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유권자는 후보자의 종이자 머슴... 그래?

[총재 취재 후기] 선거의 주인은 유권자... "먹고 살기 힘들다고? 그럼, 투표해!"

등록|2012.04.10 18:21 수정|2012.04.11 09:27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데 선거가 다 무슨 필요예요. 정치인이 언제 우리 같은 사람 생각해 준 적 있답니까? 지들끼리 잘 먹고 잘 살라고 그러쇼. 젠장. 새누리고 민주고...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소?"

지난 3월 11일,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 맞은편 유흥가 골목에서 만났던 한 시민의 말이다. 오후 5시 무렵,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그는 막걸리를 몇 잔이나 비웠는지 불콰해진 얼굴로 4.11총선에 대해 이처럼 울분을 토했다. 한 마디로 '먹고 살기 바쁜데 무슨 선거냐'는 거다.

이번 총선 취재를 하며 3월 11일부터 현재까지 서울 영등포갑·을 선거구의 유권자를 비교적 두루 만날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어느 후보와 어떤 정당을 반드시 찍겠다고 똑 부러지게 의사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많은 유권자는 "높으신 양반들이 그렇게 정치하면 안 된다" "뽑아달라고 굽실거릴 때는 언제고 갈 때는 인사도 없이 가는 게 말이 되느냐" "그 사람이 그 사람인데, 투표하면 뭐 하느냐" 등등 정치와 선거에 대해서 짙은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런데 취재를 거듭하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유권자들은 '높으신 양반' 거론하며 "투표하면 뭐가 달라지느냐"는 하소연을 과연 누구에게 하는 걸까? 국회의원으로 뽑아달라며 후보로 나선 사람들에게? 민심을 취재하는 언론사 기자들에게?

"왜 이러는 걸까요? 도대체 유권자들은 누구에게 자신들의 권리를 지켜달라고 하소연을 하고 있는 걸까요? 투표 스스로 권리를 지키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이 불편한 진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유권자들의 하소연을 <개그콘서트> '불편한 진실' 프로그램을 모방해 정리해보면 이쯤 될 것 같다. 유권자가 주인 의식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 여의도 국회의사당. 총선은 유권자가 이곳에 들어갈 일꾼을 뽑는 것이다. ⓒ 최육상


#1. 국회의원 후보가 주인이라고 강조하는 언론

새누리당 아성 대구, 민주통합당 텃밭 광주, 이회창 없는 무주공산, 충청 맹주 심대평, 강동을 터줏대감 심재권....

언론이 총선을 보도하며 사용한 제목들이다. 아성(중요한 근거지), 텃밭(집터에 딸린 밭), 무주공산(주인 없는 빈 산), 맹주(지역의 우두머리), 터줏대감(집터를 보호하는 신) 등은 모두 정당이나 후보자가 '주인'임을 수식한다. 정작 선거의 주인이라고 그렇게 강조하는 유권자는 어디에도 없다. 기억하자. 유권자는 정당과 후보자의 종이자 머슴이며 봉이다.

#2. 여론조사와 판세만 차고 넘치는 총선

"OOO리서치입니다. 내일이 선거일이라면 OOO후보와 OOO후보 중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이번 총선 기간 중 딱 한 번 집으로 걸려온 여론조사 전화를 받았다. 질문은 간단했다. 어느 후보와 어떤 정당을 찍을 것인지와 나이 정도를 묻는 자동응답 조사였다.

OOO 42.5% 대 OOO 38.6%(신뢰수준 95%, 오차범위 ±4%).

대개의 여론조사 결과는 이렇게 후보자 간 지지율로 발표된다. 8%에 이르는 오차범위는 기억에 남지 않을뿐더러, 후보자의 공약이나 소속 정당의 정책 등은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선거전 막판 판세는? 130석 확보 관건."
"수도권 선거 결과에 따라 여야의 승패가 갈릴 것."

선거를 이틀 앞둔 9일 저녁, 각종 뉴스에 나온 총선 관련 제목들이다. 공약과 정책도 채 살피지 못했는데, 전문가들끼리 이미 판세 분석을 내 놓았다. 승패는 유권자의 몫이 아니라 여야의 몫임을 못 박았다. 다시 한 번 분명히 하자. 유권자는 정당과 후보자의 종이자 머슴이며 봉이 확실하다.

#3. 머리를 깎겠다는 이외수, 노래 부르겠다는 안철수

"투표율이 70%를 넘으면 머리카락을 자르겠다."(이외수 작가)
"투표율이 70%를 넘으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겠다."(안철수 교수)
"투표율이 70%를 넘으면 빨간 가발에 힙합바지를 입고 개다리춤을 추겠다."(명진 스님)

각종 방송사와 신문사가 앞 다퉈 정당과 후보자가 총선 승패의 주인이라는데, 난데없이 여러 유명인들이 여기저기서 유권자의 투표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이외수 작가에게 긴 머리는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것을 싹둑 잘라버리겠단다. 점잖은 서울대 안철수 교수도 노래하고 춤을 추겠다 하고. 더 나아가 불법(佛法)에 정진해야 할 명진 스님은 빨간 가발까지 언급했다.

그런데, 이들을 지켜보는 마음 한켠이 꽤나 먹먹하다. 투표를 하자는데 꼭 어떤 이유가 있어야 하는지. 이렇게 깜짝 이벤트까지 벌여야 하는지. 투표를 하자고 하면 일단 비딱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이 존재하는 이 불편한 진실. 투표를 독려하면 여당인 새누리당에 반대하고 마치 좌파로 받아들여지는 이 지극히 가슴 시리도록 불편한 진실. 마음이 먹먹할 수밖에.

#4. 한 유권자의 외침, "먹고 살기 힘들다고? 그럼, 투표해!"

4일에 걸쳐 만나본 유권자는 어림잡아 100여 명 남짓 될 듯 싶다. 영등포 갑·을 유권자 중에서도 극히 일부분이다. 그러나, 이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단순했다. 국회의원과 정당에게 "제발이지 먹고 살게 해 달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이들이 잊은 것이 하나 있다. 나 역시 취재를 하면서 불현듯 깨달은 것이다. 누가 뭐래도 국회의원은 유권자가 뽑는 일꾼이며, 국회의사당의 주인은 유권자라는 사실이다. 유권자가 국회의원에게 4년간 국회의사당의 의원실을 국민의 세금으로 임대해 주고, 세비와 활동비까지 지급한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니까 일 못하면 쫓아내고, 일 잘하는 사람은 격려해줘야 한다. 나는 관심 없으니까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하면 안 된다. 귀한 나의 세금이 쓰이는데 말이다. 방치할 경우 나쁜 곳에 쓰기도 한다. 그러니까 끝까지 투표로 책임져야 한다.

선거는 유권자가 4년간 일할 일꾼을 뽑는 일이다. 유권자는 더 이상 정당과 후보자의 종이자 머슴이며 봉이 아니다. 영등포전통시장에서 만났던 한 상인은 거의 호소하듯 이렇게 외쳤다.

"먹고 살기 힘들다고? 그럼, 투표해!"

▲ 서울 영등포전통시장 입구. 오른쪽에 '임대' 글귀가 눈에 띈다. 유권자는 총선을 통해 일꾼을 뽑아 국회의사당 의원실을 4년간 국민의 세금으로 임대해 주는 것이다. ⓒ 최육상


덧붙이는 글 최육상 기자는 <오마이뉴스> 2012 시민기자 총선특별취재팀입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