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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3시간 고민 끝에 국회의원 됐다...왜냐면? 100만 해고 대란설에도 정치가 왜 저모양이지"

[인터뷰] 은수미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당선자

등록|2012.05.17 11:04 수정|2012.05.17 11:15

▲ 은수미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당선자. ⓒ 권우성


"아니, 그런데, 통합진보당 어떻게 됐어요?"

은수미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당선자를 만난 시각은 지난 15일 오후 3시였다. 서울 여의도 국회 후생관에서 만난 그는 기자와 인사를 나누자마자 제일 먼저 통합진보당 사태 속보를 듣고 싶은 눈치였다. 온 국민의 눈과 귀가 통합진보당에 집중된 상태고, 강기갑 위원장을 필두로 통합진보당 혁신 비대위가 출범했으며, 그 뒤의 움직임이 궁금한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 아니, 민주당 국회의원이 통합진보당에 웬 관심이 그렇게 많으세요?
"정책연대도 해야 하고, 환경노동위원회에서 비정규직 문제로 함께해야 하는 이슈도 많은데 과연 같이 할 수 있는 건가, 해도 되나, 어떻게 되는 건가, 이것저것 궁금하지 않을 수 없지요."

꽤 진지하게 받았다. 얼굴이 불그레해질 정도로. 은수미 당선자는 그런 사람이다. 꽤 명랑하고 잘 웃지만, 문제에 직면하면 아주 진지해지고 심각하다. 자유와 정의를 갈망하며 지식인을 꿈꿨던 여대생은 '인간의 존엄'이 무너지는 현장에서 사회운동을 택했고, 고된 징역살이로 6년의 형기를 마쳤다. 그의 이름 앞엔 언제나 '빨갱이' 주홍글씨가 붙어다녔다.

모진 고문, 무너지는 존엄, 폐소공포증과 고소공포증. 사회적 치유는 언감생심이었고, 스스로 몸을 일으키는 풀처럼 다시 서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있었다. 감옥에 함께 수감돼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며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이데올로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다. "집시법 위반"이라고 하니, "한국에도 집시가 있냐"고 물었던 순박한 사람들이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엔 또렷이 남아 있다.

6년간의 징역살이 이후 사회에 곧장 적응이 어려웠던 그는 살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고 사회학 박사를 땄으며, 한국노동연구원에서 노동정책을 만들다 국회의원이 됐다. 배지를 얻고난 뒤 뭐가 달라졌느냐고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담담했다.

"변화가 없는데요?"

아주 무덤덤한 표정으로 던진 외마디에 갑자기 폭소가 터진 건 전혀 가식이 없는 솔직한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는 '노동전문가'로 국회의원이 됐고,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평소 "정치가 왜 저 모양이지?" 했던 은 당선자는 "도저히 개인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필요한 게 국가와 정부인데 그 정부와 국가가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고 있을 때 정책연구자로서 정말 고민이 많았고, 그때 정치를 직면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비정규직 문제에 관한 한 거의 조건반사적이다. 이른 아침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유리 닦는 아주머니를 만나면 "하루 몇 장이나 닦으세요? 힘들지 않으세요?"라며 구수하게 말을 던지고 주거니받거니 하다보면 '현장에 익숙한' 정책연구자가 된다고 했다.

그가 왜 이렇게 낮은 자리에 익숙한 것일까 궁금했는데 그의 말 속에 답이 있었다.

"강릉교도소에서 있었던 기간 동안 정말 많은 사연들을 접했어요. 제가 살아왔던 것과 전혀 다른 인생역정들. 많이 알게 됐지요."

고문도 많이 당했다. 그는 안기부에서 고문을 당할 때 "성폭력 같은 비슷한 위협 속에서 너무나 겁이 났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자신이 그토록 인간의 존엄을 강조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민주주의가 발전되면 '이건 아니야'하는 선이 있게 마련이고 그러면 그렇게 고문하라고 지시하지 못한다"며 "그런 상식이 없으면 어디선가는 그런 일이 벌어지게 돼 있다"고 말했다.

▲ 은수미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당선자. ⓒ 권우성


다음은 은수미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당선자의 말이다.

"국회의원 제안에 딱 3시간 고민... 그냥 뛰어들었다"

- 사노맹 활동가, 노동연구원 박사, 국회의원. 당선 뒤 삶에서 가장 달라진 것은 뭔가.
"2주 전쯤 국회의원에 등록했다. 노동 패러다임을 바꾸겠다는 가치나 비전, 정책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을 정확히 부여해야 한다는 생각도 변화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그 권리가 국민에게 보장돼야 한다는 것. 권리보장 액션플랜, 이제 그런 걸 좀 실행하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뿐이다."

- 노무현 대통령 3주기 추모 심포지엄에서 일자리 정책에 대해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는 권리다'. 헌법 제1조, 32조, 33조, 34조. 국가는 국민들에게 괜찮은 일자리와 적정임금을 보장해야 한다. 사회보장에 관한 국가의 의무도 있다. 정말 우리는 '중심도 녹는 사회'다. 중심은 일자리다. 반 토막이 났을 정도다. 일자리의 상향이동을 촉진해야 하는데 그것도 못한다. 밥상 위의 밥공기가 늘 5개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린 밥그릇을 6개도, 또 7개도 만들 수 있다. 다만, 여섯 번째 밥그릇을 누구에게 먼저 줄 것인가, 그건 공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남 잘사는 것에 대해 질투할 생각은 없다. 남의 밥을 빼앗아 먹을 생각도 없다. 우리의 비전을 갖고 싶은 거지, 남의 비전을 빼앗을 생각도 없다."

- 일자리는 왜 그렇게 계속 줄어드는 추세인가.
"인간을 위해 성장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성장의 시계가 돼버렸다.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지만 지난 20~30년간 전 세계적으로 그렇게 됐다. 사람을 위해 돈이 필요한 건대, 돈 때문에 사람이 죽어야 하는 사회가 됐다. 사람을 위한 성장이냐, 성장을 위한 사람이냐. 우리는 이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일자리 창출이 아니라 이제는 '일자리 혁명'이다. 성장을 하면 허드레 일자리만 늘어난다. 따라서 이제 우리에겐 다른 경로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가치를 제시해야 한다. 전체적으로, 나는 권리 문제라고 본다."

- 그래서 정치를 하게 된 건가. 액션플랜을 만들 생각으로?
"그건 아니다. 한국노동연구원이야말로 액션플랜을 만드는 곳이다. 대학교수와 다르다. 정책연구자는 관료-노조 등까지 포괄하는 거버넌스까지를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명박 정부 때 그게 막혔다. 정말 우울할 정도로. DJ-노무현 정부 때는 노동연구원이 브레인집단이었다. 노동정책을 중시하는 비전과 가치를 가진 정부와 코드가 잘 맞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노동정책을 경시하는 가치와 비전을 가진 정부와는 거리가 멀다. 이명박 정부는 거리두기만 한 게 아니라 아예 망치려고 했다. 그래도 직접 정치할 생각은 없었다."

- 그런데 왜 하게 됐나.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제안에 그저 '예스' 했을 뿐이다. 딱 3시간 고민했다. 내가 가장 신뢰하는 연구자, 친구 6명에게 전화했고, 모두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해서 하기로 했다. 내 개인의 판단이 멈췄던 세 시간이다. 욕심 아니니 그냥 걸어 가보자 했다. 이 판단이 틀린 거라면 내가 책임지면 된다. 그냥 뛰어든 거다."

- 학생운동, 노동운동 했던 것처럼 그냥 뛰어들었다는 것인가.
"정치가 왜 저 모양이지? 100만 해고 대란설이 나오고,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잘못된 정책들이 난무할 때 정말 회의했다. 국가나 정부가 저러면 안 되는데 늘 그런 생각이었다. 국가와 정부는 정말 어려운 사람들에게 필요한데, 개인의 힘으로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게 정부고 국가인데 그런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작 힘없는 개인을 위해 국가가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고 있을 때 정책연구자로서 정말 고민이 많았다. 그렇게 고민이 깊어지던 순간, 정치를 직면하게 된 거다."

- 학생운동도 그렇게 우발적으로 시작하게 됐나.
"대학교 1학년 때였다. 도서관을 지나가다가 6층에서 누가 떨어지는 걸 봤다. 시위 주동자가 발을 헛디뎌 떨어졌다. 사람이 건물에서 떨어졌으면 당연히 가봐야하는데, 전경들은 거기에 대고 최루탄을 쐈다. 너무 무서웠다. 정신없이 도망을 쳤다. 그때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생각했다. 나는 지식인이 되려고 대학에 갔다. 자유와 정의를 갈망했다. 그런 내가 그 현장 앞에서 도망을 가더라. 6개월 정도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리고 나서, 학생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선배를 찾아가 '저도 하겠습니다' 했다. 그게 1학년 2학기, 9월이었다. 그때 내 생각은, '내 가슴에 검정 리본을 달자'였다."

▲ 은수미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당선자. ⓒ 권우성


-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활동도 그 맥락에서 시작하게 된 건가.
"인간의 존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기계적 평등보다 다른 만큼 인정받기를 원했다. 안기부에서 고문을 받을 때, 나를 12시간씩 고문하면 잠깐 동안 고문관들도 쉰다. 쉴 때 그들은 아이와 집 얘기를 했다. 아주 거리낌 없이. 날 인간으로 안 본 거다. 고문하는 당사자가 인간으로 보이면 고문 못한다. 고문을 당할 때도 느꼈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수모를 겪으며 산다. 평생 자존감을 잃고 절망하고. 내가 고문 당할 때, 가축인지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로 그렇게 존엄을 말살했다. 인간사회에서 모두가 다 똑같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각자의 존엄함을 누릴 권리가 있다. 지금은 그걸 복지국가라고 부르지만, 80년대에는 그 개념이 사회주의였던 게다."

- 문제는 권리라는 화두를 내걸게 된 이유는 뭔가.
"1인 1표가 모두의 존엄을 보장하지 않는다. 나는 '1인 1표가 아니라 1원 1표'라고 생각한다. 선거일이 휴일이지만 일당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은 투표하기 어렵다. 그런 사람이 굉장히 많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또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투표권을 행사하기 힘들다. 아파트촌은 투표하기 좋게 동선이 짜여져 있지만, 다세대 주택가는 투표소를 찾아가야 한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정규직은 소리를 낼 수 있지만 비정규직이 소리 낼 수 있을까? 우리나라는 철저하게 '1원 1표'다. 비정규직도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냥 항상 눈이 간다. 아침 일찍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타면 유리 닦는 아주머니가 눈에 보인다. 그럼 묻는다. 하루에 몇 개 닦으세요? 힘드시죠? 너무 잘 얘기해 주신다. 나한테 무슨 직업병인지는 모르겠으나 꼭 그분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분들의 한숨, 현장이 익숙하다."

"감옥에서 보낸 6년, 내 인생에 큰 영향"

- 감옥에서 6년 지낸 것이 영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감옥에서 워낙 많이 아팠다. 안기부에 끌려갔을 때부터 형기를 마치고 출옥할 때까지 폐렴, 후두염 등 병을 달고 살았다. 나는 창문이 없는 독방에서 내내 격리돼 있었다. 그렇다고 혼거방이 더 좋은 것도 아니다. 5평 남짓에 20~30명이 자니까 사람이 미워지게 된다. 지금은 좀 나아졌겠지만, 그땐 열악했다. 사람들이 죄가 밉지 사람이 밉냐, 그러는데 실제 교도소에 가면 사람이 밉다. 5평에 스무명이 자면 칼잠을 잔다. 그래서 교도소에 온 사람들은 인과응보라고 생각한다. 감옥에 있을 때 여러 사람들과 친해져서 나중엔 항소이유서, 진술서도 써주고 그랬다. 너무 딱한 사정인데 국선 변호사는 안 오지, 그럴 때 도왔다. 코치도 했다. 절대 판사님 앞에서 말씀 격하게 하지 마세요, 이렇게. 그때 온갖 사연을 다 들었다."

- 지금도 기억나는 사연이 있나.
"남편을 죽인 여자가 있었다. 대개 여자가 살인죄로 들어오면 직계 존속이거나 가족을 죽인 경우가 많다. 한국은 묘한 가부장 문화가 결합돼 있어서 사람 죽인 것을 용서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왜 그가 사람을 죽이게 됐는지 그 과정을 알게 된다. 스물여덟의 여자였는데, 나랑 또래였지만 인생역정이 완전히 달랐다. 나는 정말 부잣집에서 태어나 행복하게 잘 자랐고 나름 서울대를 다녔지만, 그는 열여섯에 팔리다시피 시집을 갔고 여차여차해 남편을 죽였고 감옥에 온 게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너무 맘이 아팠다. 그때 강릉교도소에서 이분이 1심에서 사형 선고 받고, 2심 때 공주 감호소로 갔는데, 그 뒤론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 또 다른 사연도 있나.
"중학생 아이들이 가출을 해서 혼숙하다 본드를 흡입해 교도소에 왔는데 이 미성년자들을 어디에 넣을 곳이 없었다. 그래서 교도관들이 내 방에 둘을 넣어서 함께 두 달 남짓 지냈다. 정말 순진한 여중생들이었다. 그들의 사연도 억장이 무너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얘네들이 교도소 밖을 나간들 받아줄 사회적 품이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교도소에서도 이들을 받을 곳이 없이 그냥 일반인과 함께 수용한 거다. 그밖에 사기죄지만 경제사범들. 아, 그중 슈퍼마켓에서 500원짜리 뭐 하나 훔쳤다가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 그분들의 이야기는 정말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 그분들이 은 당선자의 신분을 알고 뭐라 하던가.
"내가 집시법 위반으로 들어왔다고 하니까, 첫 번째 반응이 이거였다. 한국에도 집시가 있어요? 하하하.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면, 사실 이데올로기라는 것 별 거 아니다. 나중에 그러더라.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었어? 하하. <조선일보>가 나에 대해 쓰는 그런 얘기들, 그건 정말 지나친 과포장이다. 만나보면 정말 많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 감옥에서 상당한 치유를 하고 출옥한 셈인가?
"독방에 있으니까 나중에는 혼잣말도 하고 진짜 입에 거미줄 치는 줄 알았다. 스스로 뭔가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게 심리학 공부였다. 그런데 교도소 나온 뒤에 진짜 힘들었다. 1년6개월이 악몽이었다. 고소공포증에 폐소공포증.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무섭고 자신이 없었다. 이상한 행동도 하고. 밤마다 가위에 눌리고, 똑같은 상징을 보고. 내가 왜 이러는지 설명이 안 됐다. 그래서 학교에 간 거다. 공부를 하려고 간 게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 간 거다. 사회 속으로 곧장 뛰어들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나름대로 그곳에서 치유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게다. 내가 성격이 굉장히 낙천적이고 명랑했는데 진짜 많이 힘들었다."

- 사노맹 사건에 대해 정보공개청구를 해보고 싶다고 했는데.
"사노맹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아직도 그때의 이야기를 서로 나눠본 적이 없다. 너무 가슴 아프고 끔찍한 기억이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이런 끔찍한 외상을 겪은 사람들이 치유의 과정을 겪어본 일이 없다. 아마 과거의 기억을 별로 원하지 않아서 정보공개청구도 안 해본 것 같다. 지금은 이 정도로 객관화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진짜 차마 다 얘기할 수 없는 지독할 꼴들을 많이 봤다."

- 어떤 꼴이 그토록 지독했나.
"안기부의 고문 방법이 있다. 내가 가장 믿었던 동료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거두절미하고 딱 내 이름을 대는 걸. 충격이 아주 크다. 또 누군가가 진술서를 쓰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필경 안기부는 내가 무너지는 꼴도 타인에게 보여줬을 것이다. 사람은 매우 약한 존재인데 그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보여준다. 이건 굉장히 잔인한 짓이다. 그런 과정까지 겪었기 때문에 내가 용서가 안 됐다. 실은 내가 묵비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 은수미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당선자. ⓒ 권우성

- 왜 못 썼나.
"성폭력 같은 비슷한 위협 속에서 너무나 겁이 났다. 이런 거다. 완벽히 밀폐된 방에 술 먹은 고문 수사관 몇이 한꺼번에 건들건들 거리면서 들어온다. 그럼 딱 질린다. 그리고 성폭행 비슷한 위협 속에서 무너지는 과정을 낱낱이 기억하도록 만든다. 내가 그토록 인간의 존엄을 강조하는 이유는, 민주주의가 발전되면 '이건 아니야'하는 선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게 고문하라고 지시하지 못한다. 그건 상식이 아니니까. 그런데 그런 상식이 없으면 어디선가 그런 일이 벌어진다."

-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이제라도 그 고문관들 색출해 벌할 생각 없나. 국회의원도 됐는데.
"고문 수사관은 대개 직업적이다. 명령을 받고 이행하는. 자기 직업이 사람 고문하는 것. 최소한 그런 직업은 없어야 하지 않겠나. 나를 고문했던 수사관들은 대개 젊고 특채로 들어온 하급 수사관들이었다."

"쌍용차 사태, 사회적 치유 중요"

- 통합진보당 사태가 연일 신문에 도배되고 있다. 취재를 해보면 진보정당이 노동현장과 멀어졌다는 평가도 있다. 왜 그럴까.
"내 박사학위 논문 얘기를 이래서 꼭 하게 된다. 하하. 나의 질문은 이런 거다. 외국은 노동조합이 가장 강력할 때 진보정당이 결성되고 그 뒤 10년 정도면 제1야당이 된다. 또 어떤 형태로든 교감이 형성된다. 한국은 노동조합이 약할 때 진보정당이 생겼고 상당히 괴리돼 있다. 노동자 집단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가운데 심각한 노동 양극화가 됐다. 노동집단이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제도정당이 만들어지니 괴리가 커지는 거다. 여기서 이 집단(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이 어떤 식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는가가 중요하다. 그럼 기존의 정당들이 그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안 들린다. 새누리당은 자기 지지기반에게 굉장히 익숙한 정당이지만, 민주당은 자기 지지기반에게 낯설다."

- 쌍용차 비정규직 문제가 풀리지 않고 있다. 19대 국회에서 해법을 내놓을 수 있을까.
"쌍용은 좀 특별한 문제다. 우선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건 정리해고를 맘대로 하고 아웃소싱을 대체할 수 있도록 해놔서 그렇다. 그걸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쌍용차 문제로 계속 사람이 죽는다. 왜 죽나. 이유가 뭐야? 사람들이 자기 목숨을 끊을 정도로 좌절하고 절망하는 까닭, 그 원인 규명부터 무급휴직자의 생활지원, 복직문제까지 다 해결돼야 한다. 저로서는 최선을 다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타결책이 있는 건지, 굉장히 구체적으로 잘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상외로 그동안 진상조사도 제대로 잘 안 됐다. 제대로 잘 들여다보고 책임을 규명하고 국민적 동의를 얻어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쌍용차의 노동자들은 80년 광주 때처럼 무슨 폭도처럼 됐다. 그분들도 치유가 필요하다고 보나.
"쌍용차 문제도 치유를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사회적으로 인정해주는 것도 필요하다. 자살자와 가족, 그 광경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에게 사회적 치유가 되도록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야 자존감을 세울 수 있다. 나는 운이 좋아서 치유했지만 여전히 한국사회는 나를 빨갱이로 인식한다. 전혀 그게 아닌 데도 말이다. 사람들이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하는데, 아픈 만큼 무너진다. 그걸 인정하자.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덜 무너지고 덜 아프게 할 것인지, 민주주의와 시스템, 노동의 권리를 만들자."

-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서두를 수 있다고 했다. 가능한 일인가.
"기재부 같은 곳의 내부지침을 바꿔야 한다. 청년 일자리 늘린다면서 계속 인턴 늘리지 말고 공기업에서 사람 뽑을 때 정규직으로 청년 뽑아야 한다. 관행과 제도를 바꾸는 문제지 입법적 문제가 아니다. 마음먹으면 못할 게 없다. 이건 정부 의지다. 4대강 땅도 파는데 고작 사람 하나 채용을 못하겠나? 그럼 한국은 선진국 못 된다."

- 저임금 구조개선이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금세 해결될 수 있는 과제일까.
"경제민주화가 결합돼야 한다. 상품가격은 이윤 지대 임금으로 구성되는데 이중 임금비중이 계속 떨어졌다. 그래서 있는 데서 계속 나눠먹기 하다 보니 저임금이 훨씬 많아진다. 임금비중을 높이려면 재벌들이 다 갖고 가는 문제, 수수료 높은 문제, 중소상인들 죽는 문제, 다 해결돼야 한다. 중소기업에서 일자리를 늘리고 임금이 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시장에서 정의를 구현하려면 재벌 대기업문제의 개혁이 필요하다.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아시아의 용이 될 것인지, 아시아의 이무기가 될 것인지."

- 나의 소명은 누군가를 날아오르게 하는 일이라고 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어릴 때부터 남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했다. 감정이입이 잘 되는 성격이라서. 후후. 나는 늘 내가 사회운동을 한 것에 대해 후회가 없다고 말했지만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은 건대, 그건 뭐냐면, 내가 사회운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 같이 일했던 조직원들에게도. 내가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서른다섯에 감옥을 나오면서 지금까지도 가장 뼈 아팠던 것은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했구나 하는 점이다. 각자 고민하고 좌절하도록 그냥 뒀다. 운동이 무너질 때. 나는 젊은 친구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행복한 젊은이들이 결국 대한민국의 리더가 될 것이다. 그렇게 한국에 미래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 축복 속에 우리가 대대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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