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된 시를 정자에서 읽을 수만 있다면...
의성여행 (36) 단밀면 관수루
의성군 다인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가면 상주시로 들어간다. 낙동강을 한번 건너고, 다시 낙동강을 되돌아 건너서 관수루(觀水樓)를 보러 가는 길이다.
관수루는 단밀면의 끝자락인 상주시 접경의 낙동강변에 있다. 따라서 다인에서 출발하는 답사자가 의성군 안에서 길을 찾으려면 단북면, 안계면, 단밀면을 관통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쌍호리 3층석탑에서 안사면, 안계면, 단북면, 다인면을 모두 거쳐 대곡사로 가는 것과 같은 꼴이 된다. 그렇게 두 배 이상 시간이 걸리고, 다닌 길을 반복해서 답사하는 어리석은 여행자가 된다. 마땅히 다인면 소재지에서는 서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정을 이렇게 잡아야 하는 까닭이 또 하나 있다. 본래 경치는 멀리서 먼저 보고, 그 뒤에 가까이 가서 보아야 한다. 원경(遠景)인 숲부터 보고, 근경(近景)인 나무는 그 뒤에 보는 것이 자연의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관수정 역시 상주시 낙동면에서 강 너머로 그 전경(全景)부터 보고 나서 다리를 건너가 정자를 요모조모 살핀 다음, 비로소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아야 진정한 관수(觀水)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관수루 자체가 고려 초에 창건될 때에는 지금의 낙동강 북쪽이 아닌 이곳에 있었으니, 본래 자리부터 먼저 찾는 것이 시간의 흐름에도 맞는 일 아니겠는가.
맹자는 '流水之爲物也(유수지위물야) 不盈科不行(불영과불행)', 즉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야 앞으로 흘러간다"고 했다. 공자는 '知者樂水(지자요수) 仁者樂山(인자요산)', 즉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고 했다. 노자는 '上善若水(상선약수) 水善利萬物而不爭(수선이만물부쟁) 處衆人之所惡(처중인지소악) 故幾於道(고이어도)', 즉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고루 이롭게 하고서도 다투지 않는다. 그리고 뭇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기꺼이 처하니, 그런 까닭에 거의 도에 가깝다"고 했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觀水洗心(관수세심)'도 교훈으로 널리 알려진 말이다. "물을 보고 마음을 씻으라"는 뜻이다. 다인면 대곡사에서 일주문을 지나 범종루로 가는 작은 개울을 건널 때 다리에 '洗心橋(세심교)'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관수루는 그저 단순히 물(水)을 보는 (觀)정자가 아니다.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며 학문에 정진하는 자세를 배우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깨우쳐야 하는 곳이다. 절벽 위 높은 곳에 있어 휘굽어 흐르는 낙동강을 아래로 아득히 내려다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숱한 사람들이 끝없이 오가는 '살아 있는' 인간세상인 중요한 나루터를 굽어보는 곳에 세워진 정자였으니, 어찌 물을 물로만 보았을 것인가. 자연과 인간의 오묘한 이치를 생각하면서 강물을 바라보는 곳, 그곳이 바로 관수정인 것이다.
옛날, 관수루가 있는 이곳 단밀면 낙정리의 낙동강변은 대단한 나루였다. 1986년 9월 16일에 콘크리트 다리가 개통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뗏목배가 버스를 실어나르는 진기한 광경을 보려고 관광객이 찾아올 정도였다. 아직도 선창(船倉), 역마을(驛村) 등의 마을이름이 남아 지나간 역사를 증언한다.
상주시 낙동면 강 언덕에 서서, 흘러가는 강물과 관수루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강을 건너 정자에 오른다. 정자 아래에 세워진 안내문을 먼저 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도 그냥 양철로 된 안내판이 아니라 돌에 멋지게 새겨진 '중건 기념비'이다. 읽는 맛이 다른 곳의 안내판과는 겨룰 바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한자로 새겨져 있으므로 지금은 한글로 옮기고, 어려운 한자는 괄호 안에 설명을 넣어 뜻을 헤아리기 쉽게 만들어본다.
"낙동강의 본류(本流) 요소(要所)에 영호루(안동) 관수루 영남루(밀양)를 짓고 지류(支流) 남강(진주)에 촉석루를 세웠음은 먼 고려조의 역사(役事)였다. 오랜 옛날부터 선인들의 달관하는 풍류는 격조 높았음을 입증한다. 삼산이수(三山二水)가 모여드는 가경(佳景)에 교남(嶠南, 영남) 통행의 중추(中樞)가 되던 곳 낙동진(津)의 관수루는 시인 묵객(墨客)이 즐겨 찾았고 끊임없는 내왕객(來往客)이 쉬어 갔다.
창건 이래 상주 고을에서 다섯 차례의 수축사록(修築史錄)이 전하고 강서(江西)에서 유실되어 동안(東岸)으로 옮긴 것은 조선 초엽이었다. 고종 갑술년(1874년)의 수마(水魔)에 잃고 폐허로 내려오다가 작년(1990년)에 재건되니 114년만의 소생이요 오래 잃었던 풍운(風韻)을 새로 찾은 쾌거다. (이하 생략)"
관수루중건추진위원장 이중헌(李重憲)이 쓴 비문에는 양도학(梁道鶴)이라는 분이 "거금을 내어 건물 공사를 독담(獨擔)"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관수루 옆에는 '양도학 공적비'도 별도로 세워져 있다. 좋은 일을 한 사람의 이름을 이렇게 남기는 것이야말로 역사가의 임무이다.
관수루에 올라 하염없이 흘러가는 낙동강물을 바라본다. 옛날 선비들이 '학문의 길'과 '사람의 길'을 깊이 헤아리며 곰곰 생각에 잠겼을 곳이니 답사자도 최소한 그 시늉을 내어보아야 마땅하다. 푸른 강물 위로 관수루 뒤의 큰 소나무들이 싱싱한 솔잎과 줄기들을 힘차게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그야말로 시원한 한국화를 보는 느낌이다.
이곳에 서면 마음이 답답해지기도 한다. 흘러가는 강물과 휘영청 늘어진 소나무를 가로막으며 시커먼 콘크리트 구조물이 시커멓게 앞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4대강 개발'의 상징인 낙단보가 의성군과 상주시에 걸쳐 낙동강을 끊고 있다. 그것은 마치, 유유히 날던 푸른 새 한 마리가 흡사 목이 졸린 듯한 괴로운 모습으로 강물 위에 멈춰선 듯한 느낌을 준다. 이 낙단보, 공사를 마치자 마자 물이 새었다던데,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옛날 사람들은 관수루에 올라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자에 걸려 있는 편액(扁額)들을 본다. 김종직 등 기라성 같은 이름들이 보인다. 그 이름은 이미 아는 글자들인 덕분에 간신히 읽었다 하더라도, 하나같이 한시(漢詩)들인데다 글씨도 작고 꼬불꼬불한 까닭에 본문은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이제는 한글로 된 짧은 시도 이처럼 작은 액자에 넣어 걸어두면 좋지 않을까.
그런 뜻에서, '4대강 개발'의 짐짓 자작시를 한 편 지어 본다. 제목은 '관수루'. 물론 이런 수준의 시를 관수루에 걸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바다가 보이지는 않지만
관수루 아래로 흘러온 강은
흐르고 또 흘러 바다로 간다.
지나간 세월 큰 나룻터였던 이곳
저녁놀이 아름답기로 이름 높았지만
지금은 목이 졸린 푸른 새처럼
낙동강을 허리에 이고 누워 있다.
날이 저물어
어느덧 물결 위로 황혼이 깃들 시간,
놀란 듯 부랴부랴 길을 떠난다.
반달 같은 황혼이 나는 두렵다.
관수루는 단밀면의 끝자락인 상주시 접경의 낙동강변에 있다. 따라서 다인에서 출발하는 답사자가 의성군 안에서 길을 찾으려면 단북면, 안계면, 단밀면을 관통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쌍호리 3층석탑에서 안사면, 안계면, 단북면, 다인면을 모두 거쳐 대곡사로 가는 것과 같은 꼴이 된다. 그렇게 두 배 이상 시간이 걸리고, 다닌 길을 반복해서 답사하는 어리석은 여행자가 된다. 마땅히 다인면 소재지에서는 서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정을 이렇게 잡아야 하는 까닭이 또 하나 있다. 본래 경치는 멀리서 먼저 보고, 그 뒤에 가까이 가서 보아야 한다. 원경(遠景)인 숲부터 보고, 근경(近景)인 나무는 그 뒤에 보는 것이 자연의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관수정 역시 상주시 낙동면에서 강 너머로 그 전경(全景)부터 보고 나서 다리를 건너가 정자를 요모조모 살핀 다음, 비로소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아야 진정한 관수(觀水)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관수루 자체가 고려 초에 창건될 때에는 지금의 낙동강 북쪽이 아닌 이곳에 있었으니, 본래 자리부터 먼저 찾는 것이 시간의 흐름에도 맞는 일 아니겠는가.
▲ 상주시에서 의성군 단밀면 쪽으로, 낙동강 건너편 절벽 위에 앉아있는 관수루를 바라본 풍경 ⓒ 정만진
맹자는 '流水之爲物也(유수지위물야) 不盈科不行(불영과불행)', 즉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야 앞으로 흘러간다"고 했다. 공자는 '知者樂水(지자요수) 仁者樂山(인자요산)', 즉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고 했다. 노자는 '上善若水(상선약수) 水善利萬物而不爭(수선이만물부쟁) 處衆人之所惡(처중인지소악) 故幾於道(고이어도)', 즉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고루 이롭게 하고서도 다투지 않는다. 그리고 뭇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기꺼이 처하니, 그런 까닭에 거의 도에 가깝다"고 했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觀水洗心(관수세심)'도 교훈으로 널리 알려진 말이다. "물을 보고 마음을 씻으라"는 뜻이다. 다인면 대곡사에서 일주문을 지나 범종루로 가는 작은 개울을 건널 때 다리에 '洗心橋(세심교)'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 관수루 오른쪽으로 낙단교가 보인다. 낙단교는 의성군 단밀면에서 상주시로 넘어가는 낙동강의 다리이다. ⓒ 정만진
관수루는 그저 단순히 물(水)을 보는 (觀)정자가 아니다.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며 학문에 정진하는 자세를 배우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깨우쳐야 하는 곳이다. 절벽 위 높은 곳에 있어 휘굽어 흐르는 낙동강을 아래로 아득히 내려다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숱한 사람들이 끝없이 오가는 '살아 있는' 인간세상인 중요한 나루터를 굽어보는 곳에 세워진 정자였으니, 어찌 물을 물로만 보았을 것인가. 자연과 인간의 오묘한 이치를 생각하면서 강물을 바라보는 곳, 그곳이 바로 관수정인 것이다.
옛날, 관수루가 있는 이곳 단밀면 낙정리의 낙동강변은 대단한 나루였다. 1986년 9월 16일에 콘크리트 다리가 개통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뗏목배가 버스를 실어나르는 진기한 광경을 보려고 관광객이 찾아올 정도였다. 아직도 선창(船倉), 역마을(驛村) 등의 마을이름이 남아 지나간 역사를 증언한다.
▲ 관수루 왼쪽으로 낙단보가 보이는 풍경 ⓒ 정만진
상주시 낙동면 강 언덕에 서서, 흘러가는 강물과 관수루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강을 건너 정자에 오른다. 정자 아래에 세워진 안내문을 먼저 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도 그냥 양철로 된 안내판이 아니라 돌에 멋지게 새겨진 '중건 기념비'이다. 읽는 맛이 다른 곳의 안내판과는 겨룰 바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한자로 새겨져 있으므로 지금은 한글로 옮기고, 어려운 한자는 괄호 안에 설명을 넣어 뜻을 헤아리기 쉽게 만들어본다.
"낙동강의 본류(本流) 요소(要所)에 영호루(안동) 관수루 영남루(밀양)를 짓고 지류(支流) 남강(진주)에 촉석루를 세웠음은 먼 고려조의 역사(役事)였다. 오랜 옛날부터 선인들의 달관하는 풍류는 격조 높았음을 입증한다. 삼산이수(三山二水)가 모여드는 가경(佳景)에 교남(嶠南, 영남) 통행의 중추(中樞)가 되던 곳 낙동진(津)의 관수루는 시인 묵객(墨客)이 즐겨 찾았고 끊임없는 내왕객(來往客)이 쉬어 갔다.
창건 이래 상주 고을에서 다섯 차례의 수축사록(修築史錄)이 전하고 강서(江西)에서 유실되어 동안(東岸)으로 옮긴 것은 조선 초엽이었다. 고종 갑술년(1874년)의 수마(水魔)에 잃고 폐허로 내려오다가 작년(1990년)에 재건되니 114년만의 소생이요 오래 잃었던 풍운(風韻)을 새로 찾은 쾌거다. (이하 생략)"
관수루중건추진위원장 이중헌(李重憲)이 쓴 비문에는 양도학(梁道鶴)이라는 분이 "거금을 내어 건물 공사를 독담(獨擔)"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관수루 옆에는 '양도학 공적비'도 별도로 세워져 있다. 좋은 일을 한 사람의 이름을 이렇게 남기는 것이야말로 역사가의 임무이다.
▲ 관수루에서 내려다본 낙동강 ⓒ 정만진
관수루에 올라 하염없이 흘러가는 낙동강물을 바라본다. 옛날 선비들이 '학문의 길'과 '사람의 길'을 깊이 헤아리며 곰곰 생각에 잠겼을 곳이니 답사자도 최소한 그 시늉을 내어보아야 마땅하다. 푸른 강물 위로 관수루 뒤의 큰 소나무들이 싱싱한 솔잎과 줄기들을 힘차게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그야말로 시원한 한국화를 보는 느낌이다.
이곳에 서면 마음이 답답해지기도 한다. 흘러가는 강물과 휘영청 늘어진 소나무를 가로막으며 시커먼 콘크리트 구조물이 시커멓게 앞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4대강 개발'의 상징인 낙단보가 의성군과 상주시에 걸쳐 낙동강을 끊고 있다. 그것은 마치, 유유히 날던 푸른 새 한 마리가 흡사 목이 졸린 듯한 괴로운 모습으로 강물 위에 멈춰선 듯한 느낌을 준다. 이 낙단보, 공사를 마치자 마자 물이 새었다던데,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옛날 사람들은 관수루에 올라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자에 걸려 있는 편액(扁額)들을 본다. 김종직 등 기라성 같은 이름들이 보인다. 그 이름은 이미 아는 글자들인 덕분에 간신히 읽었다 하더라도, 하나같이 한시(漢詩)들인데다 글씨도 작고 꼬불꼬불한 까닭에 본문은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이제는 한글로 된 짧은 시도 이처럼 작은 액자에 넣어 걸어두면 좋지 않을까.
그런 뜻에서, '4대강 개발'의 짐짓 자작시를 한 편 지어 본다. 제목은 '관수루'. 물론 이런 수준의 시를 관수루에 걸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바다가 보이지는 않지만
관수루 아래로 흘러온 강은
흐르고 또 흘러 바다로 간다.
지나간 세월 큰 나룻터였던 이곳
저녁놀이 아름답기로 이름 높았지만
지금은 목이 졸린 푸른 새처럼
낙동강을 허리에 이고 누워 있다.
날이 저물어
어느덧 물결 위로 황혼이 깃들 시간,
놀란 듯 부랴부랴 길을 떠난다.
반달 같은 황혼이 나는 두렵다.
▲ 낙동강 최대의 나루터였던 관수루 아래에는 '4대강 개발'의 상징인 낙단보가 건설되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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