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집마다 스피커를 달아놓고 산 적이 있었어요

정보화 홍수 시대에서 추억을 더듬다

등록|2012.03.07 15:31 수정|2012.03.07 15:31
조금은 창피한 얘기지만, 내 고장(충남 태안)은 1960년대 중반까지 전기가 없었습니다. 1960년부터 전등을 구경하긴 했지만 그건 자가발전, 즉 발전기를 이용한 전등이었습니다. 지역의 재력 있는 유지들이 힘을 모아 커다란 발전기를 한 대 구입해서 전기를 생산했는데, 당연히 전력 양이 많지 않아 시내권에 속한 동문리와 남문리 중에서도 일부 주택들에서만 전등 불빛을 볼 수 있었지요.

1964년 8월 천주교 태안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인 고대연 야고버(콜롬비아인) 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했습니다. 와서 보니 무엇보다도 전기가 없어서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고 신부님은 태안에 '한국전력'의 전기부터 끌어와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부모가 의사이고 변호사인 고 신부님은 고국에 가서 모금을 하고 또 프랑스 파리에 가서도 모금을 해 태안지역에 한전의 전기를 끌어오는 일에 보태라고 140여 만 원을 관계기관에 쾌척했답니다. 지금이야 140만 원 정도는 작은 돈일 수도 있지만, 1960년대 중반에는 실로 큰 금액이었지요.

태안천주교회 초기 신자들1964년 8월, 파리외방전교회의 고대연 야고버(콜롬비아인) 신부가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된 대전교구 태안성당의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시던 날 찍은 사진이다. 전체 신자 수는 150명 남짓이었다. ⓒ 지요하


아무튼 그 일이 계기가 돼 태안 읍내는 1966년부터 전기 세상이 됐습니다. 전기는 누구보다도 등잔불이나 남폿불 밑에서 공부를 해야 했던 학생들에게 가장 값진 선물이었습니다. 전기 덕분에 나도 저녁 생활이 한결 수월하게 됐습니다. 매일 저녁 등잔과 남포에 석유를 붓는 일은 내 담당이었지요. 가끔은 남포의 유리도 닦아야 했고, 등잔이나 남포의 심지도 갈아줘야 했지요. 

그건 그렇고, 1960년경 태안읍에 자가발전기가 들어와서 읍내 중심부의 일부 주택들은 전등을 켜고 살기 시작했을 때 태안 읍내에 또 하나 등장한 것이 스피커였습니다. 라디오도 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외지에 나가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온 전기 기술자가 유지 한 분을 움직여 유선방송사를 차리고는 집집마다 스피커를 설치해주는 사업을 벌였습니다. 스피커를 통해 라디오 방송을 중계해주는 사업이었지요.

많은 집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하며 스피커를 설치했습니다. 당연히 우리 집에도 스피커가 설치됐습니다. 안방 마루 한 쪽 선반 위 벽에 부착된 스피커에서는 하루 종일, 그리고 밤 12시까지 KBS 라디오 방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스피커에는 스위치가 달랑 하나뿐이었습니다. 스피커를 켜거나 끄거나 할 수만 있을 뿐, 소리의 크기를 키우거나 줄이거나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냥 유선방송사에서 보내주는 대로, 소리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들을 수밖에 없었고, 방송도 서울중앙방송국(KBS) 하나만 들어야 했습니다.

청취료는 한 달에 3천환이었는데, 5.16 후 화폐개혁 다음부터는 월 300원이 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막걸리 한 잔 값과 호떡 한 개 값이 5원인가 10원인가 그랬으니, 300원이면 제법 큰돈이었을 것 같습니다.  

집집마다 청취료를 물고 듣는 스피커 소리이니 본전을 빼기라도 하려는 듯 밤늦게까지 스피커를 켜놓고 사는 집들이 많았습니다. 자연 사람들의 지식이 점점 많아지게 됐습니다. 아나운서들의 이름과 가수들의 이름을 많이 알고 있는 걸 자랑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연속극의 내용을 줄줄이 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전등 없는 강당1960년대 중반 태안천주교회의 옛 강당(지금은 없음)에서 열린 무슨 행사 모습이다. 강당 천장에 전등이 없다. 태안에는 전기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 지요하


나도 스피커 소리에 심취하곤 했습니다. 1959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누님이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기에 가난한 집에서 한꺼번에 둘을 중학교에 보내기는 너무 벅찬 탓에 나는 중학교 진학을 1년 뒤로 미루고 1960년 한 해를 집에서 그냥 놀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무료하지는 않았습니다. 누님이 중학교 도서실에서 빌려다 주는 책을 매일 읽는 재미도 여간이 아니었고, 또 마루 끝에 앉아서 스피커 소리를 듣다 보면 금새 하루가 가곤 했습니다.

나는 임택근, 이광제, 최세훈, 박종세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누구인지 분간할 수 있었고, 성우 구민, 이창환, 주강현, 남성우, 고은정, 김소원, 임옥영 등의 목소리도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연속극 <삼별초>를 매일 들으면서 역사에 관심도 갖게 됐습니다.

유선방송사에서는 라디오 방송 대신 밤에는 계속적으로 노래 레코드를 틀어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나운서의 멘트가 없으니 처음에는 가수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함께 노래 듣기를 좋아하는 아버지 어머니가 알려줘 고복수, 남인수, 현인, 김정구, 이난영, 황금심, 백설희 등을 알게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담가인 장소팔과 고춘자도 알게 됐습니다.

임택근 아나운서와 이광제 아나운서가 담당하는 축구 중계도 열심히 들어서 최정민, 문정식, 정순천, 차경복, 함흥철 선수 등의 이름도 내 뇌리에 명확히 입력이 됐지요.

1961년의 5.16도 스피커를 통해서 아침에 알게 됐습니다. 방에서 가족과 함께 조과(천주교 '아침기도'의 옛 이름)를 하고 나서 방송을 듣던 아버지가 깜짝 놀라며 "군인들이 정권을 빼앗았다"라는 말씀을 하셨고, 장면 국무총리의 안전을 걱정하던 모습이 지금도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무슨 고차원적인 의식이 있어서 장면 박사의 안전을 걱정한 것이었기보다는 장면 박사가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당시 우리 집에서는 <경향신문>을 구독하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경향신문>이 천주교 재단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어려운 살림 가운데서도 <경향신문>을 구독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는 신문을 읽기가 어려웠습니다. 당시에는 신문의 인쇄 형태가 가로 아닌 세로였는데, 한자가 너무 많았습니다. 한자말은 거의 대부분 한자였습니다. 그래서 나로서는 신문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아버지가 알려주기도 하고, 어림짐작으로 때려잡기도 해 한자 공부를 제법 한 게 됐지만, 신문으로는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 수 없어 스피커를 통해 듣는 라디오 방송에 열중하곤 했습니다.

나는 그때 군사정권이 내세운 '혁명 공약'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당시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혁명 공약 6개 항을 외워오라는 숙제를 내기도 했습니다. 나는 달달 외운 혁명공약 6개 항 중에서도 맨 마지막 항에 부쩍 흥미를 느꼈습니다.

1960년대 중반 태안읍 전경충남 태안읍 백화산에서 바라본 1960년대 중반의 태안읍 전경이다. 당시는 읍이 아닌 면이었다. 6.25 한국전쟁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때라 백화산도 헐벗은 모습이다. ⓒ 지요하


마지막 항은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는데, 군인들이 진짜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로 복귀할 것인지가 내게는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이상하리만큼 어린 중학생인 내게도 그것은 가장 명료하게 각인된 관심 거리였지요.

점차 신문도 어느 정도 읽을 수가 있게 됐을 때, 나는 군사정부가 자꾸 말을 바꾼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스피커를 통해 듣는 라디오 방송보다 신문이 더욱 자세하고 세밀하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신문에는 '비판'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그때부터 나는 스피커를 통해 듣는 라디오 방송보다 신문에 더욱 열중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후 나는 군사정부가 끝내 혁명공약의 마지막 항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게 됐고, 그것은 애초부터 '거짓말'이었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거짓말을 매우 싫어하는 습성을 갖고 있었는데, 그런 습성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는 명확치 않습니다. 또 거짓말은 비겁함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어렸을 때부터 해왔는데, 그런 가치관 또한 근원을 확실히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체화된 천주교 신앙이 밑바탕이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만….

내가 소년 시절 스피커를 통해 라디오 방송을 듣던 때로부터 어언 반세기가 흘러서 각종 미디어가 넘쳐나고 수만 가지 정보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오늘에도 '거짓말'의 영역은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거짓말은 오만 가지 형태로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그것을 헤아리다 보니 불현듯 옛날 스피커 생각이 나서 잠시 추억 여행을 한 번 해봤습니다.

아참. 스피커 얘기를 마무리해야겠군요. 1960년대 중반 태안 읍내에 한국전력 전기가 들어오면서 활짝 문명화되는 것과 보조를 맞추듯 라디오 보급률도 높아졌습니다. 라디오를 듣는 집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스피커를 떼어 버리는 집들도 늘어나게 됐습니다. 결국 스피커로 집집마다 라디오 방송을 중계해주고 청취료를 받아가던 유선방송사는 5년 만에 그 사업을 거두고 말았지요.

'삐삐선'을 연결해 스피커를 설치하던 날의 가슴 설레게 하던 풍경, 스피커와 삐삐선을 철거하던 날의 기운 없어 보이던, 그래서 안쓰럽게도 느껴지던 기사들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르는군요.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