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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내 외할아버지 얘기잖아?

1960·70년대 사실적으로 조명한 MBC <빛과 그림자>에 거는 기대

등록|2012.03.26 17:34 수정|2012.03.26 18:18
"너희 외할아버지께서 박정희 정권에게 극장 뺏긴 뒤 충격을 받고 쓰러지시더니 얼마 못 가서 돌아가셨어. 그 땐 순창극장에 사람이 참 많이 왔었는데…."

MBC 월화드라마 <빛과 그림자>를 지켜보시던 어머니의 입에서 진짜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처음 듣는 외가의 극장 잔혹사. 

<빛과 그림자>의 주인공 강기태(안재욱 분)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순양극장을 집권당 국회의원인 장철환(전광렬 분) 일행에게 강탈당했다. 아버지는 용공분자로 몰려 돌아가셨고.

<빛과 그림자>는 이렇게 1960년대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박정희 정권에게 빼앗긴 외가의 순창극장

▲ <빛과 그림자> 홈페이지 홍보물. ⓒ MBC


어머니도 당신의 아버지, 외할아버지께서 전북 순창에 세우신 순창극장을 집권당 민주공화당에 빼앗기셨다. 외할아버지께서는 1953년 무렵, 순창읍내에 있던 공회당(시민회관) 건물을 직접 보수해서 극장을 세우셨다. 먹고 사는 것 자체가 어렵던 그때, 극장에 꽤나 많은 돈을 투자하신 건 자명한 사실.

그러나 정치가 문제였다. 당시 외할아버지의 사촌동생은 순창 지역에서 3·4대(1954~1958) 자유당 국회의원과 6대(1963~1967) 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내셨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와 평화적 정권교체'를 목표로 한 야당인 민정당 소속의 사촌동생이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당 민주공화당 후보에게 패배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선거가 끝난 뒤, 정말 드라마처럼 외할아버지께서는 영문도 모른 채 박정희 정권에게 극장을 빼앗기셨다. 이때가 1967~1968년께. 그리고 얼마 후, 외할아버지께서는 화병으로 숨을 거두셨다. 당신의 연세 53세 때였다. 어머니는 1966년 결혼하고 서울로 떠난 뒤 1967년 겨울에 우리 형을 낳으셨다. 어머니가 오래 전 일을 연도까지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신 이유다.

외할아버지께서 순창극장을 세우신 뒤 집권당에 빼앗긴 일, 그 충격으로 돌아가신 것까지는 <빛과 그림자>의 초반 내용, 강기태의 집안 이야기와 거의 일치한다. 하지만 외가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쇼단 비즈니스를 통해 집권당 핵심 인사에게 복수의 칼을 가는 강기태의 드라마는 어머니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외할아버지는 건달 오야붕(두목)이셨던 것 같아. 순창 지역 건달과 깡패는 죄다 극장에 모였었거든. 그때는 엄마가 극장 매표소도 지키고, 손님들 술상도 많이 차려서 잘 알아. 마작 하던 사람들도 많았고. 외할아버지가 하얀색 양복에 백구두, 중절모로 멋을 부리면 참 멋있었지. 드라마 속 김용건처럼 신발도 수십 켤레였고…."

어머니는 지난 세월을 촉촉하게 떠올리셨다. 외할아버지 손을 잡고 광주와 전주의 양장점과 양화점을 다니면서 공주처럼 옷과 신발을 맞추던 기억, 극장 매표소를 지키고 있으면 <담배 가게 아가씨>의 노랫말처럼 '온 동네 총각들이 너도나도 기웃기웃'했던 기억, 나훈아가 부른 <고향역> 속 '이쁜이 곱분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의 실제 주인공이었다는 기억(<고향역>을 만든 임종수 작곡가는 어머니의 어릴 적 깨복장이 친구 같은 동네 오빠였다) 등등.

"혹시 외할아버지께서 친일파 아니셨어요?"

"모두들 배고프던 시대, 순창이라는 조그만 지역에 극장을 세우고 광주와 전주로 옷을 사러 다닌 걸 보면 혹시 외할아버지께서 친일파이셨던 거 아니에요? 사촌동생이 자유당 국회의원이셨던 것도 그렇고, 그 많은 재산은 어디서 나신 거예요?"

나의 질문에 어머니는 잘 모르겠다고 웃으셨다. 다만, 그때는 학교와 동네 친구들이 참 많이도 집에 와서 밥 얻어먹고 갔다고 했다. 순창극장은 어머니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많은 추억을 남겼다. <빛과 그림자> 속 '빛나라 쇼단'까지는 아니더라도, 극장에 함께 모여 춤도 익히고 노래도 부르며 젊음의 열정을 불태우곤 했단다.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 순창극장은 어머니에게는 차가운 '그림자'로 남은 반면, 극장을 드나들던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꿈과 추억이 깃든 '빛'의 공간으로 계속되었다. 방학 때면 순창극장에서 공짜로 영화를 보던 기억은 나의 어린 시절에도 아련하게 남아 있다.

아무튼, 삶이 늘 그렇듯 누군가에게는 정말 드라마 같은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다. 아니, 현실이 드라마가 된다. <빛과 그림자>를 볼 때면 순양극장과 이름까지 비슷한 순창극장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불편한 진실을 계속 되뇌게 되는 건 비단 외가의 극장 잔혹사 때문만은 아니다. 1970년대 암울하던 독재정치의 흔적이 드라마 곳곳에 묻어나기 때문이다.

현재 <빛과 그림자>는 1970년대 중반을 거쳐 후반으로 가고 있다. 청와대 경호실장이던 차지철을 연상시키는 장철환 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를 떠올리게 하는 김 부장(김병기 분)이 벌이는 권력 다툼은 <빛과 그림자>의 긴장감을 더욱 높이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목소리를 드러낸 각하(박정희 대통령)의 출연 여부도 관심사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빗댄 '한빛회'의 정 장군(염동헌 역)의 역할도 조금씩 커지는 듯하다. 그래서 1979년 10월 26일의 역사와 1980년 5월 광주의 현실도 그려질지 자못 궁금해진다.

▲ 제작진이 홈페이지에서 밝힌 <빛과 그림자>의 기획 의도. ⓒ MBC


50부작으로 기획된 MBC 창사 50주년 드라마 <빛과 그림자>는 현재 34회분까지 방송됐다. 시청률 조사기관 AGB닐슨미디어리서치에 따르면 3월 20일 방송분이 전국 시청률 22.2%를 기록하며 만만치 않은 인기를 보여주고 있다. 

<빛과 그림자> 제작진은 홈페이지에 드라마의 기획의도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드라마는 19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50년 세월을 관통하여 전개된다.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배경으로 그 질곡의 세월을 살아낸 사람들의 인생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현대사를 되돌아 볼 기회를 가져보고자 한다."

"그놈들은 빛나게 살 텐데, 평생 어둠 속에서 살라고?"

강기태는 우리나라에서 쇼단 비즈니스를 선구적으로 이끌었던 실존 인물인 최봉호의 성공 신화를 본 따서 만든 인물이다. 그러나 반환점을 돈 <빛과 그림자>는 쇼단 비즈니스에 얽힌 이야기보다는 권력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1970년대 모든 게 자유롭지 못하던 시대, 어쩔 수 없는 우리네 자화상이다.

최근 드라마 속 강기태는 목숨을 걸고 감옥에서 탈옥했다. 강기태는 함께 밀항을 떠나자는 조폭 두목 조태수(김뢰하 역)의 제안에 "내가 탈옥한 이유는 장철환 일행을 죽이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강기태의 복수가 권력의 심장부인 청와대 실장을 향한 것이다. 다소 무모해 보이는 이 싸움은 어릴 적 친구인 차수혁(이필모 분)의 '사랑과 야망'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친구끼리 한 여인을 놓고 벌이는 지극히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에 권력을 향한 야망이 함께 버무려진 것.

과연 <빛과 그림자>는 어느 시대까지 이어지며 어떤 결말을 내어 놓을까. 드라마는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풀어놓을까. 그건 그렇고, 씁쓸한 건 누명을 쓰고 투옥됐던 강기태가 밝힌 탈옥 이유다. 지금도 현실 곳곳에서 계속되는 불편한 진실. 

"그놈들은 빛나게 살 텐데 날 더러 평생 어둠 속에서 살라고? 그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그놈들한테 복수하지 못 하면 사는 의미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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