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펴내지 않는 것보다 심한 고통은 없다"
작가 정소성, 7년 만에 장편소설 <설향> 펴내
▲ 작가 정소성작가 정소성(68)이 7년이라는 오랜 침묵을 깨고 새로운 장편소설 <설향 雪鄕>(시와에세이)을 펴냈다 ⓒ 이종찬
작가 정소성(68)이 7년이라는 오랜 침묵을 깨고 새로운 장편소설 <설향 雪鄕>(시와에세이)을 펴냈다. "소설가가 소설을 펴내지 않는 것보다 심한 고통은 없다"라고 말하는 작가가 7년이라는 세월 동안 소설을 쓰지 못한 까닭은 대학을 정년퇴직할 무렵 뇌경색으로 쓰러져 고통 심한 병과 힘겹게 싸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장편소설은 모두 11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1장 '동해안의 젊은이들', 제2장 '마음의 행로', 제3장 '숲 속의 통나무집', 제4장 '분열', 제5장 '졸업 후-절망을 넘어', 제6장 '군 입대', 제7장 '시련의 세월', 제8장 '같은 날의 휴가', 제9장 '충격적인 비극', 제10장 '돌아서 가는 길', '제11장 기항지'가 그것.
지난 2일(월) 저녁 7시. 인사동에 있는 한 음식점에 만난 작가 정소성은 이번 장편소설 <설향>에 대해 "이번 소설은 열두 번 이상 고치고 다듬기를 거듭했다"고 속내를 내비쳤다. 그는 "나는 7년이라는 오랜 공백 기간 동안 내 졸작들에 대해서도 일관된 독자군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는 지금 나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나는 다시 쓰고 또 쓸 것이다. 정년으로 자유로워진 탓일까,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필의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라며 "나이가 들어보니 소설은 어쩌면 자기의 이상과 진실된 희원으로만 살 수 없는 실제의 인간의 삶을,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나마 작가 자신의 열정과 희망, 그리고 진실로 살아보고자 하는 생명 존재로서의 간절한 소원을 추구하는 작업"이라고 못 박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밤이야, 혜란과 미라가 아름다워 더 취해"
▲ 정소성 새 장편소설 <설향>이번에 나온 장편소설 <설향>에서는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사랑, 가슴앓이 같은 사랑을 병에 빗댄다 ⓒ 시와에세이
그리곤 실제 붓을 들어 그녀의 의견대로 작품을 조금 고쳐보기도 했다. / 가정형편이 괜찮은 편이었던 혜란은 아버지로부터 전세아파트를 한 채 받았다. 그것은 양화대교가 내려다보이는 강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수면 위로 선유도가 그림처럼 떠 있었다. / 나도 가끔 혜란의 아파트를 찾아가곤 했다." -13~14쪽, '동해안의 젊은이들' 몇 토막
이 장편소설을 이끌고 있는 주인공은 일인칭으로 이야기하는 '현우'다. 사랑에 목말라하고, 그렇게 얻은 사랑 때문에 울고 웃고 하는 이 소설이 지닌 모든 이야기, 그 이야기는 현우(나)가 바라보는 눈으로 그려지고, 그 앞뒤 또한 현우가 부는 풍선처럼 팽팽하게 불어났다 줄었다 하면서 이어진다.
'나'는 미술대학을 다닐 때 가까운 벗이었던 '혜란'을 사랑의 핵으로 내세운다. 그 핵을 둘러싸고 있는 마그마와 용암은 남자 '태현'과 여자 '미라'다. 이 장편소설은 화가를 꿈꾸는 젊고도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이 네 사람 사이를 둘러싼 여러 가지 복잡 미묘하면서도 운명처럼 다가오는 사랑이야기로 수놓고 있다.
이 장편소설에서 현우는 아주 사려 깊은 모범생처럼 행동한다. 예술이라든지 생이라든지에 따른 진지함이 현우에게서 느껴진다. 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자기 욕망을 스스로 억누르면서 자연스레 혜란과 가까워진다. 순간적인 돌발행동보다 상대를 폭넓게 배려할 줄 아는 그에게 싹트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몹시 순수하게 느껴진다.
"우리들은 아래채 정원의 의자에 앉아 삶은 오리고기를 안주 삼아 온밤 막걸리와 소주를 마셨다.
'너무나 아름다운 밤이야, 술로도 취하지만 혜란과 미라가 너무 아름다워 더 취해...'
어쩌면 나와 혜란 그리고 미라와의 사이에 있었던 사랑의 행위가 그녀들과 태현 사이에서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뇌리에 떠올랐다. 혹시 그들 사이에서는 더욱 절실한 사랑의 행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내 의식의 바닥에서 피어올랐다." -101쪽, '숲속의 통나무집' 몇 토막
현우가 지닌 삶은 어찌 보면 매우 현실적이다. 벗 태현을 위한 배려와 깊은 우정도 그러하고, 군대를 제대한 뒤 그가 선택한 미술교사라는 길도 평범한 자기 선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현우는 이 소설에서 자기 속내 깊이 삶과 예술에 대한 진정성을 키워나간다. 혜란은 이 같은 현우 성격과 그럭저럭 어울린다.
처음에는 혜란을 친구이자 미술이라는 길을 함께 걸어가는 예술동반자라 여겼던 현우는 날이 갈수록 그 감정을 넘어선다. 혜란은 한 여성으로 현우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지만 두 사람은 서로 그 감정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있다. 혜란은 그 때문에 현우가 군대생활을 거치는 동안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남편과 사별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다시 파리로 떠나는데...
"젊음이란 아름답지만 늘 충동적이다"
"눈 덮인 골짜기는 나에게 무한한 위무와 상상의 세계를 선사하였다. 나는 밤 새워 그림을 그렸다... 어느 날, 점심을 짓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누가 날 찾아왔다고 하시면서 내 화실로 들어오셨다. 알 만한 사람이라면서 나가 보라고 했다. 화실 유리문을 통해 눈이 하염없이 뿌려지고 있는 마당을 내려다보았더니 아이 이게 누군가. 혜란이가 흐린 하늘과 눈발로 한껏 깊어진 마당의 공간 속에 큼직한 트렁크를 들고 서 있는 게 아닌가." -307쪽, '기항지' 몇 토막
작가 정소성 장편소설 <설향>이 지닌 특징은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주인공들이 이리저리 부딪치고 빠지는 것이 아니다. 이 주인공 네 사람은 스스로 속내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사랑의 감정, 충동 혹은 욕망 때문에 사랑과 예술 또한 신기루로 흩어진다. 이 장편소설은 사랑과 예술을 하나로 잇기 위해 고민하고 아파하고 눈물짓는 우리시대 젊은이들 고된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권영민은 '발문'에서 "젊음이란 아름답지만 늘 충동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소설 <설향>의 이야기에 공감한다"고 말한다. 그는 "자기 파괴적이라고 할 정도로 격정적이면서도 때로는 거기에 망설임이 또한 덧붙여지기 때문"이라며 "이 소설에서 그려내고 있듯이 젊음이란 거기에 포함되는 가장 격렬한 여러 가지 파격의 장면들을 빼놓고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쓴다.
그는 "장편소설 <설향>을 세 번이나 읽었다. 이 소설은 젊음의 이야기다. 여기서 젊음이란 단순한 세대적 감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라며 "새로운 예술을 향한 도전에는 좌절도 있고 실패도 있지만 자기 욕망을 따라가고자 하는 힘이 그 저변에 작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의 이야기 자체가 보여주는 젊음의 감각"이라고 적었다.
작가 정소성은 1944년 경북 봉화에서 태어나 1976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창작집으로 <아테네 가는 배>, <뜨거운 강>, <타인의 시선>,<혼혈의 땅>,<벼랑에 매달린 사내>가 있으며, 수필집으로는 <영원한 이별은 없다>가 있다.
장편소설 <천년을 내리는 눈>, <여자의 성>, <악령의 집>, <가리마 탄 여인>, <안개 내리는 강>, <제비꽃>, <사상의 원죄>, <최후의 연인>, <소설 대동여지도>, <운명>, <두 아내>, <소설 태양인>, <바람의 연인> 등이 있다. 동인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박영준문학상, 월탄문학상을 받았다. 지금은 단국대학교 대학원 명예교수, 일간문예뉴스 <문학in> 기획편집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덧붙이는 글
<문학in>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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