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 있다... 한복 입은 배달대통령
장재근씨, 11살에 배달 일 시작 교통 사고만 40번
▲ 장재근씨배달대통령답게 복장에는 태극기문양이 가득하다 ⓒ 박영미
그를 처음 만난 건, 우리 회사 사무실에서다.
"안녕하세요~"
우렁찬 인사에 먼저 눈길이 향했다. 다음은 화려한 복장. 전통 한복을 입고 등장한 그는 이마에, 가슴에, 팔뚝에 태극마크를 달고 있었다. 팔에 두른 완장엔 '배달대통령'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다.
사실 그를 처음 만난 건 오늘이 아니다. 4년 전 어느 날 추억의 복장, 교련복을 입은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분이다 생각했는데, 오늘에서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기자의 본능이랄까. 그에 대해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거세게 일었다. 음식점 홍보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를 붙잡았다.
아담한 체구에 선한 인상, 그는 취재를 흔쾌히 응하며 "저 같은 사람도 신문에 나올 수 있냐"며 자신을 낮췄다. 이에 나는 "선생님같이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나와야 한다"며 그를 응원했다. 그리고 지난 2월 그를 다시 만났다.
그가 일하는 군산시 지곡동 소재 중국음식점으로 향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도 그는 문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번보다 상기된 표정의 그. 취재한다는 설렘 때문에 어제 잠 한숨 못 잤단다. 그의 순수한 마음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배달업무가 한가한 오전 시간대 사장님의 배려로 인터뷰가 진행됐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 온 사장님은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 한마디로 대변했다.
이름 장재근(48). 이 동네에서는 '배달대통령'으로 통한다. 군산에 살고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봤을 것이다. 눈에 띄는 화려한 복장 덕분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그에 대답은 단번에 나왔다.
"물론이죠. 배달대통령이라는 칭호답게 저는 배달계의 대통령이라는 사명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극마크도 직접 달았어요. 어떤 분들은 배달직을 우습게 볼지 모르겠지만 저는 긍지를 갖고 일합니다. 인생사는 데 있어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중요한 물건(음식)을 빠르게 배달하는 건데 당연히 중요한 일이죠. 그래서 저는 배달직을 평생직업으로 삼았습니다."
사실 그렇다. 배달직에 종사하는 분들이 있기에 우리가 더 편리하고 수월하게 생산성 있는 일들을 하는 게 아닐까. 재근씨의 이야기를 들으니 배달 직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심어졌다.
15살에 받은 첫 월급 15만 원
재근씨 나이 11살. 배달직을 시작한 나이다. 이 무렵 아버지를 여의고 장남으로서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던 그는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배달 일을 시작했다. 처음 몇 년간은 월급이란 것도 없었다. 15살이 돼서야 받은 첫 월급이 15만 원이었다. 이른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든 그는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 곳이 없다. 서울, 부산, 마산, 보은 등등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일을 했다.
"너무 이른 나이에 돈을 벌다 보니 나쁜 길로 빠질 위험이 많더군요. 그래서 한때 방황도 했던 것 같아요. 그런 저를 그때마다 붙잡아 준 건 아버지의 유언이었어요. 아버지는 제가 나쁜 짓 하면 동생들도 따라 한다며 큰 아들로서 좋은 사람으로 살아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삶이 팍팍하고, 힘들 때마다 아버지의 유언은 저를 바로 잡는 큰 위안이 됐던 것 같아요."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 그는 배달직이 아닌 마라톤 선수를 꿈꾸기도 했다. "너 까지게 무슨 마라톤을 하느냐"며 조롱하는 친구 때문에 시작한 마라톤은, 그가 직접 대한육상연맹을 찾아가면서 현실화됐다. 기초부터 배우며 시작한 마라톤은 19살 때 2시간 46분 58초라는 기록을 세우며 국가대표가 되겠다는 꿈에 서서히 다가갔다. 그러나 불행은 또 엄습해 왔다. 머리를 심하게 다치는 사고가 난 것. 죽을 고비까지 넘긴 그는 눈물을 머금고 마라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배달경력만 37년. 한때는 계속되는 악재로 술로 산적도 있었다. 그러나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살아갈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한 그는 마음을 다잡고 금주를 했다. 배달직에 대한 새로운 사명감을 부여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2000년도)이다. 지금의 복장도 그때부터 진화된 것이다. 처음엔 각설이 복장, 그다음엔 총학생회 회장복장, 교련복장으로 이어졌고 지금의 한복 복장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그는 몰라도, 그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많아 그는 일하는 재미가 배가 된다고 말했다.
"이 일을 하면서 죽을 고비 여럿 넘겼어요. 사고경력만 40회가 넘죠. 배달 일이라는 게 항상 위험에 노출돼 있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조심한다고 해도 저만 잘해서 되는 문제도 아니고. 저를 아는 사람들은 그래요. 이제 배달 일 징글징글하니 다른 일 좀 알아보라고.
그런데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오고, 배운 기술도 없는데 어떻게 다른 일을 찾겠어요. 이제는 제 운명이라 받아들이고 이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평생 할 계획이에요. 그리고 아이들 다 키우고 여유만 된다면 저보다 더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 도우며 죽을 때까지 열심히 살고 싶어요."
오늘도 동해 번쩍, 서해 번쩍 군산 곳곳 맛있는 음식을 배달하고 있는 재근씨. 그 어떤 직업보다 재근씨의 직업이 자랑스러운 건 기자뿐일까.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재근씨는 '멋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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