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처녀 바람날까봐 절벽을 부수어버렸다고?
[의성여행 (40) 안계면 일대] '안계'에 있는 향교를 왜 '비안'향교라 부를까
▲ 안계면 답사지도(1) 대제지 유허비, 안계평야 (2) 개천지, 선정비 (3) 봉성서당 (4) 비안향교 (5) 선돌, 부흥대, 관조대 ⓒ 정만진
28번 국도를 타고 안계면 소재지 중심가로 들어서면 구천면으로 가는 923번 지방도로가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집들이 사라지면서 좌우로 작은 길이 붙는 사거리가 나온다. 복잡한 안계면 중심지가 언제였나 싶게, 넓고 시원한 들판이 눈앞에 시원하다. 이 들판이 지리 교과서에도 나오는 '안계 평야'이다.
평야 안의 넓은 도로로 들어서지 않고 오른쪽 좁은 길에 잠깐 비켜선 채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를 맞아본다. 바람은 단밀면의 만경산이나 혹은 구천면의 청화산에서 시작하여 위천을 넘어 이곳까지 온 것들이다. 물론 단북면과 단밀면 사이를 흐르면서 위천의 물들이 일으켜낸 강바람일 수도 있다.
▲ 안계평야.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이 평야는 경상북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들판이다. 따라서 이미 삼한 시대에 4대 저수지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만도 하다. ⓒ 정만진
정면을 보면, 저 멀리 들판 너머로 산맥의 줄기가 가로로 길게 하늘에 걸쳐 있다. 산줄기는 남서 양쪽에 불쑥 솟은 두 개의 기세등등한 봉우리와, 볼에 살이 빠진 듯한 모양으로 쏙 내려앉은 중간 부분으로이루어져 있다. 낮은 곳은 구천면 조성지(못池)에서 선산군 도개면으로 넘어가는 갈현이다. 갈현 왼쪽이 700m 청화산이고, 오른쪽은 499m 만경산이다. 두 산 모두 정상에 오른 사람들에게, 경상북도에서 가장 넓은 들판인 안계평야의 전경을 잘 보여준다.
안계평야에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물을 대주는 두 '은인'이 있었다. 봉양면에서 흘러와 구천면, 안계면, 단밀면, 단북면을 두루 가로지르는 위천이 그 첫 번째 고마우신 분이다. 그리고 대제지(大堤池)라는 아주 큰 호수. 하지만 삼한 시대 때부터 이곳에 있었다는 대제지는 지금 볼 수 없다.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단북면 소재지 앞에 이르는 대제지가 만약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참으로 '인기 절정'일 텐데 정말 아쉬운 일이다. 다만 큰 못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리는 비석만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 대제지 유허비 뒤로 안계고등학교 담장이 보인다. ⓒ 정만진
'대제지 유허비'는 오른쪽으로 난 좁은 길을 조금 들어서면, 단북면의 땅인 평야와 저 멀리 단밀면의 만경산을 바라보며 길가에 외로이 서 있다. 안계고등학교 담장 아래에 세워져 있는 유허비의 '해설'을, 대부분 한자로 적혀 있지만 이해하기 쉽게 바꾸어가며 읽어본다.
여기 서쪽 넓은 들판은 삼한 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알려지는 대제지(大堤池)의 옛터이다.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 상주 공검지, 제천 의림지와 더불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 중의 하나이다. 이 못은 진한 12개국 중의 하나인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東國)이 이 지방에 있었다는 근거가 되기도 하고, '단밀'의 이름이 바뀌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못은 오랜 옛날부터 단밀현의 동쪽 끝에 있었다. 본래 미기(彌基)마을 위에 있었으므로 미기못이라 불렀다. 그 후 이 못은 세 차례에 걸쳐 작게 고쳐 지었다. 식민지 시대 중반쯤에는 못의 동쪽 1/3가량을 단북면에서 논으로 만들었고, 나머지도 광복 직전 개천지(開天池)를 다시 쌓을 때 수몰민들에게 본래의 땅 대신에 줄 대토를 마련하기 위해 없어졌다. 유서 깊은 못을 헐어버렸던 것이다.
동서남으로 길쭉한 네모꼴을 이루었던 못둑은 동산 끝에서 5호 농로를 따라 이어나가는 서쪽 편이 가장 높았고, 중앙 배수로의 북쪽으로 거의 평행하는 남쪽 편과 1호 농로를 따라 있던 동쪽 편의 제방은 차차 낮게 둘러 쌓았으며, 북쪽 편은 지형 따라 제방이 있다가 없다가 하였다. 1964년 경지 정리 때에는 마지막까지 남았던 서쪽 편의 제방 흔적마저 밀려나고 말았다.
연꽃이 만발하고 정월 보름날 밤에는 용갈이를 하여 흉년과 풍년을 점치던 신비한 영험이 있던 이 못을, 잊지 않고 영원히 유적으로 되새겨 우리나라 농경문화 시설의 원종(源宗)으로 밝혀 기념하고자 이 비를 세워둔다.
1987년 11월 10일
의성농지개량조합장 韓東善 적고
李重憲 쓰다
▲ 부흥대의 절경안계평야를 만든 주인은 낙동강의 지류인 위천이다. 사진은 위천의 물줄기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인 부흥대의 절경. 부흥대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경치가 뛰어난 이곳에 문인묵객들이 모여 시[賦]를 읊으며 흥(흥)겹게 놀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 정만진
안계의 대표 유적지는 안계평야이다.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우리 민족에게 농사를 짓는 넓은 땅보다 더 대단한 유산을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안계, 단밀, 단북 일대 사람들이 삼한 시대 때부터 나라를 세웠고, 신라 시대에도 '작은 서울'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너른 들판을 소유한 덕분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안계평야에 와서 '대제지 유허비'를 보고, 비석 아래에 새겨져 있는 글을 읽는 것은 이곳 답사에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과정이다.
그리고 평야에 물을 댄 위천을 둘러보아야 하고, 손가락에 꼽을 만한 저수지들도 꼭 살펴보아야 한다. 단밀면에서 단북면으로 넘어올 때 그 위천, 안계평야에서 구천면 소재지로 넘어가는 구천교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그 위천, 세심히 살펴보고 사진도 찍어야 한다. 단밀 만경산과 구천 청화산에서 안계평야와 위천의 아름다움을 한껏 내려다보며 즐겨야 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 개천지 조성에 공을 세운 분들을 기리는 비석 등 선정비들이 못둑에 줄지어 세워져 있다. ⓒ 정만진
안계평야에 물을 대는 저수지라면 안계의 개천지, 구천의 조성지가 으뜸이다. 삼한 이래 전국적 저수지였던 대제지는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꿩 대신 닭'이니 안계에 온 이상 개천지는 반드시 답사해야 한다.
게다가 개천지는 저수지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의 공덕비가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도 이름이 높은 저수지이다. 못둑 아래에 가면 개천지를 만들어낸 중요 인물들의 비석이 네 개나 세워져 있다. 현인복(玄仁福) 홍병도(洪秉道) 남정린(南廷麟) 세 분 현령을 기리며 '영원히 잊지 않겠노라(永世不忘)' 다짐하는 비가 셋, 그리고 개천지를 다시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강기덕(康基德) 이현우(李賢雨) 이진기(李鎭畿) 나채두(羅采斗) 손기인(孫基仁) 변홍묵(卞弘黙) 감종섭(康宗燮) 강재호(康在鎬) 정신흠(鄭臣欽) 김기영(金基榮) 김동환(金東煥) 변주섭(卞柱燮) 변정섭(卞貞燮) 강희섭(康羲燮) 변학수(卞翯秀) 변창섭(卞彰燮) 변무섭(卞武燮) 등 열일곱 분을 기려 세워둔 공덕비가 하나, 그렇게 네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서 안계평야를 바라보고 있다.
나라 안 어디에도 이렇게 호수 관련 공덕비를 한데 모아놓은 곳은 없다고 한다. 일찍이 삼한 시대에 대제지라는 전국적 저수지가 있었던 것도 이 지역의 자랑이지만, 농사를 위해 큰 못을 만든 이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못둑 아래에 나란히 모셔두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안계 사람들의 마음가짐 또한 대단한 자랑거리라 할 것이다.
▲ 봉성서당이 보이는 풍경 ⓒ 정만진
개천지를 오른쪽으로 도는 작은 길을 죽 따라 들어가며 호숫가 경치를 즐긴다. 길은 고불고불하지만 높고 낮은 고개를 넘나들지 않고 오롯이 평지를 달리기 때문에 아무런 긴장감 없이 자연의 평화를 만끽할 수 있다. 이윽고 길은 논 사이로 들어가고 작은 삼거리를 만난다. 여기서 우회전하면, 오르막이라는 낌새가 채 느껴지기도 전에 끝나는 얕은 고개를 넘으면서 오른쪽에 봉성서당(鳳城書堂)이 나타난다.
200년 이상의 세월 동안 많은 학생들을 배출해낸 봉성서당, 지금은 논 속에 묻힌 듯 작은 집 한 채가 되어 외로이 남아 있다. 훈장님과 제자들이 한문으로 된 책을 펼쳐놓고 땀을 흘려가며 공부를 했던 '사립학교'인데, 지금은 '폐교'가 된 것이다. 1628년에 처음 세워졌고, 1764년에 정세정(鄭世貞), 하임구(下賃龜), 장대만(張封萬), 김이용(金異龍), 정세전(鄭世錢) 등이 다시 설립하였지만, 해방 직후 철거된다. 지금 보는 집은 1986년에 자리를 옮겨 중건(重建)한 건물이다.
길은 얕은 산과 좁은 논들 사이로 2km가량 이어진다. 집은 거의 없다. 그러다가 길은 문득 옛날 미술 시간에 배운 홉 베마의 '미텔하르니스의 길'처럼 멋지게 곧은, 아름다운 가로수를 거느린 '걷고 싶은 길'로 탈바꿈을 한다. 천천히 간다. 하늘로 솟구친 듯한 나무들이 나그네의 마음을 느긋하게 만든다.
▲ 비안향교 명륜당 ⓒ 정만진
교촌(校村)은 향교(鄕校)가 '있는', 혹은 '있던' 마을(村)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마을에 교촌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는 것은 이곳에 지금도 향교가 있거나, 아니면 옛날에 향교가 있었다는 뜻이다. 향교가 있었지만 다른 곳으로 옮겨가버렸고 동네이름만 남은 곳으로는 대구광역시의 '교동'을 들 수 있다.
향교는 지금 말로 나타내자면 '공립학교'이다. 서원이나 그보다 규모가 작은 서당은 '사립학교'이다. 공립학교인 향교는 흔히 그 지역의 이름을 따서 '교명(校名)'을 붙인다. 대구향교, 의성향교……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곳은 안계면인데도 '비안향교'가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문화재자료 263호인 비안향교는 1423년(세종 5)을 전후하여 비안읍에 처음 지어졌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610년(광해군 2) 다시 지어졌다. 그 후 영조 때에 (1737년 또는 1767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그래서 '안계향교'가 아니라 '비안향교'인 것이다.
▲ '선돌마을'이라는 마을 이름을 낳은 안계면의 선돌. 의성군에서 가장 큰 입석이다. 높이 2m20cm. ⓒ 정만진
이제 28번 국도로 나가 좌회전을 하면 '선돌'이 나온다. 도로 오른쪽에 농협창고가 있는 마을이 선돌마을인데, 그 마을 중간쯤 도로가 위험하게 휘어지는 지점에 아득한 옛날 유적 '선돌'이 있다. 차는, 선돌을 지나 마을이 끝나는 무렵의 오른쪽 강변 둔덕에 주차해야 한다. 그리고 돌아가서 선돌과 정려각을 보고, 강가로 내려가 관어대(觀魚臺)와 부흥대(賦興臺)의 빼어난 경치도 즐기면 된다.
선돌마을 뒤편 절벽 아래는 경치도 대단하지만, 본래 배를 타고 구천면으로 넘어가던 나루터였다. 1970년대만 해도 언제나 뱃사공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배도 없고, 당연히 뱃사공도 기다리지 않는다. 경치가 무척 아름다워 그에 마을처녀들 마음에 바람이 든다고 절벽의 절반을 부수어 버렸다는 선돌의 위천 강변, 건너다니는 사람은 없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자연은 곱게 남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 단북면에서 바라보는 선돌의 부흥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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