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숭고미, 베를린 하늘에 꽃피우다
[리뷰] '오정근의 베를린 틈새전' 서초동 더페이지갤러리에서 3월17일까지
▲ 더페이지갤러리 전시장. 중앙에 오정근 작가, 맨 왼쪽 베를린 손갤러리 손미현 관장, 맨 오른쪽 더페이지갤러리 성지은 관장. 배경작품은 2012년 최신작 ⓒ 김형순
독일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재독작가 오정근(1970-)이 서초동에 있는 더페이지 갤러리에서 3월 17일까지 '베를린 인터스페이스(Berline interspaces)'라는 제목으로 아크릴 및 유화작품 40여 점을 선보인다.
오정근 작가를 처음 보는 순간 정말 그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는 장욱진 화백의 마지막 제자로 서울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회화와 판화를 전공했다. 동아미술제 대상을 수상하며 중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주목 받으며 작가가 된 이후, 2005년부터 독일 베를린에서 독특한 작품세계로 유럽화단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도시건물이 건축에서 회화가 되다
▲ 오정근 I '운터덴리덴 가로수대로의 틈새(The interspaces Unter den Linden 92)' 캔버스에 유화 200×160cm 2007 ⓒ 김형순
위 작품은 브란덴부르크 문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오정근 작가는 도시의 입체적 건물을 평면적 회화에 담는 과정에서 건축과 하늘 사이에 발견한 '틈새(Zwischenräume)'라는 새로운 요소를 통해 일반인들이 잘 보지 못하는 미적 동요와 경이로움을 발굴한다.
그는 단순한 선과 형태와 여러 겹 칠한 검은색 캔버스 위에 덧칠한 절제된 붉은색으로 도시건축이 강건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아무도 읽어내지 못한 도심의 색다른 면모를 찾아낸다. 그런 순간에 건축이 회화가 된다.
현대미술의 새로운 중심축 베를린
▲ 아름다운 광장으로 유명한 베를린시 중앙에 있는 '잔다르멘 광장(Gendarmenmarkt)'. 광장중앙에 베를린 심포니오케스트라 콘서트홀이 있고 오른쪽엔 독일대성당이 있고 사진엔 없지만 왼쪽엔 독일대성당과 닮은 프랑스대성당도 있다 ⓒ Wikipedia
오정근 작가는 지금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은 지금 현대미술의 중심축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은 박물관만 170개나 되는 문화 인프라가 형성돼 있다. 옛 동독의 낡은 건물을 작가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임대료도 쾰른 등에 비해 30%나 저렴하고 작가로 등록되면 시와 정부에서 작업비의 50%도 지원받는다.
이런 외적 조건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독일갤러리협회 대표인 포스텔의 말에 의하면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베니스비엔날레 초대작가들 중 40%이상이 베를린출신 작가이거나 베를린을 거점을 두고 활동하는 작가란다. 그러니 향후 현대미술에서 독일이 주도해 나가리라는 예측이 된다. 전 세계 유수한 작가들이 여기로 몰려오는 이유일 것이다.
계속 개발 중인 동베를린이었던 미테(Mitte)거리는 초기에는 갤러리가 30개였으나 지금은 470개까지 늘었단다. 이렇게 역동적 도시 베를린은 오정근 작가의 말에 의하면 녹색당 등 진보정당이 인기가 높을 정도로 사고가 개방적이라 외국작가가 작업하기엔 최적이란다.
베를린 건물이 주는 웅장한 숭고미
▲ 오정근 I '잔다르멘 광장의 틈새(The Interspaces Gendarmenmarkt_234)' 캔버스에 아크릴 250×200cm 2012 ⓒ 김형순
2012년에 그린 이 작품은 위 사진에서 보듯 유럽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잔다르멘 광장'의 독일대성당의 돔을 그린 것이다. 이곳은 베를린의 영혼이 살아있는 곳으로 광장 한가운데 베를린 심포니오케스트라 콘서트홀이 있고 이 극장 양쪽으로 형제자매처럼 프랑스대성당과 독일대성당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오정근 작가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베를린 하늘의 공간분할을 잘 한다. 건물의 그림자와 하늘의 흔적이 교차하는 가운데 빚어지는 웅장한 숭고미를 놓치지 않는다. 그가 보여주는 숭고미는 웅장한 대자연을 경외감으로 몸을 떠는 18세기 독일낭만주의 프리드리히(C. D. Friedrich 1774-1840)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연방국회의사당 유리돔, 용처럼 웅비하다
▲ 오정근 I '라이히스타크[연방의회의사당]의 틈새(The interspaces of the Reichstag_84) 유리돔' 캔버스에 흑백프린트와 아크릴 30×40cm 2007 ⓒ 김형순
▲ '라이히스타크(The interspaces of the Reichstag)의 유리돔'의 해질녘 풍경. 유리돔은 1999년 건축가 노먼 포스터(Norman Poster)가 유리와 철골로 신축한 것으로 여기 전망대에서 베를린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 Wikipedia
라이히슈타크(Reichstag)는 파울 발로트(P. Wallot)에 의해 1884년부터 1894년에 걸쳐 건축된 기념비적인 건물로 과거에는 독일제국의사당이었고 현재는 연방의회의사당로 쓰인다. 이 건물을 백남준의 친구인 대지미술가 크리스토(Christo 1935-)가 1990년 초에 대형헝겊으로 포장하여 유명해졌고 이를 통해 베를린시민들은 커다란 긍지를 가지게 된다.
이 오래된 고전건물 위로 전위적이고 초현대식인 유리돔이 세워져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이 건물은 용처럼 웅비하는 기상을 보이는데 이런 건물이 주는 인상은 20세기 초 러시아의 타틀린(V. Tatlin 1885-1953)이 시도한 '구축주의'의 정신과 통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건물엔 게르만적 이상주의도 짙게 깔려 있다.
베를린의 번화가를 추상으로 단순화
▲ 오정근 I '쿠르퓌르스텐담[일명 쿠담] 거리의 틈새(The interspaces Kurfurstendamm_131)' 캔버스에 유화 120×120cm 2008 ⓒ 김형순
이 작품은 베를린의 쇼핑센터가 몰려있는 번화가 '쿠르퓌르스텐담 거리'를 극도로 단순화시켜 추상화로 그린 것이다. 추상화는 작품 속에서 보이지 않은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관객이 이 번화가에서 나는 자동차소음을 듣고 총총걸음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급변하는 거리를 감지할 수 있다면 일단 성공이리라.
그런 면에서 추상화를 감상하는 데는 관객의 몫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작가가 작품을 구상할 때 어떤 생각에서 출발했으며 작가가 지워버린 형상이 뭔지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기하학적 추상
▲ 오정근 I '쿠르퓌르스텐담 거리의 틈새_144' 캔버스에 흑백프린트와 아크릴 30×22cm 2008 ⓒ 더페이지갤러리
파스칼은 <팡세>에서 명석한 두뇌로 사물을 추리하는 '기하학적 정신'과 맑은 눈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섬세한 정신'이 있는데 이 둘의 조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매력은 역시 긴장감이 팽팽하게 느껴지는 기하학적 선과 면의 만남에 있다.
추상이란 흔히 원근법을 없애고 비대상(non objective)에서 순수조형을 기반으로 하는 것인데 여기에 기하학적 요소가 더해지니 시각적 표현이 풍성해진다.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관객의 위치와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관점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가 대상을 보는 고정된 관념이나 인식이 바뀔 수 있음을 암시한다.
말레비치가 꿈꾼 유토피아 추구
▲ 오정근 I '쿠르퓌르스텐담 거리의 틈새_137' 캔버스에 유화 200×200cm 2008. 이 번화가에 설치된 유명 야외조각이 살짝 보인다 ⓒ 데페이지갤러리
끝으로 쿠담 번화가를 주제로 한 작품은 보자. 이 작품은 그리지 않은 것이 그리는 것이라는 '절대주의'를 창시한 러시아 작가 말레비치(K. Malevich 1879-1935)를 떠오르게 한다. 거기다 가장 정신적이고 금욕적이고 모든 색을 포함한 검정이 바탕색이라 퍽 인상적이다.
말레비치가 주장하는 절대주의에는 유토피아의 정신이 깔려 있다. 유토피아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non place) 역설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건 과거보다는 미래,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 객관적인 것보다는 주관적인 것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와 다름 아니다.
결론으로 오정근 작가는 20세기 초반기의 파리나 20세기 후반기의 뉴욕 같이 활기찬 21세기 초반기에 베를린에서 세계적 작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국인의 특이한 성실과 열정으로 작가적 역량을 최대로 발휘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좋은 작품에 나오는 데는 관객이 중요하다며 그들과 더 많은 소통을 위해서 최근에는 구상에도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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