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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25년만에 '우리들의 문집' 만들다

연세대 국문과 83학번들의 아주 특별한 재상봉

등록|2012.05.11 17:23 수정|2012.05.11 21:36

▲ 연세 국문83 졸업 25주년 재상봉 기념 문집 <우리들의 비밀번호>. ⓒ 권우성


"국문 83 친구들아, 안녕? 이 한마디를 하기까지 25년이나 걸렸네. 그동안 건강하게 잘들 살고 계셨나요? 나 스스로 동기들과 격조하게 살아서 다른 공간, 다른 좌표에 아무런 관련 없이 흩어져서 사는 줄 알았는데 우리는 역시 한 울타리, 같은 함수 속에 존재하고 있었네. 과 동기라는 투명 그물이 지난 세월의 수많은 변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하나로 모이게 했구나."

올해 마흔 아홉인 박연희씨는 대학을 졸업한 지 25년 만에 친구들에게 인사했다. 이 편지는 연세대 83학번 국문과 동기들이 5월 10일 펴낸 문집에 실렸다. 문집 이름은 <8312 우리들의 비밀번호>. 8312는 '1983년 대학 1학년으로 시작된 인연이 2012년까지 이어졌다'는  의미다. 212쪽 분량의 이 문집엔 파릇파릇한 대학 신입생 43명이 중년의 아줌마 아저씨로 변화하기까지 살아온 이야기가 오롯이 담겼다.  

전은미씨는 이 문집 참여가 "내 삶을 거울에 비춰보기"였다고 했다. 

"재상봉 25주년이 나에게 거울을 내민다. 좀 보라구. 너의 모습이 어떤지. 겁났다. 내 삶이 성공하지 않은 듯해서. 두려웠다. 내 삶이 너무 초라한 듯해서. 뭐 하나 내세울 게 없어. 친구들은 괜찮다고 했다. 하나 둘 어서 들어오라고. 참 다정한 목소리였다. 알고 보니 그것은 거울이 아니었고, 추억의 둥지였다."

5월 12일 연세대에서 열리는 졸업 25주년 기념 재상봉 행사에 앞서 그들은 문집이란 사랑방에서 먼저 만났다. 처음 몇 명이 만나 재상봉 의미를 국문과답게 살리자며 문집의견을 냈지만 걱정도 많았다. 고등학교 교사이면서 편집장 역할을 맡은 이미혜씨는 "자기 일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새로운 공동 작업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끊어졌던 네트워크를 복원하는 과정이어서 뿌듯하다"고 했다.

편집위원 문예경씨는 "우리 과 정원이 70명인데 7명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했어요, 카페에서도 보고 우리 아파트에서도 모이고, 그러다보니 한 권의 책이 되었어요"라고 말했다.

처음 스무 명 정도의 참여를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문집은 성공한 셈이다. 한두 명이 먼저 임시로 마련한 온라인 카페에 문집에 실을 글을 올리자 반응이 뜨거웠다. "참 열심히 살았구나" "대학다닐 땐 네가 가난한 줄 몰랐는데" 등의 댓글은 "그럼 나도 써볼까"로 이어졌다. 

문집에 실린 글들은 국문과 출신들답게 에세이부터 시, 시조, 서평, 논문 등 다양하다. 유동걸씨는 권두시에서 이렇게 지난 세월을 노래한다.

출발은 같았으나
길은
같지 않았다.
누구는 군대로, 누구는 광고로, 언론으로
학교로, 외국으로, 가정으로
그리고 두 친구는 먼 강 건너
돌아올 수 없는 평화의 땅으로 승천했다.

운동과 수배
취업과 실업
연애와 실연
결혼과 출산
일상과 탈주 속에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 연세 국문83 졸업 25주년 재상봉 기념 문집 <우리들의 비밀번호>. ⓒ 권우성


문집엔 대학시절 추억이 담긴 이야기들이 많지만 친구들이어도 나누기 껄끄러운 사는 이야기와 인생에 대한 고뇌가 담긴 글들도 적지 않다. 휴대폰 매장을 운영하는 허승욱씨는 "친구들, 내가 화상 전화 걸면 꼭 받기 바라, 난 너희가 항상 보고 싶거든"이라며 자신이 운영하는 매장을 소개하기도 했다. 캐나다에서 사는 김원선씨의 안부 글도 문집에 실렸다.

아픔, 연민, 추억을 나누는 우리는 친구다

문집은 스무 살의 앳된 그들의 사진으로 시작된다. 북한산에 MT 가서 해방춤 추는 장면, 당시 유행하던 덥수룩한 머리스타일과 컬링 파마로 한껏 모양 내 찍은 단체 사진.

이미 저 세상으로 멀리 가버린 친구들을 추모하며 쓴 글도 있다. 김연숙씨는 짝궁 김상훈씨를 추억하며 새침한 서울 깍쟁이 여학생과 무뚝뚝한 경상도 남학생의 이야기를 다뤘다.

"어느날 상훈이가 일일 찻집 티켓을 사서 준 적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받는 것에 익숙지 않았던 나는 어쩌다가 바로 다음에 비슷한 것을 상훈이에게 주게 되었어. 그랬더니 상훈이 왈 '니는 인생을 그리 살면 안 된다!' 하면서 주절주절 충고를 하더구나. (중략) 잔소리 해주던 상훈이가 그립다."

정현주씨는 이 세상을 떠난 절친 정화숙씨와의 가슴 저릿한 이야기를 풀었다.

"스물일곱 6월이었을 거다. 그날이었다. 때 늦은 나의 첫 연애는 끝났고, 화숙이의 첫 연애는 그 애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나에겐 다시 끄집어내기에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다."

문집에는 자신이 비주류임을 당당히 고백하는 글도 있고, 그동안 병치레하며 힘겨웠던 삶을 공유한 친구도 있다. 사랑이 끝나 다른 사랑을 기다리노라고 고백한 친구도 있고, 장애가 있는 아들을 멋지게 소개한 글도 있다.

문집 출판을 담당한 <디자인 상상>의 이영상씨는 "아이들을 키우고 직장에 다니고 있는 중년의 사람들이 모여 이렇게 문집을 만든다는 것은 대단한 열정이죠"라고 동참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5월 12일 연세대 졸업 25주년 기념 재상봉 행사에서 문집의 필진 40여 명은 직접 만난다. 박연희씨가 문집에서 "비록 먼 길로 많이 돌아오긴 했지만 5월이면 너희들의 흰머리와 주름살을 반경 20cm안에서 HD급으로 보기를 소망"한 바로 그 날이 온다.

이들 중 김연숙씨를 포함한 몇 명은 그 재상봉 날을 하루 앞둔 11일 대학 당시 그들을 가르쳤던 7명의 은사를 찾았다. 꽃다발, 카드, 한과상자와 함께 이 문집을 드렸다. 은퇴한 옛 스승들은 이 문집을 건네받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졸업 25년만에 문집을 만들었다니, 매우 드문 일이야 이건, 역시 국문과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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