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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만족, 발로 뛰겠소" vs "지면 밥 없다"

[사진] 인천 용정초등학교 '봄 운동회' 한마당 속으로

등록|2012.05.02 16:49 수정|2012.05.02 16:50

▲ 5월 2일 오전9시부터 진행된 인천 용정초등학교 학생들의 봄 운동회 응원전 모습 ⓒ 이정민


언제부턴가 우리나라 계절이 여름과 겨울만 있는 듯한 착각이 들곤 합니다. 봄이 온 지 엊그제 같은데 요즘 날씨는 한여름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심지어 저녁 기운마저 너무 더워서 이불조차 덮고 자기가 민망할 정도이죠. 초여름도 없이 바로 '핫(hot)여름'이 온 것 같아 준비해 둔 늦봄 옷도 못 입게 생겼습니다. 그래도 꽃구경 하긴 딱 좋습니다.

솜사탕 노래를 혹시 아시나요?한창 불렀던 솜사탕 노래가 갑자기 생각이 납니다. "나뭇가지에 실처럼/날아든 솜사탕~꿀꺽!" "하얀눈처럼/희고도 깨끗한 솜사탕~꿀꺽!" ⓒ 이정민


5월 2일 이른 아침 사무실에 조용히 앉아 일을 시작할 무렵, 창문 밖 초등학교에서 들려오는 마이크 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매번 조회 때마다 쩌렁쩌렁 울려대는 중년 여선생님의 묵직한 목소리가 그다지 달갑지는 않았었는데 오늘은 다른 때와 달리 무척 부드럽고 상냥한 말투였지요. 아니나 다를까 창문을 열고 학교 쪽을 바라보니 휘황찬란한 만국기가 번쩍거리고 아이들이 노란색 체육복을 입고 운동장 한가운데 몰려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 봄 운동회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났습니다.

▲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 이정민


▲ 6인7각 경기. ⓒ 이정민


초등학교 운동회라.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아련한 추억과 정겨움이 물씬 풍겨나는 그 시절의 회상에 또 절로 웃음이 납니다. 지금 초등학생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희 '국민학교' 시절엔 참 재밌고 우스꽝스런 에피소드들이 참 많았던 것 같네요. 아직 30대 후반인 저도 그러한데 저보다 연배 높은 선배님들은 더하겠지요. '격세지감'이라 했듯 갑작스런 많은 변화로 '제3세대'가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잠시 저희 운동회 추억 속으로 들어가 보면,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라는 친구들의 함성소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평소엔 친구였지만 이날만큼은 선의의 경쟁자가 되어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중압감에 목이 쉬었던 그날의 기억이 또렷합니다. 또한 밀가루로 그려진 청백계주 트랙, 누구보다 예쁘게 보였던 응원단장 여자친구, 계주 뛰던 친구 엄마가 넘어져 울던 사연 등등 모든 게 정말 눈앞에 선해집니다.

그밖에 인간 탑 쌓기, 훌라후프 집단율동, 줄다리기 등 지금 생각하면 마치 북한의 매스게임과 비슷한 놀이들을 많이 했던 것으로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손 등에 찍어주던 1·2·3등 확인 도장, 점심이면 온 가족이 모여 김밥과 청량음료를 나눠 마셨던 모습, 학교 주변으로 몰려들었던 솜사탕 아저씨와 떡볶이 아줌마, 엄하기만 했던 선생님들이 넘어지고 울던 정겨운 현장들이 첫사랑의 떨림처럼 새롭게 다가옵니다.

▲ 엄마들도 모처럼 추억의 운동회 속으로 빠져들었다. ⓒ 이정민


▲ 이렇게 어린 아이도 열심히 뛰어 보겠다고 나옵니다^^ ⓒ 이정민


2일 오전 9시께, 소박하지만 아름답게 펼쳐졌던 용정초등학교 봄 운동회 또한 이런 추억의 선물을 다시 만끽하게 해주었습니다. 무척 더운 날씨 탓에 초등학교로 올라가는 계단이 힘들었지만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에 이내 미소가 번집니다.

초등학교 입구로 모여든 쥐포구이 아저씨, 솜사탕 할아버지, 아이스크림 할머니의 눈치 경쟁도 볼 만합니다.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엄마 아빠를 졸라 아이스크림 할머니에게로 몰립니다. 이래서 여름엔 아이스크림이 최고라는 말이 나오겠지요. 관중석에 앉아 있는 아이들도 손마다 일명 '쭈쭈바' 하나씩을 움켜쥐고 목마름을 해결합니다.

그리고 학년 대표 선수로 나온 아이들은 단체경기에서 이기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비록 앳되고 아직은 서툰 운동솜씨지만 그 열정과 표정만큼은 프로선수를 압도합니다. 그러다가도 친구와 함께하는 '2인1각' 경기에서는 함께 힘을 합쳐 웃으며 들어오는 모습이 천상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 그대로입니다.

▲ 뛰자. 뛰어. 열심히 뛰어. ⓒ 이정민


▲ 스승과 제자 간의 치열한 응원 경쟁?! ⓒ 이정민


친구와 장난도 치고, 때론 할머니에게 어리광도 부리는 동안 운동회의 하이라이트가 점점 다가옵니다. 엄마들끼리 경쟁하는 단체 100m 경주에서는 한 엄마가 운동장에 그대로 코를 박으면서 심지어 엉덩이까지 드러내고야 맙니다. 아이들은 이 장면을 보고 뒤로 넘어질 정도로 껄껄거리며 웃고 좋아합니다. 저는 솔직히 좀 민망했지만요. 엄마들도 모처럼 아이 덕분에 옛날 운동회를 생각하며 가슴 뿌듯해 했을 겁니다.

이어 선생님, 학부모, 학생들끼의 3자 간 경쟁이 펼쳐집니다. 바로 2인1각으로 들어오는 단체 경주였지요. 아이들은 또래 친구를 응원하고, 학부모들은 또래 엄마들을 응원하고, 선생님들은 또래 선생님들만 응원하는 기이한 장면이 벌어졌지요. 결과는 어땠을까요. 마지막 결승점에서 넘어진 선생님들 덕분에 학부모들에게 우승이 돌아갔습니다.

여러 경기가 펼쳐질 때마다 아이들의 응원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담임만족, 발로 뛰겠소", "지면 밥 없다" 등 선생님과 제자들의 눈치 빠른 응원구호가 배꼽을 쥐게 합니다. 그리고 옛 시절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영원한 응원도구인 숄(shawl) 형식의 반짝이 도구도 그 후광을 그대로 비추고 있었습니다.

▲ 운동회 만큼은 선생님들도 옛 시절 어린 학생 신분으로... ⓒ 이정민


▲ 저 응원 도구 많이 보지 않았나요 ⓒ 이정민


▲ 집단 계주 경기 전 몸풀기로 으샤으샤~ ⓒ 이정민


드디어 운동회가 선사하는 마지막 하이라이트인 집단 계주 경기. 유치원생부터 고학년생까지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드라마를 펼치는 동안 다들 초긴장의 상태를 유지합니다. 정말 엎치락뒤치락 승부를 이어가면서 결국 청팀의 승리로 모든 경기가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승리 팀은 승리 팀대로, 또 진 팀은 진 팀대로 선수를 격려하며 아름다운 마무리를 합니다.

어느 기사를 보니 요즘 봄 운동회가 오전으로만 마무리를 하고 식사는 급식이나 가족 단위로 따로 모여서 한다고 합니다. 저희 초등학교 운동회 시절만 하더라도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친구들까지 모여 심지어 술판까지 벌어지는 해프닝도 있었는데 참 많이 변했나봅니다. 물론 아이들 사정도 있고 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정겨움이 많이 사라진 건 아닐까 싶습니다.

▲ 오홋, 처음 출발 계주 주자로 나선 유치원생들의 눈빛이 여간 매서운 게 아닙니다. ⓒ 이정민


▲ 나는야 칼 루이스? 아니지... 미래의 우사인 볼트다! ⓒ 이정민


옛 시절의 운동회를 통해 교감했던 스승과 사제 간의 친밀감,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또래 친구와의 우정, 그리고 이웃들 간의 신나는 화합마당이 다시 마련됐으면 하는 마음을 새겨봅니다. 아마도 삭막하고 어려운 현실의 삶 속에서 공동체라는 유기조직으로 그마나 정을 교감하는 마당은 학교 운동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 와~ 우리가 이겼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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