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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치솟는 물가... 절약이 최고의 약

최호 장군 순국 415주기 추모제에 다녀와서

등록|2012.05.16 11:29 수정|2012.05.16 11:29

▲ 물기를 흠뻑 머금은 군산시 나포면 십자들녘 보리밭과 오성산(227m) 자락 ⓒ 조종안




여름을 재촉하는 부슬비가 성글게 내리는 지난 14일, 아침을 먹고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임진왜란(1592~1598)의 명장 충원공(忠元公) 최호(崔湖: 1536~1597) 장군 순국 415주기 시민추모제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아내가 운전하는 승용차는 비안개 가득한 들녘을 좌우로 가르며 달렸다. 새벽부터 끊임없이 내리는 부슬비는 모내기철을 앞두고 논갈이해놓은 십자들녘을 촉촉이 적셨다. 물기를 흠뻑 머금은 보리밭과 풀숲도 짙푸른 색깔로 싱그럽게 다가왔다.

▲ 추모제에 참석하는 시민들. 젊은층이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 조종안



시민추모제는 전북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 자리한 충의사(忠義祠: 전라북도 기념물 제32호)에서 열렸다. 충의사는 최 호 장군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祠堂)으로 장군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행사장 도착시각은 오전 10시 20분. 궂은 날씨에도 주차장은 차량으로 만원이었다.

빈자리를 어렵게 찾아 차를 주차하고 아내와 잠시 떨어져 있어야 했다. 추모제 취재까지 함께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해서 아내는 임시로 설치한 무대에서 식전행사로 치러지는 민속공연을 관람하고, 나는 제례를 봉행하는 사당으로 올라갔다.

경건하고 엄숙하게 치러진 최호 장군 추모제

▲ 초헌관이 무릎을 꿇고 술잔을 올리고 있다. ⓒ 조종안



제1부 제례는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 30여 분 동안 진행됐다. 집례의 봉제선언에 이어 참례자 전원 재배, 전폐례(초헌관), 초헌례(초헌관), 예축(축관), 아헌례(아헌관), 종헌례(종헌관), 음복례(초헌관), 참례자 재배, 종제 선언(집례) 순으로 치러졌다.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은 물론 집사들도 절차에 따라 엄숙하고 경건하게 예를 올렸다. 진지한 표정으로 움직이는 참례자들을 보면서 '위패에 절하는 유교식 제례는 형식이다'며 추모제와 충혼제 등 전통의식 자체를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떠오르면서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행사를 주최한 군산문화원 이복웅 원장은 추모식에서 "오늘은 선조 30년(1597) 칠천량 해전에서 62세 나이로 순국하신 최호 장군의 415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라며 "장군의 숭고한 호국충절의 뜻을 계승하고 우리 고장의 자긍심을 심는 자리를 마련하는데 협조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고 인사했다.

문동신 군산 시장은 추모사에서 "충원공 최호 장군은 우리 지역의 자랑스러운 인물로 국가가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놓였을 때 왜군의 주력함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장렬히 순국하셨다"며 "추모제를 통해 시민의 정체성 확립과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 최 호 장군 12대 후손 최문식(77) 유족 대표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조종안



최호 장군 12대 후손 최문식(77) 유족 대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20년 되는 흑룡의 해여서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며 "각계각층에서 관심을 둬주셔서 최호 장군님 추모제가 갈수록 성대하게 치러지고 있어 말할 수 없이 기쁘다"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최호 장군 시민추모제는 경주 최(崔)씨 후손들조차 400여 년을 모르고 지내오다가 김양균(87) 전 군산문화원장, 남정근(83) 전 옥구문화원장 등 뜻있는 향토사학자들과 시민들의 노력으로 시작됐다. 1990년 9월 4일(음 7월 16일) 제1회를 시작으로 해마다 개최해오고 있다.

헌화에 이어 임귀성 예도원 원장의 진혼풀이가 끝나고 9585부대 대대원들이 조총을 발사할 때는 이곳저곳에서 "하이고 놀래라!" 소리가 들리기도. 발산초등학교 합창단 어린이들의 추모가 합창과 35사단 군악대의 진혼곡 연주는 행사장 분위기를 더욱 엄숙하게 했다.   

하늘로 치솟는 물가... 절약이 최고의 약

▲ 추모식이 끝나고 나온 도시락, 비오는 날 천막에서 먹는 도시락은 별미였다. ⓒ 조종안



오전 11시 40분, 사회자의 폐회선언에 이어 참석자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주었다. 무대에서는 본국무예단의 한국 전통무예(조선 시대) 시연과 산조무, 살풀이, 가야금병창, 민요 등 전통 민속공연이 펼쳐졌다. 우중에 도시락을 먹으며 민속공연을 감상하는 것도 운치가 있어 좋았다.

설득 끝에 아내와 함께 지역 문화행사에 참석하기는 최호 장군 추모제가 두 번째였다. 반찬값과 기름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으면서 생활 패턴도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중 외식이 줄고, 나들이도 가까운 장소에서 즐기는 방식으로 바뀐 게 가장 큰 변화다.

'물가가 너무 오르니 잡아달라'고 외치며 거리로 나가 일인시위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머리를 짜며 고민했지만, 최고의 약은 절약밖에 없었다. 기름값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니까 아내 쉬는 날 드라이브는커녕 왕복 30km 남짓 되는 시내도 태워다 달라고 부탁하기가 겁난다. 

쓰면 쓸수록 모자라는 게 돈으로, 한 달 월급 2천만 원을 받아도 쓰기로 하면 부족하고, 2백만 원을 받아도 안 쓰면 남는 법이다. 그래서 이날도 추모식이 끝나면 참석자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주고 민속공연도 관람할 수 있어 가까운 들녘으로 나들이하는 마음으로 참석했던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지방자치 부활(1991) 이후 시도 단위별로 다양한 행사가 개최되고 있음에도 지역 주민들 반응은 만족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시락을 먹으면서도 앞으로는 동네에서 열리는 작은 행사라도 되도록 아내와 함께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기 흥건한 들녘을 내려다보며 아내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오후 1시쯤 돌아왔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지인들을 만나 반가웠고, 보람도 느꼈다. 심호흡하면서 맑은 공기를 마신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으나 미래를 책임질 중고생과 30~40대 층이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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