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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아버지를 울게 만든 그녀를 만났습니다

[서평] 조영남의 <그녀, 패티김>과 아버지가 기억하는 패티김

등록|2012.05.31 09:24 수정|2012.05.31 09:26

▲ 파월장병 위문공연 중인 패티김 ⓒ PK프로덕션



틸~ 푸른 밤 하늘에 달빛이 사라져도
사랑은 영원한 것
틸~ 찬란한 태양이 그 빛을 잃어도
사랑은 영원한 것
오~ 그대의 품안에 안겨 속삭이던
사랑의 굳은 맹세
틸~ 강물이 흐르고 세월이 흘러도
사랑은 영원한 것~♪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시던 아버지의 동작이 멈췄다. 그리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떼지 못하신다. 예사롭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에 가족들 모두 숨죽여 화면을 지켜보았다. 은발의 여가수가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린다. 동시에 아버지의 눈에서도 눈물이 한 방울 흘러 내렸다.

치매에 걸리신 이후 아버지의 감정 표현은 대부분 분노와 우울이었다. 초기에는 본인이나 주변사람이 힘겨울 만큼 화를 내거나 우울해 하거나 하는 상태가 반복되었지만 치매 치료를 받은 후로는 격한 감정기복이 사라진 대신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사물을 볼 때나 상황을 대할 때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시다. 

그런 아버지가 TV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신다. 심지어 말조차 잘 하지 않으시는 입을 열어 조그맣게 소리 내어 따라 부르기까지 한다. 

Till the rivers flow up stream
Till lovers cease to dream
Till then I'm yours be mine

분명히 아버지는 그렇게 노래했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기억하는 그녀, 패티김

올해 일흔여덟 되신 아버지의 젊은 시절, 패티김은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저 하늘의 태양이었고 별이었으며 여신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부대 쇼리(shorty : 미군들이 키 작고 어린 한국인 잡부를 불러 이르는 말)로 일했던 것을 계기로 잠시 미군부대 관련 일을 한 적이 있다는 아버지. 친하게 지내던 미군장병이 초콜릿 몇 개를 쥐어주면 차마 자신에 입에 넣지 못하고 가슴에 품고 와 동생들과 부모님 입에 한 조각씩 넣어주었다는 추억을 귀가 닳도록 들려주셨던 아버지가 초콜릿 만큼이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 당시 미8군에 출입하던 패티김을 직접 보았다는 것이었다.

패티김이 방송에 출연하고 인기를 얻은 이후에도 몇 차례 그녀가 노래하는 장면을 가깝게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는 아버지. 어쩌면 아버지는 그 시절부터 그녀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먼 발치에서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스타였던 그녀를 짝사랑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아버지 기억 속의 패티김은 늘 20대다. ⓒ PK프로덕션



"아버지. 틸이에요. 아버지가 좋아하는 노래. 기억하시는구나. 패티김 지금도 좋으시죠?"
"……"

대답 대신 미간을 좁히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시는 아버지. 아버지는 화면에 나온 은발의 그녀에게서 당신이 기억하는 20대의 패티김의 모습을 찾고 계신 듯했다.

"아버지 패티김 맞아요. 아버지도 나이 드셨으니 패티김도 나이 들었지. 아버지처럼 머리가 백발이네. 아버지랑 똑같네요."

그제야 아버지가 힘겹게 한마디를 하신다.

"저게 패티야? 패티도 할머니가 다 되었네. 패티도 늙었네."
"그럼요. 그래도 얼마나 멋있어요. 일흔 넷인데 여전히 멋지잖아요."
"……"

아버지는 대꾸를 하는 대신 피곤한 듯 눈을 감고 다시 그녀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듯하더니 잠들어 버리셨다.

아버지는 꿈속에서 '그녀' 패티김을 만나고 계실까. 20대 청년시절로 돌아가 스무살의 패티김을 만나고 계실까.

'여인 김혜자'의 솔직한 삶이 담긴 책 <그녀, 패티김>

<그녀, 패티김>은 조영남이 묻고 패티김이 답한 내용을 대화체로 고스란히 담은 책이다. 책을 펼치면 두 사람의 유쾌한 대화가 살아나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 듣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인생의 황혼 무렵 멋지게 은퇴를 선언한 가수 패티김이 오랜 시간 가깝게 지내던 후배 조영남을 만나 털어 놓은 자신의 55년. 그 속에는 대스타 패티김으로서의 인생 55년이 있는가 하면 딸이며 아내이고 어머니이며 또한 할머니이기도 한 '여인 김혜자'의 솔직한 삶에 대한 이야기도 진솔하게 담겨 있다.

운명같은 데뷔와 그녀를 그녀일 수 있게 했던 기막힌 만남들. 그녀가 그리도 사랑했던 노래와 무대.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과 이별….

'이 많은 사연과 이야기를 어떻게 그 긴 세월동안 가슴속에 꼭꼭 담아두었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 놓았다. 55년 가수인생의 마감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대중 앞에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 은퇴를 선언한 가수 패티김 ⓒ PK프로덕션



책속에 담긴 그녀의 오래된 사진들은 한국대중문화사의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그녀가 불렀던 노래 역시 한 대중가수의 삶을 넘어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시대의 역사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 감히 바라볼 수도 없었던 스타 패티김이 황혼녘 황홀한 노을로 다가와 우리에게 따뜻하게 말을 건넨다.

"이제는 저 높은 하늘에서 내려와 여러분의 영원한 친구로 남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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