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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버를 통해 남북한 대화의 장도 모색

[서평] 박홍규의 <마르틴 부버>

등록|2012.05.22 18:09 수정|2012.05.22 18:09

책겉그림박홍규의 〈마르틴 부버〉 ⓒ 홍성사



마르틴 부버. 그는 <나와 너>라는 위대한 고전을 남긴 유대 철학자요 교육학자다. 그 작품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한 '대화'란 인종과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수용과 공존을 뜻한다. 그 작품도 실은 독일인인 그의 아내 파울라 빈클러를 사랑한데서 촉발된 것이고, 그가 추구한 실제적인 대화의 장은 독일 나치를 향한 대항을 통해서, 비민주적이고 비문화적인 시오니즘과 투쟁한 데서 드러난다.

이는 박홍규의 <마르틴 부버>를 통해 환히 알 수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이상주의자로 각인된 부버를 재조명코자 한다. 단순히 '타자와의 대화'를 주창한 사상가로 그친 게 아니라 민족과 인류의 평화를 모색한 진정한 실천가였다는 게 그것이다. 이 책을 쓴 주요 목적도 그런 뜻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부버를 신학자라고 하지만 그가 믿는 유대교는 대단히 현실적인 종교다. 기독교와 달리 원죄도, 타락도, 구원도 믿지 않는다. 마음속에 있는 선과 악 중 어느 것을 택하려는 본성이 행동을 결정하고, 인간은 선을 좇아 성실하게 살면 된다고 본다. 부버는 이처럼 구체적, 현실적, 본질적인 것을 좋아했다."(32쪽)

부버를 신학자로 생각했던 나도 예전엔 '나와 너'의 '너'를 주로 신(神)으로만 이해했다. 그런데 부버의 '너'란 비단 신만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총칭한다는 걸 알게 됐다. 이른바 차별받는 유대인으로 태어난 그가 홀로코스트라는 억압을 받으면서도 그 고통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민족과 인류의 평화를 모색할 수 있었던 것은 비단 유대 종파인 하시딤으로만 극복했던 게 아니라 모든 삶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가 태어날 당시 유대인들은 유럽지역에서 많은 차별과 억압을 받은 게 사실이다. 그것은 밀로라드 파비치가 쓴 <하자르 사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박홍규는 그 책에 등장하는 '아슈케나지(Ashkenazi)' 유대인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다만 15세기의 스페인이 기독교 국가가 되면서 더 많은 유대인들을 박해했고, 그 결과 독일의 자유도시 프랑크푸르트와 함께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폴란드에 더 많은 유대인들이 정착했다고 소개한다.

그 뒤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게토에서 해방되고, 유대인들은 19세기 첫 10년 동안 유럽의 계몽주의 분위기에 휩쓸려 점차 낙관주의를 익히게 되었다고 밝힌다. 그것은 부버의 친구였던 츠바이크가 19세기 말의 오스트리아를 '안정의 황금시대'로 부른 데서 알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박홍규는 그와는 달리 19세기 말을 '세기말'의 혼돈과 고뇌의 시대였다고 평가한다. 1880년 러시아 황제가 폭탄 세례로 폭사하자 차르 정부가 유대인 소탕 정책을 수립한 데서 알 수 있고, 그때 유럽 지역에 대거 이주한 유대인들 가운데 부버의 가계(家系)도 포함되었다고 밝힌다.


"파울라가 독일인이었음에도 자신의 가족, 고향, 종교, 국가, 민족을 버리고 부버와 결혼했다는 점이 부버가 말하는 대화적 삶의 기본이었기에 <나와 너>를 쓰게 했다. 즉 대화적 삶의 기본은 타자의 확인과 포용이라는 점이 파울라와의 사랑과 결혼, 긴장과 친밀의 유대 속에서 실현 가능했고, 또한 그것이 옳고 바른 것임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180쪽)

그의 역작인 <나와 너>의 탄생 배경이라 할 수 있을까? 그만큼 자신과는 전혀 다른 독일 지배계층의 파울라가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후예인 자신을 지지하고 사랑해 준 데 대한 진정성을 깨달으면서 그 작품을 쓰게 됐다는 뜻이다. 참된 대화란 인종과 국적과 이데올로기를 떠나 서로 다른 주장과 가치를 존중하고 수용해 줄 때에 가능하다는 걸 그때 비로소 터득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이마르 공화국 끝 무렵 등장한 히틀러 체제는 모든 대화의 상황을 단절시키고 만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는데 그건 부버로서도 마찬가지였다. 1923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종교사·유대교 윤리 강사로 취임해 1930년까지 종교학 교수로 근무한 그 직책도 당국에 의해 박탈당하기 전에 스스로 사임했다고 밝힌다. 물론 부버는 히틀러 체제에 동의하거나 침묵한 독일 국민들을 향해 극렬히 비판했고, 설령 나치가 부버를 '유대인의 두목'으로 부를지라도 그는 악마에 대해 성실하게 답하고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독일인을 모방할 수 있음을 걱정했는데, 이런 걱정은 21세기의 이스라엘에서 벌어지고 있다. 유대 민족이라는 명분으로 사회를 모독하고 파괴하는 잔학성이 바로 그것이다. 부버는 히틀러를 나폴레옹의 캐리커처로 보았다. 모든 것이 그를 위해 불타오르나 그 자신은 차가운 불인 '악마로서의 너', 수백만 사람들에게 '너'이나 그에게는 누구도 '너'가 아닌 남자의 희화였다."(221쪽)

어쩌면 그런 잔혹한 추방령, 사악한 파괴성을 보았기에, 부버는 비민주적이고 비문화적인 시오니즘에 항의했던 것일까? 이른바 팔레스타인 땅에서 아랍 민족을 축출하는 것 말이다. 1938년 히브리 대학 사회학과의 사회철학 교수로 취임한 그는 팔레스타인 내에서 비극적 대립 대신에 아랍족속과 평화적인 정착을 주장했다. 그것은 유럽과 독일에서 겪은 자신들의 고통을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 똑같이 물려 줄 수 없다는 취지였을 것이다. 만약 똑같이 약탈하고 추방한다면 자신들도 히틀러와 전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지금 이 땅, 분단된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 부버는 어떤 의미일까? 그 분단은 남북 분단만이 아니라 계층의 분단, 빈부의 분단, 혈연·지연·학연 등으로 인한 각종의 인연적 분단 등 수 없이 많은 분단을 말한다. 따라서 지금 우리만큼 만남의 대화가 필요한 경우가 또 있을까? 그 원리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르고 각각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어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권력도 지배하지 않는 자치의 영역을 확보하며, 그런 권력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길 뿐이다."(324쪽)

이는 부버를 통해 우리사회가 실천하야 할 바를 제시한 박홍규의 외침이다. 부버가 남긴 발자국을 통해 남과 북이 대화의 장도 모색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걷고 있는 남한 내의 빈부격차를 해소할 방안도 깊이 논의하는 장을 마련하는 게 그것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부버가 꿈꾼 유토피아이자 실현 가능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부버를 다시 조명해야 할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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