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난찌 먹으러 미쓰코씨에 가요

[서평] <우리생활 100년-음식편>을 읽고

등록|2012.03.08 18:07 수정|2012.03.08 18:07
음식을 보면 그 시대가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가 먹는 음식은 그 시절 경제의 척도로 생각해 볼 수도 있고, 문화의 변화 양상을 가늠하게 하는 증거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생활 100년-음식편>. 이 책이 바로 그 같은 관점을 담고 있다.

'우리생활 100년-음식편'. ⓒ 현암사


책의 저자인 한복진은 중요무형문화재 제 38호이자 조선왕조 궁중 음식의 2대 기능 보유자인 고(故) 황혜선 선생의 세 딸들 중 막내로서, 요리연구가인 한복려와 한복선을 언니로 둔 전형적인 요리사 집안의 후손이다. 식품영양학과 교수인 그녀 입장에서 바라본 한국 근대부터 현재까지의 우리식문화 100년사가 이 책에 잘 정리돼 있다.

그 중 가장 흥미있는 것은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의 우리 식문화의 변화에 관한 것이다. 개화기 당시에 각종 외국 음식이 들어오면서 우리의 식습관은 매우 급격히 변화했고, 이후에 일제 강점기에는 백화점으로 대변되는 사회의 변화를 통해 음식문화가 사회적 여러 양상을 더불어 낳았다.

우선, 개화기에는 일본인들이 기업적으로 과수원을 운영해서 서양사과, 배, 포도가 공급되기 시작했다. 기계로 국수를 제면하는 방식도 이때부터 시작되어 편리와 낯섦의 식문화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된다. 당시 문헌에서도 음식은 문화와 풍습을 알아가는 기초였던 바, 1895년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빵과 우유, 버터, 육류, 커피, 주스 같은 서양 음식에 대해 기록했다. 러시아 공사부인은 명성황후에게 양과자를 자주 선물했으며, 더불어서 빵, 스테이크, 수프, 아이스크림 등도 이 땅에 뿌리내리게 됐다. 단무지, 유부, 어묵 같은 일본 식품을 파는 가게가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한편 외국 공관원들에 의해 커피가 전래된 사실도 흥미진진하다. 최근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가비'가 고종의 커피 사랑이란 모티브를 기조로 해서 허구의 이야기를 덧댄 것인바, 실제로 고종이 아관파천 당시에 커피를 접하면서 대단한 커피 애호가가 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독일계 여성 손탁이 1897년 정동에 세운 손탁호텔에서 커피를 대중에게 팔면서 이 땅에 커피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영화 '가비' 포스터. ⓒ 오션필름

귀족들이야 그렇다 치고, 이 무렵 일반인들의 식생활은 어땠을까? 1895년 동경의학 잡지에 실린 '한인 상식조사표'에 의하면 한국 중류 서민층을 7일간 조사한 결과 한국인들은 1일 2식을 기본으로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일반 서민들은 평시에 감자, 풀, 나무열매, 옥수수, 조, 귀리 등의 곡물로 죽을 쑤어먹고, 노동자들은 일을 하느라 근기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그보다 조금 신경을 써서 밥과 국에 김치를 먹었다. 지금처럼 이것저것 차려내 놓은 상이 아니라 단촐한 그것은 당시 서민들의 곤궁한 생활을 말해주는 듯하다.

한편 상류층의 경우는 전통 반상차림에 별식으로 국수·만두·떡·묵 등을 먹었다. 여유가 있던 지라 과자·화채 같은 기호식도 더불어 즐겼으며, 일본·중국·서양의 과자를 파는 가게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이 같은 음식도 이용하게 된다. 게다가 이때부터는 양주·커피·양과자·화과자가 널리 퍼져 일반인도 이것을 접할 수 있었다 하니 음식에서도 서양문화가 급속도로 밀려든 시기라 할 것이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들어섰을 때도 일반 조선인의 식생활은 풍요롭지 못했다. 다만 각 가정마다 식생활에 관한 의례준칙을 잘 지켰기에 향토 음식의 전수와 외국음식 조리법을 가르치는 신식여성교육기관도 생겨났다는 부분에서는 지금 우리가 외쳐대는 한식사랑을 엿보는 것 같아 흐뭇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경성의 4개 백화점에서 비교적 값이 싸면서 위생적인 서양음식을 먹으며 '모던 껄'과 '모던 뽀이'들은 자신이 남다른 문화의 선구자라고 느끼며 으쓱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여기저기 특이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니는 현재 우리의 모습과 겹쳐져서 제법 친근하기도 하다.

그런 한편 일제 강점기 도시의 권력층과 상류층 그리고 유학생들이 일본을 통해 외국문물을 빨리 받아들인 것처럼 지금의 우리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외국 어학연수와 유학으로 세계 여러 음식에 맛을 들인 젊은 층이 현지에서 먹던 그 맛을 그리워하며 그 음식을 찾아다니거나 직접 음식점을 차리는 걸 보면 말이다.

더욱이 미스코시 백화점 경성점이 이 땅의 근대에 미친 문화적 영향력은 사회 구성원의 생활 방식과 의식에서도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나 하는 개인적인 생각도 해본다. 1930년대 소설가 이상의 '날개'에 보면 도시 문물이 밀려오는 경성의 한 복판에서 룸펜으로 무너져가는 주인공이 이 백화점 옥상에서 자아를 깨닫는 장면이 나오고, 채만식의 소설 '태평천하'(1938)에서는 백화점이란 공간이 가져온 신구 세대 간의 의식 차이와 급격히 변하는 사회에 대한 걱정과 개탄을 엿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저어 참, 영감님?"
"왜야?"

"우리 저기 미쓰꼬시 가서, 난찌(런치) 먹구 가요?"
"난찌? 난찌란 건 또 무어다냐."

"난찌라구, 서양 즘심(점심) 말이에요."
"서양 즘심?"

"내애, 퍽 맛이 있어요!"
"아서라! 그놈의 서양밥, 말두 내지 마라!"

"왜요?"
"내가 그년의 것이 좋다구 히여서, 그놈의 디 무어라더냐 허넌 디를 가서, 한번 사먹다가 돈만 내버리구 죽을 뻔히였다!"

"하하하, 어떡허다가?"
"아, 그놈의 것 꼭 소시랑을 여 논 것치름 생긴 것을 주먼서 밥을 먹으라넌구나! 허 참……."

이제는 신세계백화점이 된 이곳에서 우리는 이 소설들의 등장인물처럼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정점을 바라보고 있다. 이런저런 서양 '난찌'가 들어찬 소비 향락의 건물을 기점으로 그것이 가져오는 무언지 모를 흐릿한 희망에 눈을 부라리고 열광도 하면서 그것이 이 시대의 모든 정점인 양 착각도 하고, 때론 손에 닿지 않는 사회의 변화에 좌절도 해가면서 말이다.

한편 대단한 '모던뽀이'였던 소설가 이효석의 산문에서도 1930년대 부유층의 식문화는 여실히 드러났단 것이 떠오른다. 그의 수필집 '낙엽을 태우며'에서는 아침마다 우유를 배달해 마신다는 구절, 집에 딸린 지하 식료품실에다 버터며 여러 가지 서양음식을 저장해 두고 겨울 내 먹을거리를 이리저리 고심 한다거나,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낱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곤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던가, 낙엽이 탈 때 갓 볶아낸 커피냄새가 난다는 일상 이야기를 통해 그 시절 변화된 식생활과 더불어 이것이 끼친 도시민의 생활 방식을 엿볼 수가 있었다.

작가 이효석. ⓒ 네이버

사실 일제시대 하면, 우리민족은 무조건 못 먹고 못 사는 줄 알았던 어린 시절의 내게 이것은 실로 충격이었다. 겨울에 스키를 타러 갈 계획을 세운다거나, 원두커피 한 잔을 즐기기 위해 10리길을 걸어 다방에 가고, 재직하던 학교 교무실 구석에서 베토벤에 심취하며, 밤이면 위스키를 마시며 클래식 기타를 연주한다는 근대 지식인의 문화 향유 방식은 독립과 투쟁으로만 역사를 가르치는 학교 교육에서는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던 내 어린 날의 의문점들이었다.

어떻건 이 책 <우리생활 100년-음식편>과 더불어 역사와 음식이 가진 문헌적 사료를 접하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적 관심을 확장시켜 더 많은 공부가 가능할 것이라 믿는다. 더불어서 음식이란 화두를 기본으로 해서 역사, 풍습, 사회, 정치 등을 함께 엮어보고 싶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