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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조선일보> 사장 집에서 춤 춘 사연

[정운현의 역사 에세이-35] 가장 비싼 집, 방상훈 집에 얽힌 과거

등록|2012.05.14 18:54 수정|2012.05.15 12:14
최근 서울시는 서울시내 개별주택 37만 가구의 가격을 분석한 결과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있는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의 저택이 가장 비싸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3천여 평 규모의 방 사장의 저택은 작년보다 공시가격이 50.5%(43억 3천만 원) 오른 129억 원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정도라면 '작은 궁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더 놀라운 것은 지난해까지 1위를 지켰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용산구 이태원동 저택을 제쳤다는 점입니다.

서울 동작구 흑석2동 국립현충원과 중앙대학교 사이에 위치한 방상훈 사장의 저택은 높은 벽과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겉에서 보면 마치 거대한 성(城)을 연상시킵니다. 거대한 철문 앞에는 경비실이 있고, 큰길가에 붙어있는 5m 정도 높이의 벽은 주위를 압도하고도 남습니다. 언젠가 <한겨레> 취재진이 이 저택을 취재하면서 걸어서 한 바퀴를 돌아봤는데 무려 12분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과연 '밤의 대통령'이 살던 저택답다고나 할까요? 

이 저택은 대체 어느 정도 규모일까요? 그간 보도된 바에 따르면, 전체 면적 3748평(1만2390㎡), 대지 1539.4평(5089㎡)에 연건평 221평이며, 임야가 2208.5평(7301㎡)이라고 합니다. 규모로만 치면 청와대 관저(건평 444평, 앞마당 477.6평)와 재벌총수들의 집을 앞서는 규모입니다. 최근 이 저택은 '임야'가 '대지'로 지목(地目)이 변경되면서 땅값이 무려 다섯 배 가량 뛰어 앉은 자리에서 36억 원이 올랐다고 합니다. 최근 이 일대가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됐지만 방 사장 저택만 제외돼 특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가장 비싼 방상훈 자택, '밤의 대통령'이 살던 곳



이 저택은 방 사장의 부친인 방일영 <조선일보> 고문(2003년 작고)이 살다가 방 사장에게 물려준 것입니다. 방 고문 생존 당시에도 건물만 방 고문 앞으로 돼 있었고, 임야와 대지는 아들과 손자 명의로 돼 있었습니다. 방상훈 사장이 대지 1067평(3522㎡), 방 사장의 아들인 준오(조선일보 미래전략팀장)씨가 임야 2212평(7301㎡)과 대지 475평(1567㎡)을 각각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준오씨는 14살 때인 지난 88년 9월 소유권을 이전받은 걸로 나와 있습니다. 

방씨 일가의 흑석동 저택 얘기를 꺼낸 건 건물 규모 얘기나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간 이 집을 찾았던 몇몇 대통령들의 얘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방일영 고문은 생존 시 '밤의 대통령'으로 불렸습니다. 이는 지난 92년 10월 방 고문(당시는 회장) 칠순 축하연 석상에서 신동호 당시 <스포츠조선> 사장이 사원대표 자격으로 축사를 하면서 "낮의 대통령은 그동안 여러분이 계셨지만 밤의 대통령은 오로지 회장님 한 분이셨다"고 말한 데서 비롯됐습니다. '밤의 대통령'이라는 말은 청와대의 주인인 실제 대통령에 견줄만한 실력자라는 뜻도 있지만 기생 다루는데 솜씨가 탁월했던 방일영의 '밤 문화'를 빗댄 것이기도 합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방일영은 흑석동 자택에서 한강다리를 넘던 박정희 일파의 쿠데타군이 쏜 총소리를 듣고 5·16이 터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놀란 그는 황급히 태평로 신문사로 달려갔습니다. '군사쿠데타'라는 미증유의 사태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집권 초기 박정희는 언론에 대한 불신감이 매우 컸고 그래서 적대감도 강했습니다. 1964년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낮의 대통령' 가운데 이 집을 방문한 사람은 박정희와 김영삼 두 사람으로 박정희는 재임 중에, 김영삼은 92년 12월 대통령 당선 다음날 초대를 받았습니다. 방일영의 양조부인 계초 방응모가 한국전쟁 중에 납북된 이후 <조선일보>는 방일영이 실질적으로 이끌어 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방일영은 유력 언론사의 사주로서 이승만, 박정희는 물론 역대 대통령들과도 교류해왔습니다. 방일영은 그들 가운데서도 박정희와 남다른 친분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권언유착' 의혹을 사기도 했습니다.

박정희와 방일영. 이 두 사람이 언제, 어떤 인연으로 친해졌는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방일영의 자서전 <격랑 60년-방일영과 조선일보>(방일영문화재단, 1999)에 따르면,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가 몇 차례 신문사 사주들과 술자리를 갖는 과정에서 서로 가까워졌을 거라는 게 주위사람들의 추측입니다. 말하자면 평소 술자리를 좋아하던 두 사람이 몇 차례 만나 술을 마시다가 '술꾼'끼리 서로 의기투합했을 거란 얘깁니다. 

박정희가 방일영의 흑석동 집을 찾은 것도 바로 그런 친분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때는 제5대 대통령선거를 보름여 앞둔 1963년 9월 28일. 이날 박정희는 서울고등학교 교정(현 새문안길 서울역사박물관 자리)에서 첫 선거유세를 했습니다. 1962년 12월 26일 개정헌법에 따라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중심제로 바꾼 후 처음 치르는 직선제 대통령선거로 후보는 민주공화당의 박정희를 비롯해 민정당의 윤보선, 자유민주당의 송요찬 등 7명이 출마했습니다.

첫 유세 마친 박정희, 방일영 저택서 춤을 추다

▲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이 소유한 서울 동작구 흑석동의 저택. 나무 숲 사이로 지붕만 약간 보인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박정희가 서울고교 교정에서 유세를 한 바로 그날 송요찬도 종로국민(초등)학교에서 유세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당시 송요찬은 살인혐의 등으로 구속돼 있어서 녹음방송을 통해 유세를 했습니다. 당일자 <동아일보> 호외에 따르면, 박정희 유세장에는 4만 명, 송요찬 유세장에 3만 명 정도가 모였다고 합니다. 송요찬은 박정희의 군 선배로 5·16후에는 내각수반을 지내는 등 한 때 박정희와 가까웠으나 나중에 '반혁명사건'에 연루돼 결국 둘 사이가 틀어졌습니다.

유세 경험이 없는 '정치초년생' 박정희로서는 첫 유세가 적잖은 부담이었습니다. 게다가 윤보선 등 야당진영에서 그의 '좌익전력'을 걸고넘어지자 이를 해명하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박정희는 이날 유세에서 "5·16직전 용공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나라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참다못해 일어선 나를 그 당시의 실정(失政)에 책임져야할 구정치인들이 '위험한 사람'이니 '공산주의에 가깝다'느니 하고 있으니 이는 적반하장도 유만부득이다"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참고로, 1948년 10월에 발생한 '여순사건' 당시 육군소령이던 박정희는 군부 내 좌익분자로 지목돼 그해 11월초 특무대장 김창룡에게 체포돼 군법에 회부되었습니다. 이후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 중이던 박정희는 원용덕·이응준·백선엽 등 만군(滿軍) 선배들의 도움으로 재심에서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었고, 다시 이듬해 4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습니다.)

박정희가 첫 유세를 치른 그날 오후 7시경, 박정희는 대구사범 동기생이자 당시 문화방송 사장으로 있던 황용주와 육군참모총장 민기식을 대동하고 흑석동 방일영 집을 찾았습니다. 이들은 냉면으로 저녁식사를 마친 후 의례히 술자리가 벌어졌습니다. 제법 분위기가 무르익자 기생 몇 명을 불러 동석시켜 좌중의 흥을 돋궜습니다. 동석했던 황용주(2001년 작고)는 그날의 술자리 풍경을 이렇게 증언한 바 있습니다.

"첫 입후보 연설을 마치고 그날 밤 방일영 회장의 흑석동 자택에서 연(宴)이 벌어졌다. 주석(酒席)에서도 좀처럼 둘레를 벗어나지 않았던 대통령(박정희)이었는데 그날 밤은 자제를 하지 않았다. 만당(滿堂)에 흥이 무르익게 되자 그는 '선거가 끝나면 이런 기회도 없겠지' 하면서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를 건반을 두들기면서 불러댔다. 그래도 직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미꾸라지 잡기'라는 일본의 민속무(民俗舞)를 멋들어지게 추었다. 대사(大事)를 앞두고 청하는 사람도 없었는데 그가 스스로 좋아하는 노래와 춤을 추게 된 것은 방 회장이란 천하의 주도(酒徒, 술꾼)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날 '흑석동 술자리'가 나중에 문제가 됐습니다. 통금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너댓 시간 질펀하게 논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날 술자리 얘기가 육영수 여사 귀에 들어간 것입니다. 선거를 앞둔 사람이 신문사 사장 집에 가서 기생들을 불러다 놀았다고 하니 육 여사로서는 답답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며칠 뒤 육 여사는 청와대 비서들을 불러 모아서는 "다시는 흑석동 방 사장 집에 대통령을 가지 않도록 하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이 일로 청와대에서 냉면 소리만 나와도 방일영 이름이 거론됐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친분은 이후로도 계속됐습니다. 1960년대 후반 박정희가 부산지방 시찰을 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공식 일정을 마치고 해운대 관광호텔에 숙소를 잡았는데 당시 비서실장 이후락이 그날 저녁 박정희 술상대로 방일영을 차출한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분위기가 무르익은 후 복도를 지키던 경호원들이 아연 긴장하게 됐습니다. 방일영이 박정희에게 "대통령 형님, 쭈욱 드십시오!"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각하'로 시작된 대통령 호칭이 어느새 '대통령 형님'으로 바뀐 것입니다. 둘은 그 정도로 죽이 잘 맞았다고 합니다.

<조선일보>의 코리아나호텔은 박정희의 선물

서울 태평로 대로변에 자리 잡고 있는 코리아나호텔은 방일영의 둘째아들인 방용훈(60)이 사장으로 있는데 이 호텔은 1974년에 건립됐습니다. 언론사인 조선일보사가 어떻게 호텔을 소유하게 됐을까요? 결론부터 앞세우면 이는 박정희가 방일영에게 준 특혜 선물인 셈입니다. 60년대 중반, 한번은 청와대에서 장기영 부총리,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 등이 참석한 오찬모임에 방일영이 초대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박정희가 "거, 조선일보 사옥이 태평로 거리에 불쑥 튀어나와 있어서 볼 적마다 눈에 거슬리는데..."라며 느닷없이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박정희가 졸지에 내뱉은 말에 방일영은 미처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있던 차에 다시 박정희가 말을 이었습니다. "그것 헐어버리고 다시 지으시오." 당시 도로 쪽으로 튀어나와 있던 조선일보 사옥이 도시계획선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옥을 헐고 다시 지으라니. 그래서 방일영이 "그건 아는데, 지금 형편으론 신문사 사정이 곤란해서..."라며 얼버무리자 박정희가 말을 받았습니다. "1차로 차관을 돌려 줄 테니 그 대신 좀 뒤로 물려서 다시 짓도록 하시오." 당시 일반 금리가 연리 26%였던 걸 감안하면 차관 금리는 연리 7~8%였으니 이는 '대통령 형님'이 '아우'에게 큰 선물을 하나 안겨준 셈입니다.

"가끔은 방일영 회장이 부러울 때가 있어. 외국 가고 싶을 때 언제나 나갈 수 있고, 놀고 싶으면 마음대로 놀 수 있고, 또 정부를 때리고 싶을 땐 마음껏 때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나도 대통령 그만둔 다음에는 신문사 사장이나 해볼까?" 

언젠가 박정희는 이런 얘기를 했다고 방일영의 자서전 <격랑 60년-방일영과 조선일보> 243쪽에는 기록돼 있습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천하제일의 권세를 가졌던 '낮의 대통령'도 '밤의 대통령'이 부러울 때가 더러 있었던 모양입니다. 박정희 말마따나 신문사 사주는 4, 5년마다 한 번씩 선거를 치르는 법도 없고, 마음에 안들면 '낮의 대통령'도 자사 지면을 통해 마음껏 두들길 수 있으니 박정희가 부러워했을 법도 해 보입니다. 게다가 자리는 물론 부(富)까지도 세습이 가능하니 왕조시대나 하등 다를 게 없는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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