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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물봐온 우럭이여, 가져가서 잡솨봐"

문학의 향기 흐르는 '정남진', 전남 장흥의 회진오일장

등록|2012.04.30 13:31 수정|2012.04.30 13:31

▲ 선학동마을 가는 길. 소설가 이청준 작품의 주된 무대가 된 마을이다. 전라남도 장흥군 회진면에 있다. ⓒ 이돈삼


서울 광화문에서 정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 전라도 장흥이다. 이 장흥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회진면이고, 이곳의 나루터를 '정남진'이라 불렀다. 정남진은 지금 장흥의 브랜드가 됐다.

회진면은 바다를 끼고 있다. 뒤쪽으로는 천관산이 버티고 서 있다. 전형적인 한촌이다. 이 마을이 이청준 소설의 주된 배경이다. 그의 단편 <침몰선>과 <노송> <돌아온 풍금>의 무대였다. 장편 <흰옷>의 초등학교 여선생이 부임하고 떠났던 포구이기도 했다. <선학동 나그네>의 무대이기도 하고, 임권택 감독이 이를 토대로 만든 그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을 촬영했던 곳이기도 하다.

문학의 향기 넘실대는 그 마을을 찾아간다. 장흥읍을 지나 자울재를 넘는다. 푸르름을 더하고 있는 남녘 바람이 달콤하다. 회진포구엔 바다에서 건져올린 감태가 봄바람에 나풀거리고 있다. 따사로운 봄햇살에 감태가 물기를 털고 있다. 바다 내음이 신선하다.

▲ 장흥 출신의 소설가 이청준의 생가. 전라남도 장흥군 회진면 진목마을에 있다. ⓒ 이돈삼


▲ 바다내음을 품은 봄바람에 감태가 몸을 말리고 있는 회진포구 풍경. 회진에서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 이돈삼


지난 4월 26일. 여기에 오일장이 열렸다. 회진오일장이다. 장터는 평소 주차장으로 쓰이던 곳에 마련됐다. 1일과 6일로 끝나는 날 장이 선다. 회진장은 싱싱한 횟감을 구하려는 이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포구에 자리한 덕인지 갯것들도 싱싱하다.

해가 중천에 걸리면서 장터는 할머니들 차지가 된다. 새벽녘 혼잡스러움은 간 데 없고 벌써 한산해졌다. 여유롭게 장터를 돌아다니기에 좋다.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갑오징어가 제 철이다. 인근 바다에서 잡힌다. 5월 말로 가면 갑오징어도 한물 간다.

감성돔, 도다리도 회진장의 명물이다. "짐질이 있는 바다에서 잡아서 그런다"는 게 장터 사람들의 얘기다. 짐질은 바닷속에서 자라는 바다풀을 일컫는다. 봄볕에 꼬들꼬들 말린 간재미도 맛을 잔뜩 머금고 있다.

"된장하고 갖은 양념 해갖고 발라서 쪄먹으면 돼. 무시 좀 썰어놓고 매운탕 끓여 먹어도 맛이 기똥 차제. 양념을 쫘악 발라서 찌면 우리 애기들도 무지 잘 먹어."

오는 주말 서울에서 내려올 자식들을 위해 간재미를 사러 왔다는 최씨 할머니의 말이다.

▲ 감자와 고추, 파프리카, 버섯 등등. 지역 농민들이 손수 거둔 농특산물도 시골 오일장의 대표상품이다. ⓒ 이돈삼


▲ 어물전은 회진장터의 상징이다. 청정 바다에서 갓 잡아 말린 것들이다. ⓒ 이돈삼


저만치서 제법 큰 소리가 들려온다. 눈길을 돌려보니 꽃게를 두고 실랑이가 한창이다. 꽃게가 11마리에 8000원이란다. 너무 싼 게 흠이었을까. 너무 싸서 혹시 상한 것 아니냐는 게 실랑이의 원인이다. 그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상인이 바로 칼을 들고 꽃게를 두 토막 낸다.

속살을 보고서야 실랑이는 일단락이 됐다. 그 옆에선 난장을 펼친 할머니가 담배 한 모금을 깊숙이 빨아들이고 있다. 칠순의 김씨 할머니다. 할머니는 아들이 낚시로 잡은 우럭과 돔을 담아왔단다.

"다른 것도 매한가지겄지만, 우럭은 막 잡은 놈하고 안 그런 놈하고 완전히 달라. 내 것은 새벽에 물봐온 거여. 가져가서 잡솨봐."

햇살 좋은 길목의 담벼락 아래서 꾸벅 졸고 있는 할머니도 보인다. 할머니 앞에는 쑥과 달래, 냉이, 미나리가 놓여 있다. 그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무료해 하는 할머니한테 다가가 "하루 종일 앉아 계시면 심심하지 않습니까?"하고 물었더니 말친구를 만난 듯 반긴다.

할머니는 "집에서 놀고 있으면 뭣해. 심심해서 나왔어. 그래도 집에 있는 것보단 낫지라. 집에 있으면 지옥이어라 지옥. 사람 구경할라고 나오제"라고 하면서 집에 갖고 가서 무쳐 먹으라며 냉이 한 움큼을 건넨다. 나물 값을 건네는데 할머니는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받지 않는다.

▲ 한 할머니가 시장에서 어물을 손질하고 있다. 장흥 회진장 풍경이다. ⓒ 이돈삼


▲ 장흥 회진장 풍경. 겉보기에 일반적인 재래시장 모습 그대로다. 안으로 들어가면 어물이 주된 상품이다. ⓒ 이돈삼


"옛날에는 여그서 배도 타고 생일도, 고금도를 드나들었어. 장이 생기기 전부터 바다에서 잡아온 고기하고 미역, 바지락 같은 것을 폴고 허는 저잣거리였제. 여그가."

장터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의 얼굴에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회진장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장흥의 오일장 중에서 가장 늦게 생겼다. 이렇게 장의 역사는 짧아도 장터 사람들의 기억 속엔 '이보다 더 좋은 장'은 없었다. 목포, 여수, 부산 뱃길이 있을 때만 해도 남부럽지 않았다. '유명호', '태안호' 등 큰 배가 들어와 정박하는 날이면 장터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뱃길이 인근 노력항으로 옮겨지면서 회진포구는 조용해졌다. 장터도 덩달아 활기를 잃어갔다. 그렇게 장터의 영화는 뱃길과 운명을 같이했다. 시장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허름한 여객선 터미널만이 옛 영화를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쩌것 봐바. 공사허고 있는 거 보이제. 5월이면 완공이 된다는디, 그 다음부터선 좋아지지 않겄어? 예전처럼 배가 많이 드나들고 사람들도 북적거릴 것이란 말여."

부둣가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의 기대가 애틋하기만 하다.

▲ 옛 영화를 간진하고 있는 회진항 여객선 터미널. 쇠락해진 장터를 증명이라도 하듯 허름한 모습으로 서 있다. ⓒ 이돈삼


▲ 회진포구엔 지금 새로운 부두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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