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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지가 없던 당 대변인, 어떻게 화장실 나왔나

[은밀한 이야기 ②] 그래도 인생은 '쌀'만하다

등록|2012.04.01 09:41 수정|2012.04.01 10:25
누구나 쉽게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은밀한 이야기' 하나쯤 가슴에 담고 있을 겁니다. 부부사이에도 차마 말 하지 못한 이야기, 직장상사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부하직원의 말못할 이야기, 그때 일을 생각하면 '피식' 웃음부터 나오는 나만의 이야기 등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그 '은밀함'을 과감히 밝힌 이들이 있습니다. 그동안 '은밀'했지만, 이제 더는 '은밀할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편집자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괴로움

먹는 것은 중요하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고, 먹기 위해서 산다. 맛난 것, 몸에 좋은 것, 진귀한 것 찾아 이리저리 다니는 건,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먹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있으니, 바로 '싸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먹기 위해서 싸고, 싸기 위해서 먹는다. 여기에는 아주 명확한 인과의 법칙이 들어 있다. 사람은 먹으면 반드시 싸고, 먹은만큼 싼다. 입은 거짓을 말해도, '똥꼬'는 늘 정직하다.

화장실 가기 전과 후만큼 극단적인 심리 변화가 또 있을까.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갑작스레 찾아온 변의에 허를 찔려 허둥거릴 때, 하나뿐인 출구를 향해 낮은 포복으로 기어오는 '그 놈 목소리'가 뱃속에서 울릴 때, 온 세상은 암울하기만 하다. 겨우 차량에서 내려 뻘쭘함 따위 내 사전에 없음을 온몸으로 시위하기라도 하듯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의 엉거주춤한 자세로 화장실까지의 수십 미터, 아니 수십리 길을 재촉할 때, 2500년 전 부처가 일렀던 한마디가 오롯한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삶은 고해(苦海)다.'

'쉬바, 이래서 선현의 말씀은 무엇 하나 놓칠 것이 없구나'하며 눈물을 머금고 감탄할 새, 도착한 화장실 앞에서 훈련소에서도 배우지 못했던 박력과 절도로 문과 허리춤을 동시에 열고 풀어젖히는 한편, 좌변기 위에 잽싸게 둔부를 빈틈없이 밀착시키는 순간! 이른바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온 후가 다르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절절하게 느낄 수 있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한바탕 폭풍우가 지나가고 난 뒤 인생은 그래도 살 만, 아니 '쌀 만'하다는 사실이 눈물겹게 고맙기만 하다.

하지만 진짜 난감한 순간은 대개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피안(彼岸)으로 가기 위한 두번째 아리랑 고개가 우리를 기다린다. 인생은 원래, 산 넘어 산이다. 지금부터 풀어놓을 두 이야기는 모두 내가 겪은 실화다.

아놔, 자꾸 싸는 이야기 했더니 배에서 신호가 온다. 글쓰기 전에 화장실부터 가야 하는 상황, 뱃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웅크리고 있던 그 놈도 찔리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인도 뒷간에는 휴지가 없다네, 친구

첫번째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인도 북서부의 한국JTS 구호개발사업장인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벌어진 일이다. 나는 그때 대학생 자원활동가로 80여 명의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3주 동안 숙식을 하며 봉사활동을 했다. 사람들이 모여 지내다 보니 볼 꼴 못 볼 꼴 일도 많았다. 특히 싸는 것과 관련된 일이 벌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

▲ 인도 화장실 일부 모습. ⓒ 연합뉴스


인도를 조금이라도 아신다면 숙지하고 계시는 바, 인도 사람들은 볼 일을 본 다음 휴지가 아니라 손으로 뒤처리를 한다. 그래서 변기 옆에 항상 수도꼭지와 작은 바가지(또는 항아리)가 있어서, 왼손으로 뒤를 닦고 물로 헹구는 과정을 반복하여 휴지 없이 모든 일을 끝낸다.

JTS사업장의 방침은 이곳에서 일하는 한국인도 모두 이와 같은 뒤처리 방식을 따르는 것이었다. 환경을 생각하는 생태적인 생활이라는 가치 지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이었다. 우선 갑작스레 사업장을 방문한 수많은 사람이 쓸 휴지를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근처에 편의점은커녕 구멍가게도 거의 없고, 당연히 휴지를 팔지 않는다. 또 다른 문제는 그 이전에 휴지로 인해 변기가 막히는 '참사'가 계속 벌어졌기 때문에(인도 변기에서 물이 내려가는 목은 한국의 그것보다 좁은 편이다) 언제부턴가 휴지 사용 자체를 금지한 것이다. 물론 한국을 떠나올 때, 자원활동가들은 이 같은 사정을 미리 듣고 동의 하에 떠나왔다.

하지만 손으로 뒤를 닦는 건, 말만으로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사업장에 도착한 첫 날, 인솔자가 매우 상세한 뒤처리 방법을 알려 주었지만, 그것을 따르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어찌어찌해서 왼손의 새로운 기능을 조금씩 깨달아갈 무렵, 사고가 터졌다.

어느 날 아침 볼일을 보러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는데, 누군가 사용한 휴지가 변기에 버려져 있었다. 그걸 본 나는, 아직 손이 꺼림칙한 사람이 버리고 갔으려니, 하고 그 위에 그냥 볼 일을 봤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항아리를 이용해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끝내고 기쁜 마음으로 물을 내렸는데 아뿔싸, 변기가 막혔다. 인도에는 아직 좌변기가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적어도 변기의 높이만큼 아슬아슬하게 물이 차오르다 넘치지는 않는 좌변기와 달리 금세 화장실 바닥으로 그것들이 퍼져가기 시작한다. 당황한 나는 황급히 숙소로 돌아와 변기가 울부짖는 응급한 상황을 전했다. 누군가 뒷수습을 하러 갔고, 나는 부끄러운 나머지 참사의 책임이 내게 있음을 알리지 않았다.

잠시 후 아침 공지 시간, 화장실 청소를 맡았던 동혁이 형은 "화장실이 자꾸 막히는데 자기가 그랬으면 그랬다고 조용히라도 얘기를 해 달라"고 말하면서 "책임을 물으려는 건 아니고, 미리미리 얘기를 해 달라는 취지니 모든 걸 용서하겠다"고 했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 웃음을 참지 못하고 쿡쿡거린다. 내심 찔렸지만 모르는 척 따라 웃는 나. 이제야 그 사건의 범인이 나임을 밝힌다.

가끔 신문에 동혁이 형 이야기가 나오면 그때 인도에서의 일이 떠오른다. 동혁이 형은 이북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태어나 23년간 살다가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거쳐 고초 끝에 한국으로 온, 수용소 출신으로는 유일한 새터민이다. 경찰이 꿈이라고 말했던 형, 요즘 무척이나 바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던데, 다시 만나 내 죄(?)를 자백할 기회가 다시 오기 바랄 뿐이다.

B.B.K. - 비밀은(B) 밝혀진다(B), 꼭(K)!

▲ 남자화장실(자료사진) ⓒ 최병렬


인도와 달리 한국에는 휴지가 늘 가까이 있다. 그러나 휴지가 있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방심하면 언제나 사고는 일어난다. 벌써 한 달이나 된 일이다.

아직 창당준비위원회로 당원 모집에 전전긍긍하고 있던 무렵, 청년당 합정동 사무실(참고로 난 지금 청년당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마치 4년 전 인도에서와 같이, 잠시 후 일어날 사태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느긋한 마음으로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일을 끝낸 나는 휴지걸이를 더듬었다. 그런데, 있어야할 것이 없었다. 폭신한 휴지의 촉감 대신 전해진 것은 차가운 금속성의 느낌이었다. 휴지가 없다. 그 사이 누군가 불까지 꺼버렸다. 총체적 난국이다.

화장실 밖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렸지만, 그렇다고 냅다 휴지좀 갖다 달라고 사람을 부를 수가 없었다. 명색이 당 대변인이라는 직책을 맡은 처지에, 화장실에 갇혔다고 소리를 치는 건 점잖지 못한 처사였다. 21세기 최첨단을 달리는 대한민국의 IT 기술을 활용하기로 했다. 나는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회의용으로 사용하는 메신저로 긴급구조 신호를 날렸다.

▲ 당시의_급박한_상황.jpg ⓒ 김정현

"화장실인데 휴지도 없고 불도 꺼져 있어요. 도와주세요!"

스무 명이 넘게 사용하는 메신저 방이었다. 금방 답신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1분, 2분이 지났다. 그런데 10분이 넘도록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사람 소리가 들렸다. 불과 몇 미터 거리에 있는 사람의 구조 신호에 아무도 응답하지 않다니, 이는 진정한 소통의 부재로구나, 하고 한탄할 상황이 아니었다. 변기에 앉아 다리를 달달 떨어가며 온갖 궁리를 해도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휴지가 떨어져도 탈출할 구멍은 있는 법. 신이 나를 도운 것인지, 변기 뒤편 바닥에 딱 두 칸의 깨끗한 휴지가 떨어져 있었다.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해 두 칸으로 모든 뒤처리를 끝내고 마침내 화장실을 빠져나와 바깥 공기를 들이쉬는 순간, 앤디 듀프레인의 자유가 부럽지 않았다.

화장실 밖에 있던 사람들에게 다들 메신저 확인도 안 하느냐며 성질을 내자, 사람들은 처음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 워낙 많은 글들이 오가서 회의 때가 아니면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된 까닭에 그제서야 핸드폰을 들여다 본 사람들은 내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너나할 것 없이 박장대소했다. 한참을 웃고 난 뒤에야 사람들은 물었다.

"대체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

나는 휴지 두 칸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뒤처리를 했다는 기적과도 같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지만 사람들은 의심하며 믿지 않았다. 괘씸하게도, 그들은 의심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웃었다. 심지어 "그래서 직책이 '대변'인"이라는 농담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조차도 웃겨서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 뒤로도 가끔 사람들이 그때의 진실을 들려달라고 말하면, 내가 말한 것이 진실이라고 강조했다. 다행히 아직까지 내가 그 휴지 두 칸으로 어떻게 화장실을 빠져나왔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가능하면 나는 끝까지 그 비밀을 안고 가려 한다.

임기말 레임덕에서 허덕거리는 가카의 숨겨진 비밀도 결국 조금씩 그 베일을 벗어가고 있듯이, 내 비밀들도 언젠가 완전히 까발려질지 모른다. 물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인도에서 배운 기술을 그 순간에 어떻게 활용했을지 추측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카가 세웠다고 하는(그 분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다!) 회사의 이름이 BBK인 건, 꽤 의미심장하다. 비밀은(B) 밝혀진다(B), 꼭(K)! 이럴 때 쓰라고 지은 이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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