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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항은 대한제국 결정으로 개항됐다"

군산대 김종수 교수가 전하는 '군산 개항' 당시 시대상황

등록|2012.05.17 13:42 수정|2012.05.22 11:30

▲ ‘군산학’ 두 번째 강의가 열리고 있는 군산시립도서관 5층 교양문화실 ⓒ 조종안


지난 화요일(15일) 오후 7시 군산시립도서관 5층 교양문화실에서 열린 '群山學'(군산학 : 군산을 제대로 이해하기) 두 번째 강좌에서 군산대학교 김종수 교수는 "군산 개항은 일제 강압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통설은 결과만을 보고 내린 결과론적 해석"이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군산 시민과 외지인은 물론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 중에도 군산항은 일제의 강압으로 개항한 것으로 믿는 분이 있어 안타깝다"며 "국내외적으로 소용돌이에 휩싸이던 구한말 시대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핀 후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제의 강요로 맺어진 강화도조약(1876) 체결 이후 조선은 정치, 경제,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문제점이 발생한다. 특히 일본군이 출병했던 동학농민혁명(1894), 청일전쟁(1894)에서의 일본 승리,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 등은 조선의 국운이 다했음을 암시하고 있어 더욱 안타깝게 한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정부는 1895년 5월 26일 군산, 마산, 성진항 개항을 다수결로 결정하고 고종(1852~1919)의 재가를 받는다. 이에 따라 동학군의 서울 진출을 차단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군산을 개항했다는 설도 내려온다. 동학 혁명군에 대한 작전차원이라는 것이다. 당시 옥구 나포에서 일본군이 동학군 협력자를 교수형에 처했다는 기록이 신빙성을 더한다. (이복웅 군산문화원장 전언)

대한제국이 군산 개항을 결정한 이유 세 가지 이유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러시아공사관에서 1년 남짓 거처하다가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원구단(園丘團)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자주독립 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하는데, 김 교수는 당시 정부가 독자적으로 군산 개항을 결정한 이유를 다음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는 제국주의 열강 간의 세력 균형 정책의 하나로, 당시 고종황제는 청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대규모 '조차지'(租借地) 획득 움직임의 조선 파급을 우려했다 한다. 그 때문에 고종은 선수를 쳐서 항만을 개방하고 그곳을 1국의 독점이 아닌 '각국 공동 거류지'(각국 공동 조계지)로 함으로써 견제 메커니즘을 만들려 했다는 것. 

둘째는 독립협회 계열 인사들의 자유무역 주장이다. 당시 <독립신문>은 군산 개항의 이로움 다섯 가지를 열거했는데, ▲ 외국 물건이 들어와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고려하여 살 터이니 해보다 이익이 많다. ▲ 백성이 쓰고 남은 물건을 수출하여 수입을 올린다. ▲ 외국 자본이 들어오면 일자리가 많이 생길 것이다. ▲ 만일 국가가 잘못될 때 스스로 개항하는 것이 청국처럼 강제로 개항 당하는 것보다 낫다. ▲ 흉년이 들었을 때 곡물 수입 편리함 등이다.

셋째는 대한제국 정부의 어려운 재정과 해관(세관) 총 세무사 브라운의 영향력도 크게 작용했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어 개항장 확대에 따른 관세 수입 증가에 큰 관심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브라운의 개항 권고는 관세 수입 증가와 러시아 세력 저지라는 두 가지 목표에서 제기되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군산 개항은 당시 정부가 열강 간의 세력 균형을 통해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고, 자유무역을 통해 경제발전을 꾀하며 관세수입 증진으로 국가재정을 충실히 하려고 단행했는데 결과는 기대와 정반대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개항 이후 쌀의 대외 수출이 심화하였고, 조선 상인이 몰락했으며 일본인의 토지 침탈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이것은 국내 산업을 보호하지 않고, 제국주의 세력에 대해 충분한 대비를 하지 않은 채 개방화 정책을 취한 결과였다."라고 당시 상황을 분석했다.

▲ 식민지 근대화론을 설명하는 군산대 김종수 교수 ⓒ 조종안



"지금은 민족의 미래를 심각하게 고민할 때"

개항 이후 군산은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수탈의 전진기지 기능을 하였고, 자본주의 상품의 유입 항으로 변모하면서 식민지 정책의 거점 지역으로 성장하였다. 따라서 군산의 성장에는 가난한 백성의 고통이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통계에 의하면 강화도조약(1876) 체결 당시 조선에 거주하는 일인은 54명으로 공관에 근무하는 가족들이었다. 그러나 1883년에는 4000명으로, 군산이 개항하던 해(1899)에는 15068명으로 늘어난다. 개항당시 군산의 일인 인구는 77명(20가구)으로 나와 있으나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올해(2012)로 군산은 개항 113주년을 맞는다. 그러나 지금의 국제적 상황은 113년 전과 달라진 게 별로 없다. 오히려 더욱 치열한 무역전쟁, 자본전쟁이 전개되고 있으며 각 나라와 FTA가 추진되는 등 개방 압력은 더욱 거세게 밀어닥치고 있다.

김종수 교수는 "자주적으로 군산을 개항한 대한제국은 1910년 '국권상실'(경술국치)이라는 민족적 비극을 겪는다"며 "오늘 우리는 세계화, 개방화 시대를 맞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민족의 미래를 심각하게 고민할 때"라며 강의를 마쳤다.

지난 4월 16일~4월 23일까지 군산시민을 대상으로 수강생 50명을 모집해서 시작된 '군산학 강좌'는 두 번의 현장탐방을 통해 고군산군도와 군산지역의 역사장소를 확인하고, 군산의 자랑거리를 수강자가 직접 찾아보는 참여 토론식 프로그램도 함께 진행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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