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국적으로 쥐잡기 운동이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집쥐도 들쥐도 참 많았던 때였습니다. 쥐가 워낙 많고, 쥐로 인한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니 정부에서 요즘 말로 '쥐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었지요.
우리 집에도 쥐가 많았습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지붕이 함석으로 바뀌기 훨씬 이전, 60년대 초반의 초가지붕 시절이었으므로 집에는 노래기도 많고 참새들의 보금자리도 있었는데, 단연 쥐가 많았습니다.
밤에는 쥐들이 방 천장 안에서 무시로 운동회를 열었고, 밤중에 잠자는 사람의 이마를 밟고 넘어가는 놈들도 있었습니다. 나도 쥐가 얼굴을 밟고 넘어가는 통에 잠을 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쥐약 때문에 개와 고양이 묶어 놓고 길렀다
정부에서 '쥐잡기 운동', 다시 말해 '쥐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각 집에는 쥐약이 분배되었고, 쥐덫도 여러 개씩 무료로 제공되었습니다. 쥐약과 쥐덫이 대량으로 사용됨에 따라 집집에서는 개와 고양이를 묶어놓고 기르게 되었습니다. 우선 개와 고양이들이 자유를 잃었습니다. 개는 물론이고 고양이도 목이 묶인 채 방 안에서만 뱅뱅 돌며 사는 모습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개와 고양이를 묶어놓고 기르건만 쥐약 섞은 밥을 먹거나 쥐약 먹고 죽은 쥐를 먹거나 해서 미친 듯이 날뛰다가 죽는 개와 고양이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노상 풀어놓고 기른 개를 갑자기 매 놓고 먹이자니 너무 불쌍하다며 아버지가 잠시 운동 좀 하라고 개를 풀어준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모처럼만에 자유를 얻은 개는 그만 쥐약에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뱃속에서 불이 난 개는 가로 뛰고 세로 뛰더니, 미친 듯이 내달리기도 했습니다. 쥐약 먹은 개를 살리려면 녹두 물을 먹여야 한다며 어른들은 황급히 맷돌에 녹두를 갈았고, 집으로 뛰어들어온 개를 간신히 붙잡아 입을 벌리고 녹두 물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개는 죽고 말았습니다. 또다시 집을 뛰쳐나간 개는 논둑길 밭둑 길로 정신없이 내닫더니 물이 얕게 흐르는 작은 개울에 처박혀서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지요. 아버지는 개의 시신을 찾아 밭둑 머리를 파고 땅에 묻어주었습니다. 나는 죽은 개를 보면서 불쌍하고 애처로운 생각에 눈물을 훔치기도 했고….
어린 나이에도 개가 죽은 원인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쥐약이 원인이었고, 쥐약의 원인은 바로 쥐였습니다. 쥐가 너무 많은 탓이었습니다. 쥐에 대한 증오심이 가슴에 꽉 차는 느낌이었습니다.
쥐잡기 운동 일환으로 학생에게 색다른 숙제 내 줘
학교에서는 쥐잡기 운동의 실효를 확인하기 위한 일환으로 학생들에게 색다른 숙제를 내었습니다. 집에서 잡은 쥐의 꼬리를 잘라 학교로 가져오라는 것이었지요. 일일이 쥐꼬리 수를 확인하고 개인별로 실적 기록을 해놓는다는 것이었지요.
학생들은 매일같이 쥐꼬리를 잘라서 학교로 가져갔습니다. 쥐꼬리를 담아 가는 도구로는 주로 성냥갑이 이용되었습니다. 마땅한 도구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는 우리 고장 태안에 전기가 없어서 등잔이나 남포를 사용했기에 어느 집이나 성냥갑이 있었습니다. 성냥갑은 크지 않아서 쥐꼬리를 담으려면 두 번 세 번 똬리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학생 중에는 긴 쥐꼬리를 반으로 잘라서 두 개로 만들어 검사를 받는 녀석들도 있었습니다. 그대로 통과되기도 하고, 들통이 나서 꿀밤을 먹는 녀석도 있었지요.
나는 쥐약을 먹거나 쥐덫에 치여 죽은 쥐를 찾아내기는 해도 꼬리를 자르는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징그러워 몸이 오그라들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은 주로 아버지가 해주었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대개는 아버지나 삼촌이나 형이 쥐꼬리를 잘라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서너 살씩 더 먹은 친구들은 너끈히 그 일을 하는 것 같았고, 작두나 '뻰찌'로 쥐꼬리 자르는 것이 재미있다가 자랑을 하는 녀석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우리 집 모퉁이 깊은 구석의 덫에 걸린 왕쥐를 잡은 적이 있습니다. 찍찍 소리가 나서 들어가 보니 커다란 쥐가 덫에 걸렸는데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덫에 정통으로 걸리면 단박 숨이 끊어지기도 하는데, 워낙 큰 놈인 데다가 정통으로 걸리지 않았는지 숨이 오래갈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순간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상하게 두려운 느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다음 순간 쥐약 먹고 죽은 우리 집 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집 개가 죽은 것은 쥐약 때문이었고, 모든 원인은 쥐에게 있음을 되새기자니 다시금 증오심이 끓어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절굿대를 찾아가지고 들어가서 메주를 찧듯이 내리찍어서 왕쥐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왕쥐를 물고 있는 덫을 들고 나오긴 했는데, 역시 꼬리 자르는 일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토방 한쪽에 그대로 두었더니 저녁때 귀가하신 아버지가 그 일을 해주었습니다.
쥐잡기 운동 초기,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쥐꼬리를 잘라 오라는 숙제를 내주었을 때의 일 한 가지가 떠오릅니다. 그때는 '국사'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거의 매일 한 시간씩 국사 공부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국사 시간이 내게는 가장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내 중학생 시절, 국사 과목 선생님의 모습을 잘 기억합니다. 죄송스럽게도 함자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안(安)씨 성을 가지셨던 분이고, 키가 크고 안경을 쓰신 분이셨지요. 가끔은 허리가 아프신지 열강을 하시다가도 의자에 앉아 허리를 두드리시기도 하는 연로한 분이었는데, 한 번은 교실로 들어오는 교장 선생님을 보고 그 선생님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교장 선생님이 미안한 듯 그냥 앉아 계시라고 하시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도 그 선생님을 어려워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쥐꼬리를 잘라오는 일이 어렵지 않으냐고 물으셨던 것 같습니다. 일부 학생들이 어려움을 토로하며 불평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반대로 그 일이 재미있다며 괜히 과장하여 신바람을 내는 녀석들도 있었지요.
잠시 후 선생님이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쥐 상 도요토미 히데요시 생각하며 숙제하니 한결 수월
"너희들 지난번 역사 시간에 임진왜란에 대해서 공부했지? 임진왜란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풍신수길에 대한 얘기 들었지? 이제부터 집이나 논밭에서 쥐를 잡을 때는, 또 쥐꼬리를 자를 때는 일본 풍신수길을 생각하도록 해."
"풍신수길을, 왜요?"
국사만큼은 누구보다도 선두를 유지하는 내가 확연한 궁금증을 안고 물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선생님은 안경을 한 번 고쳐 쓰고 웃음 머금은 얼굴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풍신수길은 천하에 둘도 없는 쥐 상이었어. 누구라도 그를 한 번 보면 대뜸 쥐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풍신수길의 얼굴은 쥐를 닮았었지.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대표적인 쥐 상이야. 자고로 쥐는 액을 가져오는 동물이고, 쥐 상은 불길한 느낌이 들게 하는 상이야. 하여간 일본 풍신수길이 뚜렷한 쥐 상이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임진왜란을 일으켜 우리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의 수많은 백성까지 크나큰 고통과 불행 속으로 몰아넣은 풍신수길을 때려잡는 기분으로 쥐를 잡고, 쥐꼬리 자르는 일을 하도록 해. 그러면 그 일이 한결 수월해지고 재미도 있을 거야.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지?"
어느 정도 감동도 먹은 아이들은 일제히 큰소리로 대답했고, 서로서로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쥐를 잡는 일에 의협심이 결부되기도 할 상황이었습니다. 확실히 국사 선생님의 그 말은 효과가 컸습니다. 아이들은 풍신수길을 생각하며 쥐를 잡았고, 학교로 가져오는 쥐꼬리 수가 부쩍 늘었습니다. 쥐꼬리로 꽉 찬 성냥갑을 두 개씩 가져오는 아이들도 있었고, 볏짚으로 만든 달걀 꾸러미에 쥐꼬리를 담아오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적어도 우리 학교(태안중학교)에서는 '쥐와의 전쟁'에 대표적 쥐 상인 일본의 풍신수길이 가장 큰 공헌을 한 셈이었습니다. 또 국사 과목 선생님의 그런 '실질 교육'의 성과이기도 할 터였습니다. 어느 모로는 역사 공부의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일깨워주는 것일 수도 있을 듯싶고….
우리 집에도 쥐가 많았습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지붕이 함석으로 바뀌기 훨씬 이전, 60년대 초반의 초가지붕 시절이었으므로 집에는 노래기도 많고 참새들의 보금자리도 있었는데, 단연 쥐가 많았습니다.
쥐약 때문에 개와 고양이 묶어 놓고 길렀다
정부에서 '쥐잡기 운동', 다시 말해 '쥐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각 집에는 쥐약이 분배되었고, 쥐덫도 여러 개씩 무료로 제공되었습니다. 쥐약과 쥐덫이 대량으로 사용됨에 따라 집집에서는 개와 고양이를 묶어놓고 기르게 되었습니다. 우선 개와 고양이들이 자유를 잃었습니다. 개는 물론이고 고양이도 목이 묶인 채 방 안에서만 뱅뱅 돌며 사는 모습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개와 고양이를 묶어놓고 기르건만 쥐약 섞은 밥을 먹거나 쥐약 먹고 죽은 쥐를 먹거나 해서 미친 듯이 날뛰다가 죽는 개와 고양이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노상 풀어놓고 기른 개를 갑자기 매 놓고 먹이자니 너무 불쌍하다며 아버지가 잠시 운동 좀 하라고 개를 풀어준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모처럼만에 자유를 얻은 개는 그만 쥐약에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뱃속에서 불이 난 개는 가로 뛰고 세로 뛰더니, 미친 듯이 내달리기도 했습니다. 쥐약 먹은 개를 살리려면 녹두 물을 먹여야 한다며 어른들은 황급히 맷돌에 녹두를 갈았고, 집으로 뛰어들어온 개를 간신히 붙잡아 입을 벌리고 녹두 물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개는 죽고 말았습니다. 또다시 집을 뛰쳐나간 개는 논둑길 밭둑 길로 정신없이 내닫더니 물이 얕게 흐르는 작은 개울에 처박혀서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지요. 아버지는 개의 시신을 찾아 밭둑 머리를 파고 땅에 묻어주었습니다. 나는 죽은 개를 보면서 불쌍하고 애처로운 생각에 눈물을 훔치기도 했고….
어린 나이에도 개가 죽은 원인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쥐약이 원인이었고, 쥐약의 원인은 바로 쥐였습니다. 쥐가 너무 많은 탓이었습니다. 쥐에 대한 증오심이 가슴에 꽉 차는 느낌이었습니다.
쥐잡기 운동 일환으로 학생에게 색다른 숙제 내 줘
학교에서는 쥐잡기 운동의 실효를 확인하기 위한 일환으로 학생들에게 색다른 숙제를 내었습니다. 집에서 잡은 쥐의 꼬리를 잘라 학교로 가져오라는 것이었지요. 일일이 쥐꼬리 수를 확인하고 개인별로 실적 기록을 해놓는다는 것이었지요.
학생들은 매일같이 쥐꼬리를 잘라서 학교로 가져갔습니다. 쥐꼬리를 담아 가는 도구로는 주로 성냥갑이 이용되었습니다. 마땅한 도구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는 우리 고장 태안에 전기가 없어서 등잔이나 남포를 사용했기에 어느 집이나 성냥갑이 있었습니다. 성냥갑은 크지 않아서 쥐꼬리를 담으려면 두 번 세 번 똬리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학생 중에는 긴 쥐꼬리를 반으로 잘라서 두 개로 만들어 검사를 받는 녀석들도 있었습니다. 그대로 통과되기도 하고, 들통이 나서 꿀밤을 먹는 녀석도 있었지요.
나는 쥐약을 먹거나 쥐덫에 치여 죽은 쥐를 찾아내기는 해도 꼬리를 자르는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징그러워 몸이 오그라들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은 주로 아버지가 해주었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대개는 아버지나 삼촌이나 형이 쥐꼬리를 잘라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서너 살씩 더 먹은 친구들은 너끈히 그 일을 하는 것 같았고, 작두나 '뻰찌'로 쥐꼬리 자르는 것이 재미있다가 자랑을 하는 녀석도 있었습니다.
▲ 1960년대 중반 태안 읍내 한 곳태안읍 동문리의 한 부분 같은데, 아무리 보아도 지금의 어느 곳인지를 알 수가 없다. ⓒ 지요하
한 번은 우리 집 모퉁이 깊은 구석의 덫에 걸린 왕쥐를 잡은 적이 있습니다. 찍찍 소리가 나서 들어가 보니 커다란 쥐가 덫에 걸렸는데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덫에 정통으로 걸리면 단박 숨이 끊어지기도 하는데, 워낙 큰 놈인 데다가 정통으로 걸리지 않았는지 숨이 오래갈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순간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상하게 두려운 느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다음 순간 쥐약 먹고 죽은 우리 집 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집 개가 죽은 것은 쥐약 때문이었고, 모든 원인은 쥐에게 있음을 되새기자니 다시금 증오심이 끓어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절굿대를 찾아가지고 들어가서 메주를 찧듯이 내리찍어서 왕쥐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왕쥐를 물고 있는 덫을 들고 나오긴 했는데, 역시 꼬리 자르는 일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토방 한쪽에 그대로 두었더니 저녁때 귀가하신 아버지가 그 일을 해주었습니다.
쥐잡기 운동 초기,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쥐꼬리를 잘라 오라는 숙제를 내주었을 때의 일 한 가지가 떠오릅니다. 그때는 '국사'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거의 매일 한 시간씩 국사 공부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국사 시간이 내게는 가장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내 중학생 시절, 국사 과목 선생님의 모습을 잘 기억합니다. 죄송스럽게도 함자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안(安)씨 성을 가지셨던 분이고, 키가 크고 안경을 쓰신 분이셨지요. 가끔은 허리가 아프신지 열강을 하시다가도 의자에 앉아 허리를 두드리시기도 하는 연로한 분이었는데, 한 번은 교실로 들어오는 교장 선생님을 보고 그 선생님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교장 선생님이 미안한 듯 그냥 앉아 계시라고 하시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도 그 선생님을 어려워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쥐꼬리를 잘라오는 일이 어렵지 않으냐고 물으셨던 것 같습니다. 일부 학생들이 어려움을 토로하며 불평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반대로 그 일이 재미있다며 괜히 과장하여 신바람을 내는 녀석들도 있었지요.
잠시 후 선생님이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쥐 상 도요토미 히데요시 생각하며 숙제하니 한결 수월
▲ 1960년대 중반 태안읍 동문리의 한 모습읍내에 초가집이 많아 노래기며 참새의 보금자리며 쥐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읍내 길처에서 바라본 태안천주교회와 태안중학교 주변 풍경이다. ⓒ 지요하
"너희들 지난번 역사 시간에 임진왜란에 대해서 공부했지? 임진왜란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풍신수길에 대한 얘기 들었지? 이제부터 집이나 논밭에서 쥐를 잡을 때는, 또 쥐꼬리를 자를 때는 일본 풍신수길을 생각하도록 해."
"풍신수길을, 왜요?"
국사만큼은 누구보다도 선두를 유지하는 내가 확연한 궁금증을 안고 물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선생님은 안경을 한 번 고쳐 쓰고 웃음 머금은 얼굴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풍신수길은 천하에 둘도 없는 쥐 상이었어. 누구라도 그를 한 번 보면 대뜸 쥐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풍신수길의 얼굴은 쥐를 닮았었지.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대표적인 쥐 상이야. 자고로 쥐는 액을 가져오는 동물이고, 쥐 상은 불길한 느낌이 들게 하는 상이야. 하여간 일본 풍신수길이 뚜렷한 쥐 상이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임진왜란을 일으켜 우리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의 수많은 백성까지 크나큰 고통과 불행 속으로 몰아넣은 풍신수길을 때려잡는 기분으로 쥐를 잡고, 쥐꼬리 자르는 일을 하도록 해. 그러면 그 일이 한결 수월해지고 재미도 있을 거야.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지?"
어느 정도 감동도 먹은 아이들은 일제히 큰소리로 대답했고, 서로서로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쥐를 잡는 일에 의협심이 결부되기도 할 상황이었습니다. 확실히 국사 선생님의 그 말은 효과가 컸습니다. 아이들은 풍신수길을 생각하며 쥐를 잡았고, 학교로 가져오는 쥐꼬리 수가 부쩍 늘었습니다. 쥐꼬리로 꽉 찬 성냥갑을 두 개씩 가져오는 아이들도 있었고, 볏짚으로 만든 달걀 꾸러미에 쥐꼬리를 담아오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적어도 우리 학교(태안중학교)에서는 '쥐와의 전쟁'에 대표적 쥐 상인 일본의 풍신수길이 가장 큰 공헌을 한 셈이었습니다. 또 국사 과목 선생님의 그런 '실질 교육'의 성과이기도 할 터였습니다. 어느 모로는 역사 공부의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일깨워주는 것일 수도 있을 듯싶고….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