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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이 불태운 절 가야사 아니다"

김기석씨 <상산삼매> 근거 주장... 내포 가야산 불교역사 정리 시급

등록|2012.03.19 14:49 수정|2012.03.19 14:49

남연군묘 전경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도립공원 안에 위치해 있는 남연군묘의 모습. ⓒ 예산군


'2대 천자(天子)가 난 명당터'로 유명한 남연군묘를 쓰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그 자리에 있던 가야사를 불태웠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런데 이때 불태운 절이 가야사가 아닌 묘암사라는 주장이 나와 이에 대한 검증과 재정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최근 <내포에 핀 연꽃 가야산의 절터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펴낸 김기석(64, 충남 태안, 상산역사문화연구회장)씨는 흥선대원군이 남연군묘 자리를 찾아낸 1844년보다 무려 90년 앞서 나온 <상산삼매(象山三昧, 조선시대 예헌 이철환이 1753년 충청도 가야산 일대를 4개월여 동안 유람하고 남긴 유기)>의 내용을 근거로 "예헌 이철환이 가야산을 유람한 뒤 기록한 1753년에 이미 가야사는 터만 남아 있었다. 가야사는 가야산에 있는 절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사찰이어서 이후 가야사를 모칭(模稱)하고 다녔던 인근 절 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금탑(남연군묘 자리)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묘암사다. 이 때문에 흥선대원군도 잘못 알아 훗날 가야사로 전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씨가 펴낸 책 <내포에 핀 연꽃…> 203쪽에 따르면 "<상산삼매> 1753년 12월 8일자 기록에 '도청봉 아래에 묵은 터가 있는데, 그것은 가야사터이다. 병선(=병화(兵火))이 나서 다 불에 타버렸다. 그 폐허에 무너진 형체만 남아 있다'고 나와 있다. 또한 나흘 뒤인 12월 12일자 글에는 '묘암사는 가야사에 속했다. 가야사가 잔악해지고 불탄 뒤로부터 그 본래 쓰던 이름은 버리고, (그 옆에 있는 절들이) 통틀어 가야사라고 모칭했다'고 돼 있다"면서 "대원군이 자기 선친인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불태워버렸다고 하는 가야사는 금탑 옆에 있던 묘암사였던 것 같다. 가야사가 없어진 뒤부터 묘암사, 관음사, 광명대가 서로 가야사라고 모칭을 하고 있고, 1753년 당시에도 묘암사가 금탑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고, 가야사가 없어지고 남아 있던 3개 사찰 가운데 대표적 사찰이 묘암사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대원군이 이 묘암사를 가야사로 잘못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 돼 있다.

김씨는 이외에도 가야사와 흥선대원군의 인연에 대한 역사자료들을 근거로 제시하며, 이 부분에 대한 연구와 역사정리의 필요성을 피력하고 있다.

충남도지정 문화재 기념물 제80호로 지정돼 있는 남연군묘에 관한 이야기는 흥선대원군과 가야사, 금탑에 얽힌 비화 때문에 더욱 유명하다. 군지와 문화재 소개자료 등 현재 나와 있는 모든 자료들에는 당시 불태운 절이 가야사로 나와 있다. 때문에 이번 김씨의 주장이 맞을 경우 기록물들에 대한 정리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역사서만 제대로 봤어도 진작 정정할 수 있던 내용이 지금껏 규명되지 않은 까닭은 무관심 때문이다. 가야산은 크지 않은 규모임에도 200여 개의 절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다. 이는 경주 남산의 130개보다 훨씬 많은 수다. 가히 '한국에서 최초로 꽃피운 불교의 성산(聖山)'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풍수지리가들과 등산객들의 사랑을 받고, 많은 이들이 찾고 있는 이 가야산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시피하다"고 지적한 뒤 "가야산에 대한 유일한 역사기록물이라 할 수 있는 <상산삼매>의 완역본이 없어 지난해 예산문화원에 향토민속사업으로 제안을 했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더라. <상산삼매>의 저자가 예산 고덕 사람이고, 가야산이 예산군에 있는 만큼 예산지역에서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또 "내가 가야산 일대 마을의 기록을 위해 만났던 어르신들 열 분 가운데 일곱 분은 3∼4년새 벌써 세상을 달리하셨더라. 산증인들의 생전에 구술기록을 해두려면 빨리 서둘러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가야산 불교문화 기록 집대성한 <내포에 핀 연꽃 가야산의 절터들>  

▲ <내포에 핀 연꽃 가야산의 절터들> 표지사진 ⓒ 김기석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연구가 극히 미미했던 가야산의 불교문화에 대한 기록이 한 개인의 열정으로 집대성돼 한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충남 서산시 해미 출신으로 태안에서 법무사로 일하고 있는 김기석(64, 상산역사문화연구회장)씨가 역사자료와 구술을 정리한 <내포에 핀 연꽃, 가야산의 절터들>을 펴냈다.

내포불교역사의 중심이라 일컬어지는 가야산은 서산과 예산에 걸쳐 있어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반쪽짜리 기록들만 해당 지자체 역사지에 기록돼 있을 뿐, 가야산 전체를 아우르는 자료가 없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사찰 대다수가 사라졌고, 당시 사찰에 관한 유일한 기록물인 <상산삼매>는 아직도 완역본이 나오지 않아 관심있는 이들이 애를 태우고 있다.

내포에 핀 연꽃, 가야산의 절터들책을 집필한 김씨는 가야산에 관심을 갖게된 계기에 대해 "20여년 전부터 당뇨증상으로 토·일요일마다 가야산 등산을 해오다 7년 전부터는 길 없는 길로 다니기 시작했는데 산 속 돌로 쌓은 석벽이나 깨진 기왓장이 나오는 절터를 발견하면서 등산의 목적이 달라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먼저 <예산군지>와 <서산시지> 그리고 읍면지들에 있는 자료들을 찾고, 가야산 속과 인근 마을 어르신들의 구술을 기록해 절터와 산모양 등을 그림으로 표시하기 시작했다.

2008년, 우연한 기회에 대구 계명대 김영진 교수가 번역한 '예헌 이철환의 생애와 상산삼매'라는 학술논문을 읽고 난 그는 사명감을 북돋우게 됐고 지난 2월 책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상산삼매>의 번역은 우리지역 한학자 전용국 선생이 도왔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만 그려놓고 말았다"며 겸손해 했지만, 향후 가야산 역사 연구와 사업들에 주춧돌을 놓는 중요한 획을 그었다.

그는 "이번 책에는 사진자료가 없다. 현재 절터의 흔적을 사진으로 담고 있는데, 상당시간 소요될 것 같다. 또 가야산과 내포와 관련한 좋은 자료가 나오면 이후 개정판을 낼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특히 서산시 운산면 용현2리 보원사지 앞 백제의 절길에 있는 몇개의 절터들과 덕산 상가리 가야사지 위 고향동 아래에 있는 몇 개의 절터들, 봉산 봉림리 서림사지 주위에 있던 몇 개의 절터들에 관하여 미진한 점이 있어 보정하고 싶다며 관련 내용에 대한 제보와 의견개진을 당부했다. 책 값은 1만원(배송비 별도)이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고 있는 <무한정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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