껴졌다. 또 다른 별 하나는 아파 누우셨지만 내가 그날 써올 묵향 흔적이 궁금하다고 눈빛으로 바라보던 아버지 같았다.

아버지는 내가 처음 붓 잡는 16세였던 그 해부터 종일 내가 습자한 것을 저녁마다 즐겁게 보셨다. 그리고는 습자한 것과 선생의 체본이 비슷해질 무렵에는 그것들 중에 어느 것이 선생 것인가 알아맞히는 장난을 집에 오시는 손님들에게도 하셨다. 그러한 아버지의 장난은 7형제 중의 막내인 나를 무척 대견하게 여기신다는 표현이시기도 하였다.

어느 날 붓을 몽땅 잃어버렸을때 췌장암 말기로 병환이 무척 깊었던 아버지는 핼쑥한 얼굴로 몸을 추스르고 나가셔서 오랜 거래처에서 포기했던 미수금을 받아 새 지필묵을 사주셨다. 아버지는 내가 작가로 선정된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나는 느낀다.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의 그 따스한 마음의 기운이 내 안에 있음을.

연습은 작품처럼, 작품은 연습처럼...

지은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오래된 빨간 벽돌의 공간에 들어가 난로불을 지피고, 두 손을 호호 불면서 먹을 갈았다. 먹을 갈면 갈수록 심장의 기운이 하나의 원심력을 띠고 단전의 기운이 뭉치는 것을 느낀다. 황토빛 한지 다섯 장을 잘라서 이런 저런 접지법으로 챙겨놓는다. 새벽 6시에서 출근하는 시간인 8시까지의 두 시간 동안 이 다섯 장 중에서 한 장이라도 쓸 만한 것이 나올 수 있을지 모른다. 처음에는 좋은 명문을 골라서 제작하다가 문득 세상과 나는 하나라는 온전한 감사의 느낌이 갑자기 내 가슴안을 벅차게 하였다.

어떤 좋은 작품을 제작해서 그 결과물로 해서 내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렇게 살아서 작품을 제작하고 있는 이 현재에 살아있음 자체가 성공처럼 느껴진다. 비록 보이지 않지만 나를 지켜보아주고 감싸주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마음과 지필묵과 하나되는 그 생생한 느낌에서 명문은 일단 접어두고 그냥 느낌을 우리말로 풀어서 붓을 들었다.

연습할 때는 작품처럼 집중하고, 작품을 할 때는 연습할 때처럼 마음을 비워야 하지만, 알고 있는 대로  머리와 가슴과 손이 합일되는 것은 언제나 쉽지가 않다. 삼십 년도 더 전에 줄 긋기 공부로 붓을 처음 잡을 때도 그랬다. 물을 묻혀서 빨랫돌 위에 해보던 줄과 신문지위에 줄 긋는 것과 화선지 위에 줄 긋는 것이 다른 것처럼.

아직도 마감 날이 열흘 남아서 넉넉한 마음으로 이렇게 저렇게 자유롭게 구상을 풀어본다. 종이 안에 글씨를 가두어도 보고, 종이 밖으로 글씨를 나가게도 해보았다. 크게도 하고 작게도 하고, 일필휘지로도 하고 담묵과 주묵을 활용해서도 해보았다. 한 가지 시도로 한 방향으로만 하면 시간도 종이도 절약되건만은 어찌 된 것인지 나는 작품을 하나 할 때마다 이렇게 저렇게 온갖 방편을 다 시도해본다. 최고를 지향하는 것이 아닌 최선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자위하지만 기실은 내 모자람은 현장일 뿐이다. 

일곱시 퇴근 후에도 셔터를 올리고 난로를 켜고 텅 빈 작업실에서 우연히 생긴 시루떡과 호박즙으로 속을 채우고 세로로, 가로로, 그리고 다시 조각난 모듬종이에도 표현해본다. 버린 종이와 구도를 잡기 위해 붙이는 종이고 넘치고 넘쳐 50평 바닥과 사면의 벽을 가득 채웠다.

먹빛과 운필의 지속감이 자연스럽게 나왔을 때 내 딴에 실하고 멋있다고 생각하고 벽에 걸어보고 멀리 3미터 물러난 거리에서 구도를 보면 탁하기 그지없어 차마 오래 쳐다볼 수가 없다. 그래서 얼른 떼어내어 구석에 제쳐놓는다. 나무는 나무 자신의 모습을 모른다. 나무는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그 나무의 껍질을 알고 작품은 전시장에서 그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가슴에서 피어나는 공감에서 생명을 띤다.

하면 할수록 멀어지는 그 한 장

마감이 여러 날 남았다고 한지도 다양하게 구해서 시도를 해보았다. 고운 말린 꽃잎이 들어가 있는 한지, 영주한지, 점점이 박힌 한지나 포장지로도 쓰이는 고운 색감의 한지. 여러 한지의 세상을 한참 헤매다가 결국은 처음의 그 황토색 한지로 되돌아왔다. 헤매어보았기에 적당하고 알맞춤의 깨달음을 얻어 소중하다.

100여 장의 한지가 모두 떨어져서 퇴근 후에 종이를 구하느라 여러 화방을 돌아 다니다가 빙판길에 살짝 넘어지기도 했다. 다행히 같은 황토색 한지를 구해 다시 묵향뜨락에 와서 붓을 잡았다. 넘어진 손바닥과 허리가 시큰거리다 보니 따스한 집의 아랫목의 유혹도 만만찮다.

하지만 나는 느낀다. 이 밤에 심신이 지쳐서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지 않아 종이를 계속 많이 버리겠지만 이 밤을 견디어 냄으로써 새벽에 나도 모르는 사이, 나도 모르는 어느 종이 그 한 장엔가 별빛이 스며 들어간다는 것을.  

마지막 마감시한을 넘기고 기획초대를 한 주최 측에 연락을 해서 당일특급으로 보내겠다고 하고 하루 시간을 더 벌었다. 일하는 근무시간인 9시간을 빼고 다시금 출근 전의 새벽과 퇴근 후의 밤 시간을 합해 7시간을 더 할 수 있는 시간을 얻은 셈이다. 생각지도 않은 시간을 얻으면 뜬금없이 공돈이 생긴 부자가 된 느낌이다. 하지만 그 부자가 된 느낌이란 바로 욕심의 샘에서 나온 것인지 하면 할수록 글자 하나하나는 익숙하게 되는데 전체가 영 맑지가 않다.

결국에 마지막 선택한 그 한 장은 마감 사흘 전에 제작했던 것이다. 그 한 장 이후 버린 종이가 50장을 넘었으니 어떤 제자는 "아유! 비싼 종이가 아깝네요" 하기도 했지만 그저 나는 빙그레 웃을 뿐이다. 돈을 주고 산 종이가 아까운 것이 대수랴. 취하고자 하면 할수록 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돈을 주고도 하지 못할 마음공부를 실감나게 했는 것을.

생생한 그 사랑현대서예의 멋 초대작품 ⓒ 이영미


아마도 작품뿐이 아닐 것이다. 사람의 인연 또한 그 사람을 움직이고자 하면 그것이 바로 자기도 모르게 집착이 된다. 그 집착 마치 내가 잘하고자 하면 할수록 잘 나오지 않던 그 한장의 묵향작품처럼 잡고자 하면 할수록 더 멀어지게 만든다. 얼굴이 잘 비치던 샘물을 계속 휘저으면 얼굴도 비치지 않고 샘물도 떠 먹을 수 없는 것처럼.

나무와 나무도 적절한 거리에서 그 뿌리가 깊게 내려 울창한 숲의 근원을 이룬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도 아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물질의 세상에서는 그러한 보이지 않는 는 마음의 여백자리가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정말로 상대를 위하는 사람들은 상대를 위한다고 섣불리 말하지 않는다. 정말로 세상을 위하는 사람의 하나는 큰 목소리 내지 않고, 말을 앞세우지도 않고  남 앞에 나서지 않고도 세상을 위해 평생 근검절약하며 살다가 흔쾌히 쾌척하거나 실천행을 하면서 홀홀히 떠난다.

존경하는 분 중의 하나가 오늘 말씀하셨다. 높은 자리에 있을 수록 지식과 현실을 두 다리처럼 잘 조화하여 상생의 숲을 위해야 하는데, 지식도 미약하고 현실에 대한 포용성도 일부 계층에만 국한하여 부실한 두 다리로 지팡이란 권위의 지팡이에 의지하여 그 지팡이를 마구 휘두르니 민생의 삶이 고달파지고 다치는 사람이 많이 생겨 안타깝다고.

평소에 많지 않은 월급을 앞당겨 마이너스카드를 활용하거나 또는 담보를 잡혀 은행빚을 내서라도 어려운 노인시설에 차를 사주거나, 엄동설한에 이사를 해야 하는 곳에 이사비를 보내거나 하면서 항상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말보다 실천을 하시는 청빈하신 분이라 그 말은 유독 가슴에 닿는다.

인사동에서 전시오프닝하는 날. 꼬맹이 때 내게 붓잡는 것을 배웠지만 미술대학원을 나와 나름대로 독특한 안목이 있는 제자가 말했다.

"선생님 작품이 현대에 맞는 3D 같은 느낌이 들어요!"

못 들어서 종종 정확히 표현을 할 줄 모르는 나는 3D가 무엇인지 모르고 읽을 때도 "삼디"라고 말했다가 딸들에게 창피한 표현이라고 무안을 받은 적이 있다. 이제는 그것을 쓰리디라고 이제 말할 줄 안다. 20년의 세대차를 초월해서 새벽별빛 속에서 시린 손을 호호 불었던 그 온기가 제자의 가슴에 전해지는 공감을 이루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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