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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과 싸운 충주산성이 여기 맞아?

[새로 찾아내는 길 이야기, 충주 둘레산길 ③] 금봉산과 충주산성

등록|2012.03.05 10:44 수정|2012.03.05 10:44
성황당의 계절은 거꾸로 가나?

▲ 눈 내린 성황당 ⓒ 이상기


충주 둘레산길 탐사 두 번째 날이다. 날씨는 흐린 편이다. 지난 밤에 눈이 왔지만 도시의 길은 다 녹았다. 우리는 이번 답사의 출발점인 석종사로 간다. 석종사에 차를 세워놓고 다시 성재로 오른다. 해발 300m의 성재에 이르니 어제 온 눈이 그대로 쌓여 있다. 우리는 성황당에 들러 무사산행을 기원한다. 이번 탐사는 계명지맥을 따라 해발 636m의 금봉산(남산)에 오른 다음, 능선을 따라 마즈막재로 내려가게 되어있다.

마즈막재는 충주시 안림동에서 종민동 또는 목벌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해발이 250m쯤 된다. 여기서 다시 가파른 길을 올라 해발 775m 계명산까지 탐사를 계속할 예정이다. 계명산은 이번 탐사의 최고점으로 그곳부터는 내리막길이다. 내려가는 길은 충주의 북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데, 목표지점은 금릉동에 있는 금릉초등학교다. 석종사에서 남산과 계명산을 거쳐 금릉초등학교에 이르는 이번 탐사의 도상거리는 17㎞쯤 된다.

▲ 금봉산성 남문쪽 성벽: 많이 훼손되었다. ⓒ 이상기


성황당에서 남산(금봉산)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임도를 따라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능선을 따라 가는 것이다. 우리는 성황당에서 능선길로 접어든다. 그런데 임도가 나면서 사람들이 편한 임도로 다녀선지, 능선길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무성한 가지를 뚫고 길을 내야 한다. 처음부터 시련이다. 길을 내느라고 우리는 팀을 둘로 나눠 길을 개척한다. 우리 팀쪽의 길이 조금은 수월해 먼저 임도에 도착한다.

임도를 조금 가다 다시 능선길로 올라서야 하는데, 다들 좀 더 편한 임도를 선호한다. 한 1㎞쯤 갔을까? 산행대장이 능선길로 올라서자고 제안한다. 이제 회원들이 다시 가파른 능선길로 들어선다. 능선길의 초입은 가파르기도 하지만, 길이 제대로 안 나 있다. 모두 임도로 다니다 보니 옛길이 희미해진 것이다. 능선을 오르자 조금 편해진다. 우리는 능선을 따라 삼사십 분을 올라 충주산성 남문터에 이른다.

금봉산과 남산의 관계

▲ 남산 정상의 탐사대원들 ⓒ 이상기


남산으로 알려진 금봉산에는 충주산성이 있다. 1980년 1월 충북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면서 충주산성이라는 공식명칭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충주지역 사람들은 충주산성보다는 남산성 또는 금봉산성이라는 이름을 더 선호한다. 그것은 성이 쌓여있는 산의 이름이 남산 또는 금봉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성은 삼한시대 마고선녀가 7일 만에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마고성(麻姑城)이라 불리기도 한다.

여기서 문제는 이 산의 이름이 남산이냐 아니면 금봉산이냐 하는 점이다. 이 산의 이름을 처음 기록한 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충청도 충주목 '산천(山川)'조에 보면 충주의 산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중요한 것이 대림산, 심항산, 월악산, 천룡산, 정토산, 가섭산, 국망산, 장미산, 천등산, 금봉산이다. 이들 모두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이름이다. 대림산은 충주의 진산이고, 심항산은 충주의 주산인 계명산을 말한다.

▲ 충주목지도: 남쪽으로 금봉산이 보인다. ⓒ 이상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금봉산(金鳳山)은 주 동쪽 5리에 있다. 금봉산은 충주시내에서 보면 동남쪽에 위치하지만, 기록에는 동쪽으로 나온다. 그리고 조선 말기까지의 지리지에도 금봉산이라는 기록만 나온다. 그렇지만 이 금봉산이 일부 사람들에 의해 남산으로 불렸던 것 같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때 발행된 <조선 보물고적 조사자료>에 처음으로 남산성이라는 명칭이 나온다. 그 후 남산이 금봉산보다 더 많이 쓰이게 되었다. 이러한 예는 서울의 목멱산이 남산이 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충주에서는 예성문화연구회 등 역사연구단체 중심으로 옛지명 되찾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그 중심에 금봉산이 있다. 남산을 금봉산으로 바꾸고, 남산성, 충주산성도 금봉산성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남산성으로 기록된 지도 벌써 100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바로 잡기 차원에서 그러한 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충주산성, 아니 금봉산성 이야기

▲ 금봉산성 ⓒ 이상기


금봉산성은 금봉산의 정상부에 축조된 둘레 1120m의 석축산성이다. 산성은 주로 내외 협축(夾築)의 방식으로 쌓여졌고, 성벽의 너비는 6.5m, 높이는 5~7m이다. 성벽의 윗부분은 평평한 담장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동서남북에 네 개의 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동문과 북문과 그 주변이 발굴되었는데, 이들 문이 들어 올리는 현문식 구조였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성문의 회전축으로 사용된 확쇠와 철기류, 목기류, 토기류, 기와 등이 수습되었다.

이들 유물 중 6~7세기로 추정되는 굽다리 접시가 출토된 점, 성문구조가 신라시대 방식을 따르고 있는 점 등을 들어 충주가 국원소경으로 불리게 된 600년 전후에 축조된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그리고 동문 주변에서는 석축 저수지가 확인되었다. 이 저수지는 위쪽은 원형, 아래쪽은 사다리꼴 형태이며,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계단식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 구간에서는 또한 성벽을 통과하는 사다리꼴 수구를 볼 수 있다.

▲ 금봉산성(충주산성) 출입을 통제하는 안내판: 그 뒤로 충주호가 보인다. ⓒ 이상기


남문터에 올라보니 동쪽으로의 산성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그래서 동쪽으로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겨울이라 공사가 중단되었지만, 봄이면 다시 공사가 진행될 것 같다. 그런데 최근에 이루어지고 있는 성벽 복원공사에 문제가 많다. 원형복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적은 돈으로 많은 곳을 복원하다 보니 생기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 말하기에는, 복원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역사의식이나 사명감이 너무 부족하다.

대개 과거의 역사를 조사한다는 이름으로 관청에 발굴허가를 신청한다. 허가가 나면 발굴팀이 구성되어 현장을 발굴하고 발굴보고서를 만든다. 발굴보고서에는 여지없이 복원이 필요하다는 문구가 들어간다. 그리고 나서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관청에 사업을 신청한다. 예산이 확보되고 복원허가가 나면 다시 사업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 복원이라는 것이 옛 모습의 재현에 중점을 두지 않고, 현재의 방식으로 편한대로 이루어져 문제다. 그 때문에 복원 현장을 볼 때마다 분통이 터진다. 정말 이 정도 밖에 할 수 없는 것인가.
   

마즈막재에 잘못 세워진 대몽항쟁 전승기념탑

▲ 서문과 북문 사이 성벽 ⓒ 이상기


남문지 근처에서는 충주 3040산악회에서 시산제를 준비하고 있다. 금봉산 탐사는 남문에서 서문 방향으로 성벽을 따라 이루어진다. 남문과 서문 사이 성벽은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서문지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금봉산 정상(836m)에 이른다. 이곳에는 충주시에서 세운 두 개의 정상석이 있는데, 모두 남산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서 기념촬영을 한다.

이제 마즈막재로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길은 서문지에서 성벽을 타고 북문지로 이어진다. 이곳의 성벽도 아주 잘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높이 5~7m에 이르는 성벽을 완벽하게 조망할 수 있다. 성벽 위에는 눈이 하얗게 쌓였다. 그 너머로는 계명산이 보인다. 조심조심 성벽을 따라 북문쪽으로 내려간다. 북문지에 이르니 큰 소나무가 하나 있고 그 북쪽으로 복원한 북문 성벽이 보인다. 역시 엉성하게 복원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 복원된 금봉산성 북벽 ⓒ 이상기


나는 북문에서 동문쪽으로 이어진 금봉산성 북벽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이제 금봉산성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북문에서 우리는 나무계단을 타고 성밖으로 나간다. 여기서부터는 능선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능선길은 임도와 수시로 만난다. 우리는 길을 잘 알기 때문에 계속 능선길을 탄다. 그렇지만 길을 잘 모르는 외지 사람들은 대개 임도를 따라 산에 오르거나 내려간다.
 
50분쯤 산길을 내려가니 마즈막재가 나온다. 마즈막재는 옛날 충주에서 동쪽 살미면과 동량면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으로, 계명산과 금봉산을 나누는 경계다. 마즈막재라는 이름은 마슴(心)과 목(項)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처음 이름은 마슴목재였다. 만나거나 헤어질 때 마음 속의 감정이 목까지 북받쳐 오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마슴목이 마스목이 되었다가 마스막이 되고, 마지막에 마즈막으로 표기된 것이다. 사실 충주 토박이들은 마스막재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한다.

▲ 마즈막재 표지석 ⓒ 이상기


그런데 마즈막재 자락에 잘못된 기념탑이 하나 서 있다. 대몽항쟁 승전기념탑이다. 고려 고종 40년(1253) 충주산성 방호별감 김윤후 장군과 주민이 70일간 항전하며 몽골군의 침략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탑이다.

"충주에서 몽고군이 포위를 풀었다고 보고하였다. 그때 포위를 당한 지 모두 70여 일이나 되어 군량이 거의 다 없어지게 되었다. 방호별감 낭장 김윤후(金允侯)가 군사들을 타일러 격려하기를, '만일 힘을 다해 싸운다면 귀천을 따지지 않고 모두 관작을 제수하겠다' 하고, 관노의 호적을 불태워 믿음을 보이고 또 노획한 말과 소를 나누어 주자, 사람들이 모두 죽기를 맹세하여 싸웠다. 몽고군이 차츰 기세가 꺾이어 다시는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였다."

▲ 대몽항쟁 전승기념탑 ⓒ 이상기


어떤 근거에서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충주산성을 이곳 금봉산성으로 보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금봉산성을 충주산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80년이기 때문이다. <고려사절요>의 충주산성을 1980년에 이름 붙여진 충주산성과 동일시한데서 나온 결정적 오류다. 도대체 산성 전문 역사학자의 수준이 그 정도 밖에 안 되나? 역사이해의 오류고 역사 왜곡이다. 대몽항쟁 전승기념탑, 하루 빨리 제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몽골군을 물리친 충주산성은 대림산성이다.
덧붙이는 글 금봉산과 계명산 지역의 충주 둘레산길 탐사는 2월 26일(일)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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