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수로왕과 허황옥의 신방 자리에 세워진 왕후사

김유신과 함께 떠나는 삼국여행 (16) 왕후사

등록|2012.03.28 11:48 수정|2012.03.28 11:48

▲ 흥국사로 들어가는 도로 입구의 안내판. '가락고찰' 네 글자가 선명하다. ⓒ 정만진


명월산 중턱인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 478번지의 흥국사(興國寺)는 인도에서 온 허황옥이 장낙나루에서 하선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허황옥 유적지'이다. 그래서 흥국사는 본래 이름도 왕후사(王后寺)였다. 수로왕의 8대손 김질왕이 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452년에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김질왕이 흥국사 자리에 절을 지은 것은 그곳이 바로 수로와 허황옥이 신방을 꾸미고 결혼을 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삼국유사는 '(허황옥이) 산 밖의 별포 나루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쳤다'고 말하고, 1706년(숙종 32)에 편찬된 <明月山興國寺事蹟碑文(명월산 흥국사 사적 비문)>은 '수로왕이 48년(재위 7년)에 명월산 고교(高僑) 밑에서 왕후 허씨를 친히 맞아들여 환궁하였는데, 이때 허씨는 입고 온 비단바지를 벗어 이 산의 산신령에게 폐백을 올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비문은 또 수로왕이 허황옥의 아름다움을 빛나는 달에 견주면서 산에 '明月山'이라는 이름을 지어 붙였다고 전한다.

▲ 흥국사(왕후사) 극락전 ⓒ 정만진


수로왕, 허황옥의 아름다움을 산 이름 明月山(명월산)으로 승화

허황옥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냈을 것이 틀림없다. 이는 지금도 사람들이 사찰이나 성당 등 종교시설에 들어갈 때 그 입구의 천왕문이나 성모마리아상 앞에서 절을 올리는 것과 같다. 어찌 감히 만나는 즉시 절을 하지 않고 깊숙한 안에까지 가서 비로소 예를 갖출 것인가. 배를 댄 곳이 '산 밖의 별포나루'이니 허황옥은 당연히 나루에 붙어 있는 산의 신령을 모셨을 것이고, 지리로 볼 때 그 산은 곧 명월산인 것이다.

▲ 코브라와 불상 그림이 있는 흥국사 인근 출토 석불석 ⓒ 정만진

뿐만 아니라, 흥국사에는 지금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한 사왕석(蛇王石)이 남아 있다. 사왕석은 절 부근에서 발견된 높이 60cm 너비 80cm의 양각(陽刻) 좌불(坐佛)이다. 하지만  앉아있는 부처의 모습을 돌에 튀어나오게 조각한 것이야 흔한 물건 아닌가. 그것이 어째서 인도와 닿는 문화유산이라는 것일까? 하지만 불상 자체 때문에 명월산 흥국사를 허황옥과 수로왕의 유적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상의 양옆을 호위무사처럼 감싼 채 지키고 있는 코브라뱀 조각이 바로 허황옥의 인도 아유타국 공주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라는 해석이다.

▲ 왕후사(흥국사) 대웅전의 불상 위 코브라 ⓒ 정만진



파사탑이 우리나라에는 나지 않고 인도에서 생산되는 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도불교의 남방전파설의 한 근거가 되는 것처럼, 코브라가 부처를 좌우에서 시중드는 모습의 불상 또한 우리나라 불교에는  없는 내용으로, 인도불교가 남쪽으로 전파된 것을 증언해준다. 이는 인도 사람들에게 코브라는 우리나라에서 용이 누리는 종교적 위상을 가진 숭배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감한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 때문에 흥국사의 대웅전에는 지금도 불상 뒤 천정에 코브라 두 마리가 용트림을 하면서 위세를 떨치고 있다.

▲ 수로왕비 사적비 ⓒ 정만진


왕후사는 지금의 흥국사

대웅전 옆에는 1706년 이 절이 중수(重修)될 때 세워진 '駕洛國太王迎后遺墟碑(가락국태왕영후유허비)'도 있다. 가락국 시조인 수로태왕(太王)이 왕후(后)를 맞이했던[迎] 유(遺)적[墟]지에 세운 비(碑)라는 뜻이다. 물론 유허비는 중수비와 나란히 서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절을 중수할 때 '장유(長遊)화상이 서역에서 건너와 불교를 전하니 수로왕이 마음으로 부처를 숭배했다'는 내용의 유물도 담장 밑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 유물이 지금은 행방이 묘연해져 안타깝게 되었지만, 허황옥의 오빠로서 수로왕에게 불교를 전파하기도 했던 장유화상의 행적이 적힌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흥국사가 가야 초기의 설화와 깊은 연관을 가진 사찰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임에는 틀림이 없다.
덧붙이는 글 2012년 2월 중순에 다녀왔습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