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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 작업'으로 학교폭력 예방? 이건 비정상

[학생부장 일기 13] 늘어난 '잡무'... 교사들은 서류에 목매고 있다

등록|2012.05.06 11:47 수정|2012.08.24 16:14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들이 교직을 가장 선호한다지? 신분 보장되겠다, 쉬는 날 많겠다…. 이 세상에 선생만한 직업,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행복한 줄 알아."

며칠 전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 녀석이 술자리에서 푸념 섞인 말투로 건넨 말이다. 물론, 교사로서 미래세대를 길러낸다는 소명 의식이나 올곧게 성장한 제자가 스승을 찾는 등의 감동적인 보람 따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주당 고작 스무 시간 정도 수업만 하면 꼬박꼬박 월급 나오고, 퇴근 시간도 빠른 데다가 1년에 두 번 짧지 않은 방학마저 있으니 최고의 직업이라는 게다.

그의 말. 모두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억울하다. 스무 시간 수업이 꼭 스무 시간 노동으로 이해되는 것이,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하는 8시간 근무를 두고 퇴근 빠르다고 나무라듯 시샘하는 것 말이다. 마지막으로 방학이 직장인들의 휴가처럼 간주되는 것이 억울하다. 더욱이 나 같은 학생부장 입장에서는 '부러우면 1년만 바꿔서 일해보자'고 대들고 싶을 만큼 화가 나기도 한다.

'월급쟁이'가 된 교사들... 왜?

▲ 교사들을 무조건 두둔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이 자긍심을 잃고 시나브로 월급쟁이가 되가는 이유를 함께 고민하자는 이야기다. 영화 <완득이> 중 한 장면 ⓒ 유비유필름


여느 직장인들 안 그럴까마는, 40만 명가량 되는 전국 교사들을 동질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조금 과장하자면, 성향이든 능력이든 인품이든 교직처럼 스펙트럼이 넓은 직업은 없다. 매너리즘에 빠져 그저 '월급쟁이'로 살아가는 교사도 있지만, 성직자보다 더 고결하고 어느 시민단체 활동가보다 더 성실한 교사도 적지 않다.

법이 엄격해지고 사회가 살벌해지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착한 이웃들이 위축되듯, '우리나라 교사들은 다 똑같다'는 편견에 상처받는 사람은 정작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참다운 교사들이다. 아이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교사들까지도 숱한 여론의 뭇매를 맞는 것은 어느새 현실이 됐다.

최근 들어 학교폭력이 흉포화하고 아이들의 자살 등 극단적인 사건들이 연이어지면서, 교사에 대한 집단적 편견이 더욱 부정적인 방향으로 굳어지고 있다. 교직에 대한 자긍심은커녕 모르는 사람과 통성명할 때 교사라고 소개하는 것조차 주저하는 상황에 이른 것. 결국 자긍심과 소명의식 하나로 버틴 교사들마저도 끝내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다.

남 탓을 하자는 게 아니다. 어찌 됐건 가장 큰 책임을 느껴야 할 사람은 누가 뭐래도 교사이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교사들 스스로 그릇된 모습으로 자해하듯 편견을 확산시켜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전국 40만 교사들을 도매금으로 욕보인다고 해서 현실이 나아질까. 교사들을 무조건 신뢰하고 두둔하라는 게 아니라, 그들이 자긍심을 잃고 시나브로 '월급쟁이'가 돼 가는 이유를 함께 찾아보고 함께 고민하자는 것이다.

교사는 많아도 스승은 없다

학교 교육이 흔들리는 걸 빗대 '교사는 많아도 스승은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교직에 첫발을 내디딜 때부터 '월급쟁이'인 교사는 없다. 교대나 사범대에 무턱대고 진학했더라도 4년 동안 교직 과목을 공부하고 실습을 하다 보면 교사로서 소명 의식을 갖게 되는 건 인지상정이다. 설령 아니라 해도 교실에서 아이들의 해맑은 눈을 마주하다 보면 없던 소명 의식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교사들 태반이 교사다움을 잃어가고 있다. 불과 교직 생활 1~2년 만에 '갱년기'가 왔다고 헛헛하게 쓴웃음 짓는 젊은 교사들이 의외로 많다. 주변의 조언도 듣고 자극이 될 만한 각종 연수에도 참여해보지만, 대개의 교사들은 스스로 자질을 의심하고 자책하며 매너리즘에 빠져들기 일쑤다.

왜 그럴까. 교사들이 교육과는 별 상관없는 '일'에 치이기 때문이다. 무릇 교사라면 일과 중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한다. 교실에서 수업하고 운동장에서 함께 뛰놀면서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게 교사란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쌓이는 신뢰가 교육의 기반이며, 매너리즘에 젖어들지 않게 하는 항체다.

그런데 교사는 수업의 질이나 아이들과의 신뢰관계보다는 '업무 능력'으로 평가받는다. 정작 중요한 수업보다도, 흔히 '잡무'라 불리는 일을 처리하는 행정 능력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교장과 교감으로 승진하거나 장학사 등 전문직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인 셈이다. 계량화하기 쉬운 까닭이고, 수치로 제시되면 누구나 공정하다고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수당 8만 원에 직책은 13개... 나 교사 맞아?

▲ 13개 직책을 동시에 맡은 나... 아이들을 만날 시간이 사라졌다. 영화 <완득이> 중 한 장면. ⓒ 유비유필름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이들의 존경을 받는 교사는 절대 승진할 수 없다'는 말이 학교마다 돌고 있다. 이런 말들은 수업에 대한 교사의 열정을 희화화하는 등 교사들로 하여금 교육의 본령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뿐만 아니라 이런 말들이 자칫 아이들 귀에라도 들어간다면 아이들에게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주게 될 것이다. 폐해는 상상 이상이다.

내가 아직 철이 아직 덜 들어서일까. 나는 '잡무'라는 게 얼마나 교사를 병들게 하고 교육 자체를 황폐화시키는지를 최근에서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올해 학생부장으로 일하면서 얻게 된 뒤늦은 깨달음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학교에서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이른바 보직 교사들이 토로하는 공통된 하소연이 바로 잡무로 인한 과도한 스트레스다.

고백하건대, 그동안 배운 건 잡무의 처리 속도와 융통성(?)이고, 잃은 건 아이들과의 교감과 신뢰였다. 일에 치이다 보니 솔직히 수업을 준비할 여유는커녕 수업 들어갈 시간조차 없다. 다른 학교 학생부장과의 통화에서 "힘들어 죽을 지경"이라고 했더니, 그 선생은 "나는 죽을 시간도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 수업에 소홀해지다 보니, 아이들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올해 학교에서 맡게 된 '일'들을 수첩에 낙서하듯 적어봤다. 투표를 통해 선출된 직무도 있고 순번에 걸려 떠맡게 된 일도 있지만, 대개는 학생부장이기에 당연직처럼 담당해야 하는 것들이다. 급여라고 해봐야 매월 보직 교사 수당 8만 원이 전부지만, 책임질 일은 엄청나게 많다.

'학생부장,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폭대위) 간사, 학생선도위원회 간사, 학교폭력전담기구 간사, 학교폭력 담당교사, 학생인권교육 담당교사, 위기학생관리위원, 학교운영위원회 교사위원, 학교분쟁조정위원, 교원인사위원, 교육기자재선정위원, 학업성적관리위원, 교과(사회과)부장...'

무려 13가지다. 정작 '교사'라는 본연의 업무가 끼어들 틈조차 보이지 않는다.

면책용 서류에 목매는 교사들

주지하다시피 폭대위는 학교폭력 발생 시 소집해야 하는 외부인으로 구성된 법적 심의 의결 기구고, 학생선도위와 학교폭력전담기구는 경미한 학교폭력 사건을 비롯해 학교에서 발생한 온갖 소소한 일들을 처리하는 상설 기구다. 또, 위기학생관리위는 자살 충동이나 우울 등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학생들을 상시 관리, 상담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런가 하면 학교운영위와 학교분쟁조정위, 교원인사위 등은 학사일정과 교원 인사 등 학교운영 전반에 걸친 일들을 심의 의결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잡무를 줄인다는 차원에서 학교 내 위원회 수를 줄이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학교폭력이 사회적으로 이슈화하면서 되레 다소 늘었다. 그런데, 성격상 대부분이 학생부와 연관된다.

교내에 위원회가 한둘이 아니다 보니 솔직히 회의록 작성하고 보고하는 일만 해도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당연히 업무량은 늘어난다. 그리고 늘어난 업무량만큼 업무의 내용은 부실해진다. 필요하다는 장부라서 빠뜨리지 않고 기록을 남기고 갖춰놓긴 하지만, 그것이 아이들 교육에 진정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애당초 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도 교사들이 '서류 작업'에 목매단 까닭은 따로 있다. 행여나 사고가 터졌을 때 학교와 자신들에게 화가 직접적으로 미치지 않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면책용'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많은 교사들이 잡무에 시달리느라 아이들과 제대로 상담할 시간조차 없으면서도 '상담일지'만큼은 그럴듯하게 만들어 갖추고 있는 건 그 이유 때문이다.

학교폭력, 교사가 아이들과 함께 해야 해결 가능

▲ 아이들과의 호흡은 어느 것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교육 관료들의 정책은 현실을 바꿀 수 없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중 한 장면. ⓒ 터치스톤


비단 학교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거칠게 말하면 '눈 가리고 아웅'하는 일들이 아이들 앞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비교육적인 행태라 나무랄 수 있을지언정, 이를 어찌 교사들 탓이라 할 수 있을까. 교과부와 교육청 등 상급 관청과 학교는, '갑'과 '을'의 관계(굳이 따지자면)이니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교재 연구는 물론, 때때로 서점에 들러 한 달에 두어 권 정도는 책을 사서 챙겨 읽을 만큼 '교사다운' 생활을 영위했다(사람들은 이런 얘기조차 오해를 하는데, 교사로서 책을 읽는 건 쉬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수업 준비의 일환이다). 하지만, 그랬던 생활은 어느새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가 됐다.

학교에 자율성을 준다고 떠들기 전에 교사가 아이들 앞에서 자유롭게 소신과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다. 학교의 자율성은 학교'장'의 그것일 뿐, 일선 교사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교사로서의 역량이 온전히 발휘될 수 있도록 잡무를 줄여 아이들과 어우러질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허락해야 할 것이다.

교무실의 컴퓨터 책상 앞이 아니라 교실과 운동장에서 교사와 아이들과 만나는 게 진짜 교육이다. 일선 교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학교폭력이 이슈화하면서 온갖 것 다 보고하라는 잡무만 늘었다"고. 정부가 뭔가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고루한 방식으로 과연 학교폭력이 줄어들까.

현직 학생부장으로서 단언컨대, 턱도 없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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