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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방에 갇힌 남자...부모 찾아야 나갈 수 있어요

[인터뷰] '종신형 수감' 해외입양인 김형래씨

등록|2012.03.29 19:56 수정|2012.03.30 08:56

▲ '고아'로 등록 되었다가 입양 보내진 후 그는 토드 타셀리(Todd Tarselli)가 되었고 지금은 교도소에 있다. ⓒ 해외입양인모임


한 사람의 탄생은 중요하다. 그러나 특별히 김형래(미국 이름 토드 타셀리, Todd Tarselli)씨에게 그가 태어난 해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형래씨는 1973년 혹은 1974년에 강원도 속초시 청조호 부근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원주에 사는 한 부부에 의해 1980년 1월 16일 동방아동복지회에라는 시설에 보내졌다. 시설 입소 전에는 이미자라는 여성이 그를 돌보았고, 이미자씨는 형래씨의 이모로 추정된다(관련기사 : <'형준이' 아빠, 연락주세요...아들이 죽을지도 모릅니다>).

형래씨는 어린 시절 속초에서 5살인가 6살 때까지 자라던 시절을 기억한다. 그 후 그는 미국으로 입양 보내졌다.

1992년 10대의 고등학생이던 형래씨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한 켄터키프라이드치킨 식당에서 17세 친구의 머리를 총으로 8번을 쏴서 살해했다. 이 끔찍한 살인으로 그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 선고를 받았고 지금 20년째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그중 9년 이상을 형래씨는 독방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그가 10년 가까이 독방에서 사는 이유는 수감생활 중 탈옥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수감자들은 이 독방을 '구멍'이라고 부른다. 공식 이름은 '컨트롤 유닛'이며, 교도소시설개선 운동가들은 이 독방시설이 재소자들에게 정신적 고문을 가하는 것이고 병리학적 후유증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형래씨가 언제 태어났는가의 문제는 법적으로 중요하다. 1992년 그가 살인을 했을 때 나이는 18세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가 살인을 했을 때 17세였을 수도 있다. 입양 당시 그의 나이가 5세인지 6세인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를 입양 보냈던 사회복지사 박아무개씨는 형래씨가 입양 당시 비록 기록에는 만 6세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만 5세일 가능성이 많다고 말했다. 그 이유를 박씨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만 6세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형래군은 만 5세로 학교를 다니지 않았어요. 또 당시 치아가 다 안 자라서 형래군은 6세보다는 5세로 보였어요."

만약 형래씨가 6세가 아닌 5세에 입양 보내진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는 성년인 18세가 아닌 미성년인 17세에 살인을 한 것으로 그의 종신형이 경감된다. 형래씨 실제 나이를 알 수 있는 길은 딱 한 가지다. 그것은 그의 친부모를 찾는 것이다.

고향강원도 속초 김형래씨가 살던 집 ⓒ 해외입양인모임


어떤 이들은 내게 왜 잔인한 살인자를 돕느냐고 한다. 형래씨가 독방에서 종신형을 살건 사형을 당하건 그가 죗값을 치르도록 그대로 놔두라고 한다. 일면 맞는 말 같기도 하고 그런 분들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형래씨는 친부모의 품에서 강제로 헤어져서 어린 나이에 해외입양 보내졌다. 자신 역시 입양엄마이며 <원초적 상처>의 저자인 낸시 베라는 "생후 아이가 친부모품에서 강제로 떨어지게 되면서, 버림받고 잃어버렸다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아이의 무의식 속에 새겨져 '원초적 상처'로 영원히 남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여러 비난에도 불구하고, 형래씨의 친부모를 찾아주는 데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어주고 싶다. 비록 그의 살인죄가 경감되지는 않더라도, '해외입양 세계 4위 국가'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나는 형래씨가 친부모를 만남으로써 그의 지워지지 않는 '원초적 상처'가 치료되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는다.

형래씨는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는 펜실베니아주 교도소 독방에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난해 4월 24일 미국에 살고 있는 한 지인에게 이메일로 이 질문을 보냈고 그 지인이 형래씨를 면회 갈 때마다 내가 준 질문을 하고 답을 받는 지난한 반복의 과정을 거쳐서 이 기사가 작성되느라 거의 1년의 세월이 흘렀다. 다음은 형래씨와 이런 과정을 거쳐 나눈 일문일답이다.

"나를 표현할 수 없는 아픔... 양부모와 위화감 느꼈다" 

▲ 형래씨가 독방에서 그린 그림 ⓒ 김형래


-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있나? 미국으로 입양 보내지기 전 시설생활이라든가 뭐든지 생각나는 대로 말해달라.
"내 기억의 대부분은 파편적이고 연결이 안 된다. 그러나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내가 자라던 집(이모님댁)이다. 한옥으로 방이 3개 있었고 부엌은 높이가 방 2개보다 낮았다. 속초 청조호 근처며 집 옆에 시냇물이 흘렀는데 그 시냇물은 운하를 통해 바로 청조호로 연결되었다. 또 주변에 밭이 있었고 속초시내로 가는 길이 있었다.

운하에서 개구리도 잡았고 겨울엔 청조호에서 썰매도 탔고, 여름엔 주변 강에서 수영했다. 속초까지 걸어서 간 적도 있다. 동네아이 중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나는 당시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다. 이모, 이모부 그리고 사촌으로 생각되는 여자아이 둘이 함께 살았다.

시설에 갔을 때는 이틀 정도 집에서 한참 걸어간 것으로 기억한다. 언덕 위에 있는 큰 시설에 도착한 것이 가을이고 약 1년 정도 머무른 것 같다. 시설 아래쪽에는 마당이 있었다. 한 방에서 많은 아이들과 함께 잤다. 그 후 어른들이 내 사진을 막 찍고 나는 미국으로 입양 보내졌다."

- 친부모와 형제에 대한 기억은 없나?
"전혀 없다. 단지 이모, 이모부, 사촌이라고 생각되는 여자아이 둘이 전부다."

- 양부모는 어떤 분이었고 사이는 어땠나?
"난 내가 입양아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양부모는 중산층으로 처음엔 나와 사이도 좋았다. 자라면서 양부모님은 나를 미국사회와 동화시키고 '미국방식'으로 살게 하려고 하신 것 같다. 난 내 방이 있었고 스포츠를 즐겨 했다.

양부는 조용하지만 엄격하신 분으로 수도국에서 기술자로 일하셨고 블루칼라 근로자로서 자부심도 있으셨다. 양부 격려로 스포츠와 여러 사회활동을 했다. 양모는 전에 결혼하시고 양부와는 재혼하신 생태였고 첫 번 결혼에서 낳은 딸이 있으셨다. 양부와 재혼하셨을 때 양모는 양부 아이를 갖고 싶어 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셨고 그래서 나를 입양하셨다.

양부모님은 내게 잘해주려고 하셨지만 내가 커가면서 우리 사이는 삐걱거렸다. 양부모님은 입양아이가 친아이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은데 누구 잘못이건 그게 제대로 안 됐다.

양부모는 백인으로 금발에 푸른 눈인데 나는 황인종이었고 그것도 문제가 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난 양부모님 속을 많이 섞였다. 의도적으로 양부모님에게 반항한 적도 많았다. 양부도 엄격하고 완고한 성격이었는데 나도 그랬다.

내 10대 시절 양부모님과 사이는 최악이었다. 나는 양부모님이 점점 불편해졌고 내가 자란 집보다는 손님으로 잠시 방문한 집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양부모님은 의무감과 이웃 시선 때문에 나를 길거리로 쫓아내지 않으신 것 같다. 양부모님과 나는 너무 달랐고 결국 나는 18세가 되자마자 집을 나갔다."

"독방은 정신과 육체를 파괴시키기 위해 설계된 것 같다" 

▲ 토드가 그린 교도소 독방 '콘트롤 유닛'의 모습 ⓒ 해외입양인모임


- 10대에 입양인으로서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은 무엇이었나?
"어려서 나는 자신에 대해 돌아볼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항상 운동하고 친구와 놀고 하느라고. 내가 입양인이라는 것 때문에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잘못을 해도 항상 면죄부를 받았던 것 같다. 내가 가끔 친구들과 싸우고 와서 옷이 다 찢어져도 부모님은 별 말씀을 안 하셨다.

내가 어렸을 때 내 느낌이나 감정을 영어가 짧아서 제대로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어서 짜증이 많이 났다. 내가 어디서 왔고 누구인지의 문제도 좀 상의하고 싶었는데 영어로 그런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없어서 답답했다.

양부모집에도 내가 태어난 것이 아니고 '초대 받은 손님'처럼 느껴졌고, 내가 태어난 집은 어딘가 있지만 내가 버려졌을 것이라는 자괴감이나 비참한 기분도 들 때가 있었고. 자기를 표현할 수 없는 아픔. 이것이 가장 큰 고통 같다. 또 내 외모가 양부모와 다른 것도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위화감이 들었다."

- 그린 그림을 보니 어둡고 우울하다. 로나 박사는 형태씨 그림에 대해서 "교도소의 비참한 상황이 정신건강상태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 준다"고 논평한 적이 있는데 로나 박사의 분석에 동의하나? 그림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나?
"로나 박사는 내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 내 감정을 내가 그린 그림을 통해서 나보다 더 잘 읽고 이해하는 것 같다. 나는 단지 내가 교도소 독방과 그 주위에서 본 것을 그릴 뿐이다. 독방생활은 정말 진저리가 나고 사람이 그립다.

처음엔 몰랐지만 독방생활이 10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 독방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설계된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다행스럽게 <교도소 독방에서 생존하는 법>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 데 그 책이 지금껏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살아있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래도 교도소 독방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서서히 파괴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가 그린 그림은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을 그린 것뿐이다."

▲ 김형래씨가 독방에서 그린 그림 ⓒ 김형래


- 1992년 살인을 자행했던 날을 생각하기도 싫을 것이다. 만약 1992년으로 돌아간다면 그 살인이 불가피하다고 보나 아니면…?
"나는 매일 하루도 안 빠지고 1992년의 그날을 생각한다. 밤에 잘 때도 아침에 일어날 때도 그날 그 순간을 생각한다. 거의 미칠 지경이다. 1992년으로 돌아간다면 물론 그 청년을 안 죽일 것이다.

내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런 살인을 다시 안 할 것이라는 이유는 교도소에 오기 싫어서나 범죄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 생명, 인생이 정말 소중한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너무 어리석었고 생각이 짧았다. 한 소중한 생명을 죽이고 그 결과가 어떨 것인지 생각하거나 이해하지도 못 했으니 말이다. 매일매일, 나는 내가 그때 그러지 말고 다르게 했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 교도소 독방에서의 일상생활과 무슨 생각을 하고 지내는지 말해달라. 또 그림 그리기가 형래씨 삶에 주는 의미는?
"6:30 기상 및 점호, 07:00 식사, 08:00-10:00 야드에 서 있거나 앉아 있기, 11:30 식사, 12:30 점호, 13:00-15:00 야드에 서 있거나 앉아 있기, 15:30 샤워, 16:00 점호, 16:30 식사, 18:00-20:30 독방에 있기(겨울에), 햇빛이 있는 다른 계절엔 야드에 서 있거나 앉아 있기, 21:00 점호.

나는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야드에서 운동을 한다. 독방에 있을 때는 독서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편지를 쓴다. 그림 그리기를 통해 비록 몸은 독방에 갇혀 있지만 나를 성찰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 생각과 신념을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

- 친부모님이 그리울 텐데 하고 싶은 말은? 또 입양인으로서 입양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나는 친부모님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보고 싶다. 나는 종종 친부모님 중 내가 누구를 닮았는지 궁금하다. 한국 사람들을 볼 때면 저 사람들 중에 내 친척이 있을까 생각한다. 또 왜 친부모님은 나를 버렸을까도 생각한다. 자기의 살과 피를 버릴 만큼 상황이 다급했을까? 친부모님에게는 다른 자녀도 있을까? 그 다른 자녀와 친부모님은 함께 살까? 아니면 그 자녀들도 나처럼 해외입양 보내졌을까 아니면 나만? 친부모님에 대한 미움은 없지만 정말 궁금하다."

"당신이 버린 아이, 죽는 순간까지 상처 안고 죽는다" 

▲ 김형래씨가 독방에서 그린 그림 ⓒ 김형래


- 입양기관에서 일하는 분들, 입양인들, 자녀양육을 포기하고 입양을 생각하는 친부모들, 양부모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현재 입양제도는 친부모와 입양부모의 권리는 배려하고 인정하지만 당사자인 입양인에 대한 배려나 권리인정은 너무 부족하다.

입양기관에 일하시는 분들은 입양아를 최대한 같은 인종에게 입양 보내달라. 가장 좋은 것은 친부모가 자녀를 직접 키울 수 있도록 국가가 기본 책임과 의무사항으로 지원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국내입양, 세 번째는 해외입양을 보내더라도 같은 문화 혹은 인종에게 보내라. 입양인 기록이 틀린 것이 너무 많기에 입양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보전되어야 하고 당사자인 입양인에게는 친부모에 대한 정보가 공개되어야 한다.

현재 입양제도는 인간의 기본적이고 자연적인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 인간은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알 필요가 있고 권리가 있다. 인간은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도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입양인들은 항상 내가 누군가라는 정체성을 잃지 마라. 인간은 정체성을 잃으면 파괴된다. 입양인들에게는 아주 어려운 일이겠지만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정체성을 아는 것은 세상의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친부모님은 물론 불가피한 이유로 친자녀에 대한 친권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친권을 포기한 그 아이는 죽는 순간까지 자기가 입양인라는 것을 한 순간도 잊지 못하고 살며 상처를 안고 죽는다. 한 입양인의 끝없는 자기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은 오직 그 입양인의 뿌리인 친부모만이 답해 줄 수 있다.

입양부모는 항상 입양아에게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주길 바란다. 가장 작은 정보라도 입양인에게는 의미 있고 큰 힘이 될 수 있다. 입양인이 입양부모를 통해서 친부모에 대한 조그만 정보라도 알 수 있다면 입양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입양부모는 입양아를 친자식과 '똑같이' 키우려고 하고 그것이 좋은 일이지만 동시에 입양아는 친자식과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그 다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다름을 무시하는 것은 다름을 강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큰 실수가 된다.

미혼모와 그 자녀에 대한 한국사회의 편견과 차별은 정말 한국인들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미래를 향해 가고자 한다면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리고 미혼모와 그 자녀에 대한 한국정부의 지원정책이 뒤따르지 않으면 한국은 세계에서 영원히 후진국가가 될 것이다."

- 만약에 친부모님을 찾고 그래서 18세가 아닌 17세에 살인을 한 것으로 밝혀져서 석방이 된다면 여생을 어떻게 지내고 싶나?
"만약 내가 자유인이 된다면 울타리나 담장이 없는 집에서 살고 싶다. 또 내가 책에서 읽은 곳을 가보고 싶다. 살면서 너무나 많은 실수를 했지만 내가 뿌린 실수의 씨앗을 거두고 싶다. 그래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으로 다른 사람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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