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야권연대', 한계가 명확했다
[현장편지] 탐욕의 재벌·900만 비정규직 등 투표해야 할 이유 실종
▲ 새누리당이 4.11 총선에서 의석 과반을 넘는 152석(비례대표 25석)을 확보하며 원내 제1당을 차지한 가운데,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기자실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중앙선대위원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총선에서 새누리당을 믿고 지지해 주신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며 "국민의 삶을 챙기는 일에만 매진하겠다"고 감사의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유성호
총선이 끝났습니다. 모든 사건과 이슈를 집어삼키던 폭풍이 지나가고 사람들은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대역전 드라마를 만들어내며 잔칫집이 된 새누리당의 박근혜 위원장은 "국민께 실망을 드렸는데, 마지막 기회를 주셨다"며 겸손해했고, 민주통합당은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한나라당이 비상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던 지난 2월 초까지만 해도 여당은 100석도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원희룡 의원은 "이번 총선에서 115석 정도 받을 것"이라고 말했고, 모든 언론이 120석을 넘기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딱 두 달 만에 새누리당은 152석이라는 기적을 일궈낸 셈입니다.
통합진보당은 목표였던 원내교섭단체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13석을 얻는 데 그쳤습니다. 2004년 민주노동당 시절 얻었던 10석보다 늘어났고, 수도권에도 의석을 확보했지만 정당지지도는 13%에서 10%로 줄었습니다. 특히 노동자의 도시 울산과 창원을 모두 새누리당에 빼앗기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았습니다.
지난 두 달 무슨 일이 있었나
도대체 두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연예인들을 포함해 수많은 유명인들이 투표 독려에 나섰는데 왜 투표율은 60%에도 미치지 못했을까요? 민간인 불법사찰의 증거들까지 대거 쏟아져 나왔는데, 왜 이명박 정권에 대한 심판 여론이 다수를 차지하지 못했을까요?
지난 2월 2일 새누리당이 출범할 무렵까지 한국사회는 탐욕의 재벌에 대한 분노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대단히 높았습니다. '경제를 살리겠다'던 이명박 정권 4년 동안 재벌의 곳간은 넘쳐났고, 9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비롯해 못살겠다는 국민들의 원성은 하늘을 찌를 기세였습니다.
이명박 정권은 법인세 인하, 고환율 정책, 폐차 보조금 등 '재벌 퍼주기 정책'으로 노동자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어 재벌의 곳간을 채웠고, 빵집, 순대가게, 비빔밥, 자전거 사업까지 잡아먹던 재벌에 대한 사회적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궁지에 몰린 새누리당은 '경제민주화 실현'을 목표로 내걸고,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에 따른 부작용 보완,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 대기업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폐해 방지, 하도급 제도 전면 혁신, 프랜차이즈 불공정 근절 약속을 쏟아냈습니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국민 모두가 골고루 잘살도록 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지만 비정규직 문제는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과제"라며 2015년까지 모든 공공기관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약속했습니다. 울산을 비롯해 노동자 도시에서 새누리당의 후보들은 모두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내걸었습니다.
박근혜의 새누리당은 재벌과 비정규직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이명박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고, 내부의 격렬한 반발을 무릅쓰고 인적 쇄신을 단행하면서 새로운 정당의 이미지를 심어주었습니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역시 재벌개혁과 비정규직 축소, 동일노동 동일임금, 비정규직 사용사유 제한, 해고요건 완화 등의 공약을 내걸고 새누리당과 차별화를 시도했습니다. 민주통합당은 상시적인 업무에 간접고용을 금지하겠다는 '진보적인' 공약을 내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진정한 관심은 재벌의 곳간을 열고 900만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이명박 심판'이라는 이름의 야권연대와 후보단일화에 있었습니다. 마침 터져 나온 민간인 불법사찰의 결정적 증거들은 정권 심판론에 기름을 부었고, 야권연대는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는 정규직이라는 2월 23일 대법원의 최종 판결로 인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더욱 높아졌고 9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에 대한 열망이 커져갔지만, 야당의 모든 관심은 야권연대로 모아졌습니다.
야권연대=지상 최대의 목표
▲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와 통합진보당 이정희 공동대표가 3월 25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야권연대 협력방안을 논의하기 앞서 손을 잡고 있다. ⓒ 남소연
이명박 정권 심판에 대한 여론으로 여소야대를 확신하며 교만해 있던 야당들에게 재벌과 비정규직 문제는 주요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탐욕의 재벌에 맞서 싸우고, 경제민주화를 위해 온 몸을 던진 사람들, 900만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투쟁해온 이들은 영입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외부인사 영입과 경선은 '전국노래자랑' 식의 인기투표로 전락했고, 당내 특정 세력들이 진정성과 자질을 갖추지 못한 후보들을 공천해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나꼼수' 김용민 후보의 막말 파동과 성폭력 사건의 2차 가해자를 옹호했다는 논란을 낳은 통합진보당의 정진후 후보, 성추행 사건을 일으킨 윤원석 후보, 비례대표 후보 논란, 이정희 후보의 부정선거운동 등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내부 경선과 후보 야권 단일화 과정에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습니다.
노동자, 농민, 영세상인 등 먹고 살기 힘들고 정치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서민들에게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은 지식인 계층과는 달리 이명박 정권을 심판해야 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노무현 정권에서도 사찰이 있었다는 청와대와 보수언론의 공격은 정치권 일반에 대한 환멸로 이어졌고, 결국 예상보다 현저하게 낮은 투표율로 나타났습니다.
투표 당일에도 일해야 간신히 먹고 살 수 있는 900만 비정규직 노동자, 중소영세 상인들에게 투표해야 할 결정적 이유인 '먹고 사는 문제'는 관심사에서 멀어져 버렸습니다. 성추행, 논문표절, 막말 등 후보의 자질에 대한 공방은 거꾸로 정치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켰습니다.
지난 4년 노동자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어 재벌의 곳간을 가득 채웠던 이명박 정권과 새누리당을 심판하고, 재벌의 곳간을 열어 노동자 서민의 생존의 문제, 안정된 일자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가난한 노동자, 서민들은 휴가를 내서라도 투표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많은 연예인들과 유명인들이 열광적인 투표 참여 캠페인을 벌여 60% 이상의 투표율을 기대했지만 54.3%라는 낮은 결과는 가난한 이들이 선거를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4·11 총선은 왜 야권연대를 해야 하는지, 왜 이명박 정권을 심판해야 하는지가 사라지고, 야권연대 자체가 목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외로운 싸움
▲ 4.11총선을 앞두고 정리해고·비정규노동자들이 서울광장에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99% 희망광장' 농성을 통해 관련 법 폐지·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 노동세상
지난 3월 18일 서울시가 발표한 '서울시민의 취업구조' 통계에 따르면 취업자 중 61.4%가 '직장을 잃거나 바꿔야 한다는 불안감을 느낀다'고 응답했습니다. 즉, 10명 중 6명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 등 고용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3월 10일부터 서울 시청광장에서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희망광장'이라는 이름으로 20일이 넘는 텐트농성을 벌였지만 이들은 4·11 총선의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정리해고의 상징인 쌍용차 노동자들이 선거 운동 기간 동안 22번째 죽음에 맞서 서울 대한문과 평택공장에 분향소를 차렸습니다. 경찰에 의해 매일 영정이 내팽개쳐지고, 노동자들이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9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상징인 현대차 울산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대법원 판결 이행을 요구하며 공장 앞에서 싸우고, 출입 보장을 요구하며 노숙농성을 벌였지만, 유력한 정치인들이 방문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특수고용 노동자들을 대표해서 1500일을 넘게 싸우고 있는 재능교육 교사들, 20일이 넘도록 단식과 서울 상경투쟁을 벌이고 있는 전북고속 노동자들,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을 보여주는 인천 남동시설관리 노동자들의 60일이 넘는 파업, 선거일 당일에도 투표하러 가지 못하고 점거농성을 벌여야 했던 한일병원 비정규직 노동자들….
4·11 총선에서 재벌과 비정규직을 이명박 정권 심판의 핵심적 과제로 여겼다면 아마 야당의 대표들과 후보들이 농성장을 찾았을 것입니다.
매년 수조원의 순이익을 남기는 재벌들의 곳간을 열고, 정리해고를 금지하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고, 안정된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공약이 핵심적인 쟁점이 되었다면 새누리당의 기사회생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재벌에 대한 싸움을 다시 시작해야
4월 12일 청와대는 "현명한 선택을 한 국민들께 감사를 드린다"며 "국익과 미래를 위한 정책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묻지마 야권연대'로 인한 총선 패배는 이명박 정권에게 면죄부를 주고, 재벌과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흔들림없이' 추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1998년 구제금융 사태 이후 24년 만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탐욕의 재벌과 900만 비정규직 문제를 전 사회적 분노를 모아 해결할 수 있는 절회의 기회까지 날려버렸습니다.
총선은 새누리당의 역전승으로 끝났지만 1% 재벌과 부자들에 대한 분노까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노동자 서민들의 생존권을 지키고, 재벌과 싸우는 일은 국회에서만 가능하지 않습니다. 일터에서, 거리에서, 의회에서 함께 싸워야 합니다.
쌍용차 대한문 농성장에서, 현대차 울산공장 비정규직 농성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프레시안>, <참세상>에도 송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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