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0.1℃를 잊고 산다"
시인 배창환·조재도...'중·고등학생이 직접 쓰고 뽑은 학생시 123' <36.4°C> 펴내
▲ 배창환, 조재도 <36.4℃>이 시집은 1980년대 허리춤께부터 지금까지 약 30여 년 동안 교실에서 학생들이 직접 쓴 시를 학생과 선생님들이 함께 읽고 직접 뽑은 시 123편이 실려 있다 ⓒ 작은숲
사탕 하나 물고 다리 떠는 언니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10원 나올 때마다 한 대다."
"지폐밖에 없는데요."
"그럼 1000원 나올 때마다 한 대."
"5000원짜리밖에 없는데요."
퐁당퐁당 말대꾸하다 결국 2000원 뜯기고
돈 없어 집까지 걸어왔다. -118쪽, 중1 이수빈 '삥 뜯긴 날' 모두
아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한순간도 아이들 곁을 떠나지 못하고 아이들 마음에 시라는 씨앗을 오랫동안 뿌리고 있는 시인 배창환과 조재도. 지금도 학교 현장에서 국어와 시를 가르치고 있는 두 시인이 '중·고등학생이 직접 쓰고 뽑은 학생시 123'이란 덧글이 붙은 학생시선집 <36.4°C>(작은숲)를 펴냈다.
이 시집은 1980년대 허리춤께부터 지금까지 약 30여 년 동안 교실에서 학생들이 직접 쓴 시를 학생과 선생님들이 함께 읽고 직접 뽑은 시 123편이 실려 있다. 지금까지 나온 학생시집은 학생들이 직접 쓴 서투른 시를 선생님들이 손질한 뒤 학생들에게 뽑게 한 게 아니라 선생님들이 직접 골라 묶은 시집이 대부분이었다.
'달빛-허성욱', '외갓집 감나무-엄동현', '좌석버스와 친구-손유현', '낡은 일기장-최은영', '내 책상 위의 곰 인형-이소혜', '짝 없는 새와 나-신광호', '외할머니, 섬에 계시다-김상원', '야· 자 라는 구속영장-김대현', '봄 파는 시장-조해진', '베트남 아가씨-김미진', '이것이 시다-한영근', '소똥-이소린', '반딧불이-김다운' 등이 그 시편들.
이 시집을 묶은 시인 배창환과 조재도는 '학생시선집을 펴내며'란 글에서 "청소년기는 한 사람이 일생동안 지니게 될 감성과 지성이 형성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기"라고 못 박는다. 이들 시인은 "입시 경쟁의 중압 때문에 교실에서 시를 읽고 쓰는 활동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청소년을 위한 시 모음집들이 더러 나오고는 있지만 청소년들의 삶을 오롯이 담은 시집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지난 11일 저녁 6시께, 마포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만난 배창환 시인은 "각종 청소년 백일장이나 문예공모 같은 '교실 밖' 문학활동의 장이 있긴 하지만 청소년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관념적 말장난이나 화술만 능란한 시들이 범람해 오히려 시를 사랑하는 많은 청소년들의 시심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시는 삶을 가꾸는 시,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높여주는 시, 자신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시"라며 "자신과 동시대를 호흡하는 친구들의 눈에 비친 세상과 기쁨이나 아픔, 고뇌가 잘 표현되어 있는 시를 만나고, 진실이 살아 숨 쉬는 시를 만날 때 공감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커진다"고 되짚었다.
'야.자'라는 구속영장... 결과는 종아리에 붉은 선
종이 울린다.
동시에 매로 문을 두드리며
고함치는 소리가 들린다.
문은 닫히고
더 이상 자유는 용서받지 못한다.
매 시간 10분 전이 고비다.
그때마다 몇몇 죄수가 탈옥을 시도한다.
그러나 결과는 종아리에 그이는 붉은 선 -141쪽, 고2 김대현 "'야.자'라는 구속영장" 몇 토막
이 학생시선집이 지니고 있는 특징은 시에 담긴 여러 가지 생각을 갈래를 잡아가면서 가슴 깊숙이 품을 수 있도록 주제별로 묶었다는 점이다. 제1부 '36.4℃'(우리들 마음)은 글쓴이들이 지닌 깨끗하고 순박한 시심(詩心)을 그린 시 17편이 실려 있다. 제2부 '남과 같이 따라한다!? NO!'(나의 발견)에는 시 17편이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담고 있다.
제3부 '엄마 지갑'(우리 집, 가족, 생활)은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담은 시 20편이, 제4부 '시간이 멈춰버린 학교'(우리들의 학교생활)에는 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학생들 생활에서 얻은 생각과 느낌을 담은 시 20편이, 제5부 '새벽시장'(우리 마을, 일하는 사람들)에는 크고 작은 마을 공동체(도시와 농어촌)에서 자신과 이웃을 발견하는 시 19편이 노오란 양지꽃처럼 예쁘게 피어 있다.
제6부 '풍년 기근'(세상 속으로)에는 다문화 가족과 분단, 역사와 현실의식을 담은 시 13편이 우리 사회를 어른스럽게 어루만지고 있다. 제7부 '소똥'(자연, 생태)에는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생태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쓴 시 18편이 대자연을 책가방에 든 책과 공책처럼 소중하게 보듬고 있다.
이 학생시를 모은 시인 배창환(경주여고 국어교사)과 조재도(천안동중 국어교사)는 어떤 선생님일까. 배창환은 30여 년 동안 학교에서 중고등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쳤고, 조재도 또한 오랜 시간 학생들에게 시 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이들 두 시인은 스스로도 시 창작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중견 시인이다.
이 시선집에는 중 1학년부터 고 3학년에 이르기까지 대도시와 중소도시, 농어촌에서 공부하는 남녀 학생 109명이 쓴 시가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이 책에 참여한 학교는 15개교가 넘으며, 함께 참여한 선생님도 15명이 넘는다. 학생시를 뽑는 일에 소매를 걷어붙인 학생 수도 400명을 훌쩍 넘기고 있어 잘 간추린 학생시선집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0.1℃를 잊고 산다
우리는 36.4℃
옆집 아주머니도, 앞집 순희도
우리는 모두 36.4℃
버스 안의 수많은 사람들
아파트 단지의 수많은 사람들도
남들이 0.1℃를 잊어버린 것에
자신 또한 잊어버렸다는 것에
무관심하다.
어느 순간 0.1이라는 작은 숫자에
소름 끼치는, 차가운
한 덩어리의 얼음이 된다.
꽁꽁 언 얼음 덩어리는
아무리 뜨거워도 녹지 않는다.
얼음 역시 36.4℃
우리는 0.1℃를 잊고 산다. -43~44쪽, 고2 전은영 '36.4℃' 모두
이 책 제목은 36.4℃다. 왜 그럴까. 우리에게 약간 부족한, 우리가 잊고 있는 아주 작은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그 아쉬움 속에 반성과 매질까지 들어 있다. 학생들이 우리 사회를 바라보며 느끼는 체온은 0.1℃가 부족한 36.4℃라는 그 말이다. 우리 체온이 36.4℃가 아니라 33℃라면 우리 사회는 더 아름다워졌거나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린 학생시인인 고교 2학년 전은영이 이 시 마지막에 "우리는 0.1℃를 잊고 산다"고 쓴 것도 그 때문이다. 전은영이 쓴 이 시는 우리 어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0.1℃라는 아주 작은 차이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수많은 것들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그저 그럭저럭 대충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소똥은 냄새난다.
소똥은 못생겼다.
소똥은 더럽다.
하지만 아무리
냄새 나고, 못 생기고, 더러워도
식물에게 꼭 필요한 것
그리고 그 식물이 필요한 사람에겐
소똥은 꼭 있어야 한다. -236쪽, 중1 이소린 '소똥' 모두
영국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1770년 4월 7일~1850년 4월 23일)가 쓴 '무지개'란 시에 보면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싯귀가 있다. 중학교 1학년 학생시인 이소린이 쓴 이 시를 읽으면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그대로 다가온다. 학생시인은 아주 하찮게 보이는,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 같은 냄새나는 소똥을 통해 대자연이 지닌 '순환의 이치'를 찾아낸다.
놀랍다. 이런 시는 도회지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나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작은 지혜가 아니다. 시골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아이가 아니라면 결코 깨칠 수 없는 진리다. 청소년들은 이처럼 식의주에 얽매여 숨 가쁘게 살아가는 어른들이 미처 느낄 수 없는 것들을 찾아내는 눈이 있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 세상 살피는 뭉개구름 닮은 시
"누나는 맨날 엄마에게 / 옷을 사 달라고 조른다. / 엄마는 대꾸도 안 하고 / 그냥 방으로 들어간다. / 누나는 화를 내며 / 자기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간다. / 살짝 열린 방문 틈으로 / 엄마를 보았다. / 엄마는 지갑을 꺼내 보며 / 돈이 얼마나 남았나, / 한숨을 쉰다." -78쪽, '엄마 지갑' 모두
경주여고 2학년 장지영은 표4에 실은 글에서 "이 시집 속의 시에는 나 자신, 부모님, 학교, 우리 동네 등 우리가 만나는 세상이 담겨 있다"며 "교과서에 수록된 시들만 보다가 친구들의 시를 읽으니 해석 없이도 저절로 이해되고 공감이 되어, 시를 읽는 동안 내내 행복하고 즐거웠다"라고 적었다.
천안동중 2학년 이기연은 "주제나 소재 면에서 우리의 일상을 다루고 있어서 공감 가는 작품이 많았다. 특히 부모님과 갈등이 잦았던 나에게 부모님과 관련된 시들이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다"라며 "지금 생각하면 사소한 일로 자주 툴툴거렸는데, 여기 실린 시를 읽고 난 후 부모님께 너무 죄송했고, 부모님의 존재를 새롭게 깨달을 수 있었다"고 썼다.
시인 배창환, 조재도가 엮은 '중, 고등학생이 직접 쓰고 뽑은 학생시 123' <36.4℃>는 연푸른 봄하늘에 살포시 떠올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 세상을 살피는 뭉개구름을 닮은 시들로 가득하다. 이 시집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우리 미래를 짊어지고 나아갈 청소년들 마음이 맨 얼굴 그대로 시가 되어 우리 사회 곳곳을 현미경처럼 비추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 배창환은 1955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1981년 <세계의 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잠든 그대> <다시 사랑하는 제자에게> <백두산 놀러가자>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 <겨울 가야산>이 있으며, 문학교육서 <국어시간에 시 읽기 1> <이 좋은 시 공부> <뜻밖의 선물> <어느 아마추어 천문가처럼>을 펴냈다. 지금 경주여고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시인 조재도는 1957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청양에서 자랐으며, 1985년 <민중교육>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사랑한다면> <좋은 날에 우는 사람>이 있으며, 동화 <자전거 타는 대통령>, 청소년 소설 <이빨자국>을 펴냈다. 지금 천안동중학교에서 국어교사를 맡고 있으며, '학생 정서 표현 글쓰기'를 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문학in]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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