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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사촌마을보다 선비마을이 더 잘 어울린다

의성여행 (23) 류성룡이 태어난 경북 의성 점곡면 사촌

등록|2012.03.07 13:25 수정|2012.03.07 13:25

▲ 사촌마을 가로숲. 천연기념물이다. ⓒ 정만진


강원도 원주 적악산(赤岳山) 상원사에 탐욕스러운 주지가 살았다. 주지는 큰 종을 만들면서 재료의 반을 가로챘다. 종은 완성되었지만 쳐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주지는 나쁜 짓을 공모한 여자보살과 함께 부처님의 벌을 받아 구렁이가 되었다. 두 사람은 종에서 소리가 세 번 나야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의성의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는 도중에 이 산을 넘고 있었다. 그런데 꿩 한 마리가 구렁이에게 감긴 채 죽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선비는 활을 쏘아 구렁이를 죽이고 꿩의 목숨을 구했다.

날이 어두워져 선비는 여자 혼자 사는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하지만 잠깐 잠에 빠진 듯 했으나 곧 큰 구렁이가 몸을 칭칭 휘감아 왔다. 구렁이는 '새벽이 오기 전에 상원사의 종을 세 번 울리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낮에 선비에게 죽은 구렁이의 아내가 원수를 갚기 위해 사람으로 변신한 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비에게 종을 울릴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이제 죽는 수밖에…… 선비는 체념을 하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때, 이게 웬 기적인가. 상원사의 종이 세 번 "웅웅웅" 소리를 내며 울렸다.

그러자 구렁이는 바로 사라졌다. 선비는 상원사로 내달아 종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종 아래에는 머리가 깨어진 어린 새끼꿩 세 마리가 죽어 있었다. 낮에 선비가 살려준 어미꿩의 새끼들이었다.

선비는 과거에 급제하였고, 좋은 일을 많이 하는 훌륭한 관리로 이름을 날렸다. 적악산은 이후 '꿩'의 한자인 '雉'를 쓰는 치악산(雉岳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사촌마을 입구의 도로 풍경 ⓒ 정만진

치악산의 유명한 전설 '은혜를 갚은 꿩' 이야기이다. 전설 속의 선비는 '의성' 선비로 알려져 있다. 강원도를 지나 한양으로 간 그 많은 영남 지역의 선비들 중에서 특히 의성의 선비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 전설은 당시 사람들이 의성을 '선비 고을'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선비 많은 의성, 赤岳山을 雉岳山으로 바꿨다

'선비 고을'은 한자로 사촌(士村)이다.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에는 지금도 선비들이 살았던 고가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사촌마을은 들어서면서부터 '선비 고을'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난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었던 류성룡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고(1542년), 그가 쓴 국보 132호 <징비록>도 현령 엄정구(嚴鼎耈)가 1642년 무렵 의성에서 간행하였으니, 그만하면 사촌마을을 사람들이 '士村마을'로 떠올리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사촌마을 도로변에는 '여기는 사촌마을입니다'라는 '갈색 바탕 흰 글자'의 안내판이 서 있다. '갈색 바탕 흰 글자'는 역사유적‐문화재‐박물관 등을 안내하는 이정표의 색깔이므로, 이 안내판은 사촌마을이 스스로 '문화재'를 자부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물론 마을 안에 '사촌마을 기념관'까지 건립해 두었으니, 그 자부심은 인정받아도 좋을 터이다.

그런데 안내판에는 한자 이름을 '沙村'으로 적고 있다. 사촌마을이 '선비 고을'을 뜻하는 '士村'이 아닐까 여긴 짐작이 사실과는 맞지 아니한 것이다. 의성군 홈페이지를 보면 점곡면과 사촌마을의 이름은 중국의 인명과 지명에서 따온 곳으로 밝혀져 있다. 그렇다면 '사촌'을 이미지에 맞게 한자로는 '士村'으로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본들 결국 한자어 아니냐' 싶다면, 아예 '선비마을'로!

▲ 사촌마을 이정표. 사촌의 한자 표기를 알 수 있다. ⓒ 정만진


의성은 선비고을이지만 사촌은 士村 아닌 沙村

단촌면 고운사에서 점곡면 소재지인 사촌마을까지는 말 그대로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깝다. 방금 고운사를 떠났나 싶은데 금세 천연기념물 405호인 '사촌리 가로숲'이 좌우로 1km나 이어지는 위세를 뽐내며 싱싱하게 눈앞에 다가선다. 숲 그늘에 들어가 도시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청풍을 가슴 깊이 들이키며 농촌으로 여행온 보람을 만끽한다.

사촌마을 가로숲에 닿기 조금 조금 전 오른쪽에도 울창한 소나무숲이 장관이었다. 모르고 보면 '저기가 천연기념물 가로숲이구나' 여겨질 정도이다. 그래서 이 소나무숲도 <의성 관광> 홍보책자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송내 소나무숲'이라는 붉은 글자로.

이 소나무숲에 '송내 소나무숲'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곳이 송내마을이기 때문이다. 송내마을 앞 길가에는 '김치중 의사 의열각'과 '순국열사 박시목 기념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의열각 앞의 안내판을 대략 알기 쉽게 바꾸어가며 읽어본다.

▲ 김치중 열사 비각 ⓒ 정만진


김치중(金致中)은 벼슬을 하지 않고 공부만 하던 선비였다. 그러나 1592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웠다. 한때 많은 왜군들을 참살하기도 했지만, 결국 군사의 수와 무기에서 상대가 되지 않아 숙부 응주, 아우 치화, 치윤, 종제(從弟) 치홍, 치강 등 일숙오종반(한 명의 작은아버지와 다섯 명의 친척), 그리고 의병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또, 이 일을 당한 부인 신씨가 자결하고, 주인을 잃은 종 서석과 복분이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609년, 나라에서는 이들을 추모하여 정려(旌閭)를 세운다. 정려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려 나라에서 내린 붉은[旌] 문[閭]을 말한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정려가 낡았으므로 1767년, 나라에서는 건물을 수리하고 묘지도 가다듬는다. 다시 1903년에는 후손들이 정려를 새로 세웠지만, 곧 일제가 부숴버린다. 그리고 해방 이후인 1957년, 경상북도와 의성군에서 의열각(義烈閣)을 재건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2007년에 중수(重修)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 순국한 의사를 기려 후손들이 세운 기념물을 일제가 부수었다는 기록이 특히 가슴 아프게 읽힌다. 나라가 망하니 그런 일이 생긴 것이다. 비각 뒤로는 2007년에 의열각이 새로 단장된 때에 함께 세워진 선생의 기적비(紀蹟碑)가 보인다. 

▲ 박시목 의사 기념비 ⓒ 정만진

마을 입구에는 김치중 박시목 의사 기념비

의열각 바로 옆에는 독립운동가 박시목(朴詩穆) 선생을 잊지 말자는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선생은 조선 말기 일본에서 유학을 하던 중 경술국치(1910년에 나라가 망한 일)를 당하자 공부를 그만두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분이다.

1919년 3.1운동 실패 이후 선생은 바로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일하면서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으기도 하고, 중국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선생은 1943년 일제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돌아가셨다. '순국열사 박시목' 기념비는 2008년 12월에 세워진 것으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 시설이다.

이제 사촌마을 안으로 들어가볼 시각이다. 삼거리 너머로 보이는 초등학교 교정의 은행나무 숲이 답사자에게 '어서 오라'고 눈짓을 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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