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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훼손한 손으로 송충이도 잡았지요

추억 더듬기

등록|2012.03.21 11:24 수정|2012.03.21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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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내 소년 시절의 추억들을 소개하는 글을 몇 개 지었습니다.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중반에 걸친 소년 시절 추억여행을 하게 된 동기는 60년대 중반의 태안 읍내 모습과 태안천주교회 모습을 담은 사진들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근 50년 전의 사진들을 이메일로 대량 입수한 때는 2004년입니다. 2004년은 천주교 대전교구 태안성당이 본당 설립 40주년을 맞는 해였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40'이라는 수는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요. 당연히 본당 설립 40주년을 기념하고 경축하기 위한 여러 가지 행사들이 펼쳐졌습니다.  

당시 나는 '40주년경축행사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여러 가지 행사들을 기획하고 시행하는 일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옛날 사진과 유물들을 수집하여 전시하는 일이었고, 또 한 가지는 오래 전부터 본국에서 생활하시는 태안성당 초대 주임이셨던 고대연 야고버 신부님을 초청하는 일이었습니다.

태안본당 초창기부터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각 가정들에서 많은 양의 옛날 사진들과 유물들을 수집하여 선별을 한 다음 일일이 설명을 달아 전시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성당 안팎의 신앙생활 모습을 담은 사람 위주의 사진들이거나 성당의 옛 건물만을 보여주는 사진들일뿐이고, 태안 읍내라든가 백화산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들은 거의 없어서 아쉬움이 컸습니다.

고대연 야고버 신부님천주교 대전교구 태안본당 초대 주임이셨던 고대연 야고버 신부님. 남미 콜롬비아 출신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오셨다. 고대연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졌고, 한국어가 유창했다. 신부님 모습 너머로 백화산의 헐벗은 모습이 보인다. ⓒ 지요하


그때 나는 40주년의 가장 의미 있는 행사로 초대 주임이셨던 콜롬비아의 고대연 야고버 신부님을 초청할 계획을 세우고 고 신부님의 소재지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곳으로 수소문을했습니다. 태안성당 공소시절의 본당인 서산 동문성당의 당시 주임이셨던 오일복 요한(프랑스인, 은퇴 후 논산 '성모마을'에서 중증장애인들을 돌보며 사시다가 2004년 별세) 신부님과 50년 만에 통화를 했고,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2가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 본부와도 여러 번 통화를 한 끝에 결국에는 은퇴하신 전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님의 도움 덕분에 고 야고버 신부님의 콜롬비아 내 소재지를 알게 되어 편지를 보낼 수  있었지요.

태안본당 공동체가 새 성전을 건립하는 일에 몰두하는 등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고대연 야고버 신부님을 끝내 초청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어를 다 잊으셨다는 고 야고버 신부님의 영문 편지를 이메일로 받아 본당 주보에 소개할 수도 있었고, 신부님이 가지고 계시는 1960년대 중반의 많은 사진들을 통째로 이메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사진들을 내 컴퓨터 그림 방의 '고 신부님'이라고 이름 지은 폴더 안에 온전히 저장을 해놓았지만, 또 언제부턴가 그 사진들을 내 뇌리에서 잊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어찌어찌 하다 보니 또 금세 몇 년이 흘렀습니다. 사람 사는 거, 참 덧없다 싶습니다. 금세 잊고, 순식간에 몇 년이 지나고, 그러다보면 어느덧 황혼 길에 다다르는 게 인생이지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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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연히 '고 신부님'이라는 폴더 안의 사진들이 생각나서 60년대 중반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노상 컴퓨터 앞에서 살다시피 하면서도 바로 눈앞의 그 풍경들을 왜 잊고 살았는지, 그 무심함 속에서 또 순식간에 몇 년이 지나가버렸다는 사실에 기이한 당혹스러움과 혼곤함에 빠지기도 했지요.

60년대 중반의 풍경들을 구경하자니 이런저런 추억들이 고구마 캐어지듯 주렁주렁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일단은 혼자 실컷 추억여행을 즐겼습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감회와 눈물이 핑 도는 슬픔과 그리움들을 많이도 체감했지요. 그리고 몇 가지 추억들을 추려 소박한 글을 몇 개 써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오늘의 이 글을 쓰기 전에 다시 한 번 내 컴퓨터 안의 60년대 중반의 풍경들을 유람하면서, 이번에는 백화산 풍경에 오래 눈을 주었습니다. 그 풍경 속에 길래 머무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백화산의 60년대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일종의 죄의식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어린 나무꾼의 모습이 뚜렷이 오버랩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소년 시절에 나무꾼이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산에 가서 나무를 해왔습니다. 제 나이에 학교를 들어갔으니 2학년이면 아홉 살이었습니다. 지금 아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테지요. 처음에는 빈 가마니를 반으로 접고 새끼로 묶어 어깨에 메고 바구니를 하나 들고 산으로 가곤 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산으로 가는 게 일이었습니다. 나무에서 떨어진 꼼방울(솔방울)들을 주워 바구니에 담아 가마니에 붓곤 했지요.

반 가마니 정도 솔방울이 채워지면 그것을 나무 등걸 같은 데다 올려놓고 새끼 멜빵을 메고 일어서서 마리지고개를 넘어오곤 했습니다. 집에서는 내가 주워온 솔방울로 아궁이에 불을 피워 밥을 지어먹곤 했지요.

처음에는 그렇게 솔방울을 주워오다가, 작은 갈퀴를 가지고 가서 솔꼴(솔잎)을 긁어 담아왔는데, 벌거벗은 산들이라서 솔방울도 솔잎도 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도끼와 괭이를 가마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크고 작은 나무 등걸들을 캐오는 일도 하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 중반의 백화산충남 태안의 명산 백화산의 옛 모습이다. 낮은 곳일수록 더욱 헐벗은 모습이었다. 해방 직후, 또 6.25 전쟁 시기에 산림훼손이 심했고, 아궁이에 불을 때던 시절 사람들이 나무를 많이 해간 탓에 민둥산이 되어 버렸다. ⓒ 지요하


4학년 땐가 5학년 때부터는 지게를 지게 되었는데, 가을에는 낫을 가지고 다니며 푸장나무들을 베어다가 햇볕에 말려 불을 때기도 했고, 겨울에는 산 임자 몰래 깊은 산 속의 소나무들을 오르내리며 생솔가지를 쳐서 지게에 지고 오기도 했지요. 무거운 지게를 지고 미끄러운 눈길을 밟다가 그만 넘어져서 지게와 함께 논배미에 처박힌 적도 있었지요.

그 소년 시절의 '나무꾼 추억'을 가지고 단편소설 하나 지은 적이 있습니다. 2005년 <월간문학> 9월호에 <나무꾼의 추억>이라는 소설을 발표해서 평론가 임헌영 선생의 호평을 얻었지요. 임헌영 선생은 내 소설에 대해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라는 말씀도 하셨고….

그런데 나는 소년 시절 나무꾼 추억을 떠올리다 보면 매콤한 죄의식도 한 가지 떠올리게 됩니다. 60년대 헐벗은 모습의 백화산을 보노라니 정말 죄의식이 목구멍을 매콤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백화산은 수목이 뒤덮여서 크고 작은 바위로 뒤덮인 산이 바위산이 아닌 것만 같습니다. 정말 몰라보게 변했습니다. 벌거벗은 민둥산이 푸른 산으로 변했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이 발전했음을 표징하는 것일 듯도 싶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60년대 벌거숭이 백화산을 보며 갖는 내 죄의식이 면제되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나는 벌거숭이 백화산을 더욱 민둥산으로 만드는데 일조를 했던 사람입니다. 가끔 백화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었습니다. 백화산이 벌거숭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집에서 제일 가까운 산이라서, 또 가재를 잡아 구워먹을 수도 있고 해서 백화산을 가곤 했지요.

낫으로 푸장나무도 베고, 괭이로 진달래 뿌리도 캐고 하다가 슬쩍슬쩍 잔솔도 베곤 했습니다. 산림법이 무섭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통째로 벤 잔솔을 바지게 속에 넣고 그 위에 다른 나무들을 덮어가지고 산을 내려오곤 했습니다. 산에서 낯모르는 어른을 만나게 되면 혹 산림감시원이 아닐까, 내 바지게 속을 조사하지나 않을까 가슴이 조마조마 하곤 했지요.

그때도 죄의식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닙니다. 슬쩍슬쩍 잔솔을 벨 때마다, 또 통째로 베인 잔솔을 바지게 속에 감추고 산을 내려오면서도 하늘을 쳐다보곤 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나쁜 아이라는 생각이 뇌리에 엉기곤 해서 절로 맥이 풀리곤 했지요. 그때를 생각하자니 지금도 가슴이 아릿해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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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시절에는 가끔 학교 수업시간에 단체로 산을 오르곤 했습니다. 주로 농업과목이나 생물과목 시간에 산을 오르곤 했지요. 정부의 강력한 산림정책에 따라 각 학교마다 송충이 잡는 일을 대대적으로 벌였습니다.

학생들은 각자 집에서 도구들을 챙겨 와야 했습니다. 긴 대나무나 철사를 가져오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젓가락처럼 사용할 가는 나무때기와 깡통 따위는 기본 도구였습니다. 당연히 여학생들은 송충이 잡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남학생들 중에는 재미있어 하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백화산 동편 줄기 옛 모습충남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 '태안군민체육관'과 '청소년수련원' 쪽에서 올라가는 백화산 동편 줄기의 1960년대 중반 모습이다. 헐벗은 모습이어서 지금의 백화산이 아닌 것만 같다. ⓒ 지요하


헐벗은 백화산에도 소나무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들이 있었습니다. 또 지금이야 태안중학교와 백화산 사이에 야산이 하나도 없지만, 옛날 1960년대 시절에는 두어 개 야산이 있었고 소나무들이 많았습니다. 동서남북 어디든 가까이에 산이 있으니 송충이를 잡으러 먼 곳까지 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모두 열심히 송충이를 잡았습니다. 가는 나무때기를 젓가락처럼 사용하여 소나무에 붙은 송충이를 떼어 깡통에 담곤 했습니다. 나무를 타고 오르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한 손으로는 나무를 붙잡고 한 손으로는 송충이를 떼어 떨어뜨리면 밑에서 주워 담는 역할 분담이 잘 이루어졌습니다.

송충이가 많던 시절이라 송충이들을 금세 깡통 가득 채울 수가 있었습니다. 잡은 송충이들은 구덩이를 파고 단단히 묻거나, 한데 모아놓고 석유를 붓고는 태워 죽이기도 했습니다. 송충이를 잡아 죽일 때는 누구도 살생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수목이 울창한 산림을 보노라면 소년 시절의 송충이 구제(驅除)사업이 떠오르고, 오늘 우리가 이렇게 푸른 산림을 갖게 된 데에는 우리 어렸을 적의 공도 크다는 생각을 슬며시 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나무꾼 추억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년 시절의 나무꾼 노릇을 떠올리면 마음이 우울해지기도 하지요.

중학생 시절에는 다행히 나무꾼 노릇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곡물 장사를 하게 돼서, 정미소에서 나오는 왕겨를 나무 대신 사용하게 된 덕이었습니다. 아궁이 안에 풍구 통을 들여놓고 풍구를 돌려 왕겨를 때고 살았기에 중학생 시절부터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가지 않은 거지요.  

조금은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나무꾼 노릇을 많이 해서 내 손으로 어지간히 산림훼손을 했는데, 산림훼손을 한 그 손으로 중학생 시절에는 아주 열심히 송충이 잡는 일을 했으니…. 그것도 조금은 인생사의 재미있는 기복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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