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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꿍아, 아직은 좀 더 신나게 놀자꾸나

[초보아빠의 좌충우돌 육아일기 17] 점점 강해지는 사교육의 유혹

등록|2012.05.25 11:16 수정|2012.05.25 11:16
선물? 뇌물!

늦은 밤이었다. 아직도 자지 않는 아이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아내에게 낯선 전화가 걸려 왔다. 내가 옆에 있는 게 조금 불편했는지 어설프게 통화한 뒤 누구 좀 잠깐 만나고 오겠다며 밖으로 휑하니 나가버린 아내.

10분쯤 지났을까? 엄마가 갑자기 사라져 울먹이는 둘째를 안고 서성이고 있는데 이윽고 아내가 돌아왔다. 손에는 꽤 무거워 보이는 라면박스 크기의 박스가 들려 있었다.

"뭐야?"
"응. 채연이 선생님이 선물이라고 책을 주고 갔네."

"책? 이렇게 많이? 비싸 보이는데?"
"그러게. 30만 원이네. 저번에 선생님 오셨을 때 내가 백과사전에 관심이 있다고 하니 그때부터 계속 사라고 하는 거야. 수업 끝내고 40~50분 동안 가지도 않고. 그러더니 오늘은 선물이라고 이것을 주고 가네. 밤 늦은 시간에 굳이 찾아와서. 백과사전 사라 이거지. 선물이 아냐 뇌물이지."

"백과사전이 얼만데?"
"130만 원."

"헉. 130만원? 그래서 사려고?"
"아니. 그런데 밤늦게 와서 선물이라고 주니 어떻게 안 받겠어. 그냥 다음 주에 오시면 돌려주지 뭐."

열심히 책 읽고 있는 딸래미영재라고 착각하지 말자 ⓒ 정가람


안 봐도 뻔한 스토리였다. 아내는 1주일에 한 번, 어린이집에 가지 않는 까꿍이를 위해 대신 학습지 선생님을 붙여주고 있었는데, 그 선생님이 자기 회사의 백과사전을 팔겠다며 적극적으로 아내를 설득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내가 남들에게 모진 소리 잘 못하지, 백과사전에 관심도 있다지, 아이는 선생님이 가져다 주는 책만 봐도 신난다며 떠들어대지, 그러니 아내를 최적의 타깃으로 삼을 수밖에. 더군다나 아내는 실적에 매달리는 선생님을 보면서 영업사원인 나를 떠올렸다나 어쨌다나.

참을 수 없었다. 난 아내의 전화기를 냉큼 가로챈 뒤 다짜고짜 그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다시 오셔서 이 책을 가지고 가시라고 말했다. 내가 나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빨리 오시라고.

자연은 책으로 배우지 않는다

책은 장난감이다자신이 가지고 놀고 싶을 때 주자 ⓒ 정가람


아파트 앞에서 서성거리길 10분쯤 지났을까? 선생님인 듯한 여성이 다가왔고 나는 인사를 한 뒤 책박스를 선생님의 차까지 실어다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맙습니다. 우리 채연이가 예뻐서 이 책을 주셨다고. 그런데 선물로 받기에는 30만 원이 좀 부담되네요."
"아니요, 채연 아버님. 부담 느끼시지 마세요. 채연이가 너무 예쁘고, 또 채연이가 책을 무척 좋아하기에..."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네요. 아이들이야 어른들이 놀아주면 뭐든 좋아하죠. 채연이가 예뻐서 정 뭔가 해주고 싶으시다면 책 말고 옷 같은 걸로 주셔도 돼요. 아, 채연이는 먹는 것도 좋아하니 음식도 괜찮겠네요. 다만 친구 사이에도 5만 원 넘으면 부담되니까 그 밑으로요. 어쨌든 이 책은 가져가 주세요."
"책 말고 다른 건 저희가 할 수 없는데. 그러시지 마시고 책 받으세요 아버님. 지금 채연이 나이는 뇌가 한창 발달할 나이라서 여러 자극이 필요하답니다."

"저도 배울 만큼 배웠고, 책도 많이 읽었지만 그건 철학의 문제인 것 같네요. 물론 백과사전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아직 4살짜리 아이한테는 무리인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도 어머니가 당신 임의로 사준 책보다는 제가 찾아본 책이 더 기억에 남고요. 나중에 까꿍이가 필요하다고 하면 그때 사줄 겁니다."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는 것이. 그게 채연이를 위하는 길이랍니다."

"그럼 저희가 채연이를 위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아내와 저의 생각은 분명합니다. 아내는 지리산에서 자라 누구보다 자연은 책이 아닌 자연에서 직접 배워야 한다고 생각고요. 또 아이가 정 책을 읽고 싶다면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을 가면 되는데, 국가가 도서관을 많이 지어주지 못하니까 개인이  돈을 들여 책을 많이 소장하는 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지불해야 하는 복지비를 개인이 지불하는 현실인데, 출판사가 이를 더 경쟁적으로 조장하잖아요. 이건 문제죠. 우리가 할 일은 무작정 전집을 사주는 게 아니라 국가가 좀 더 많은 도서관을 짓게 만드는 거예요."
"안 되겠네요. 죄송합니다."

우리 집의 유아책들많이 부족한 편인가? ⓒ 정가람


그렇게 나는 선생님에게 유아전집을 돌려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궁금한 듯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느냐고 물었다. 자신도 선생님이 올 때마다 백과사전을 권해서 무척이나 곤란했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성장과 학습에 관해 어쭙잖게 교육받은 걸 자신에게 강의하려고 해서 짜증났다는 아내. 그 이야기를 들으니 갓 보험회사에 입사해 강의실에서 들은 바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던 친구들이 생각나 조금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먹고 사려고 하는 일인데 내가 너무 야박했던 것은 아닌지.

우리 아이가 영재라고?

아내는 처음 아이에게 학습지 교사를 붙일 때 꽤나 많은 고민을 했었다. 일정 나이가 되면 평균의 아이들처럼 학원도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보다도 사교육에 대해 더 부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리산 밑에서 뛰어 놀며, 초등학교 교사 부모를 두어 집에서 공부했던 아내의 입장으로서는 당연할 수밖에.

그러나 그런 아내가 까꿍이에게 학습지를 시키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둘째 때문이었다. 누나와 얼마 차이나지 않는 둘째가 아내한테만 달려들자 첫째를 봐줄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었고, 그런 첫째가 안쓰러워진 결과 아내는 아이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아내에게 까꿍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자고 했지만, 아내는 반대했다. 자신이 할 수만 있다면 아이를 너무 빨리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는 것이 아이에게 좋다는 것이었고, 또 둘째가 첫째와 잘 놀다보니 그게 자신이 집에서 작업할 때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학습지는 결국 이와 같은 아내의 고뇌의 산물이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는 싫지만 그렇다고 아이와 24시간 놀아주지 못하는 엄마의 마음.

누나 따라하는 동생뭐든지 따라한다 ⓒ 정가람


문제는 그런 학습지가 사교육의 시작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마음 먹기에 달렸겠지만 학습지 선생님은 아내에게 끊임없이 다른 엄마들의 상황을 전했고, 이는 주1회 정도 학습지만 하겠다는 아내의 초심을 흔들기 충분했다. 학습지 선생님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 부부는 책도 얼마 사주지 않는 등 아이를 너무 방치하고 있으며, 또 우리 아이는 무식한 부모를 잘 못 만나 또래 아이들보다 뒤떨어지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우리 아이가 평균보다 못 할 수 있다는 공포 마케팅이었다. 남들도 하니까 나도 해야 한다는 전형적인 죄수 딜레마. 이러니 사교육은 한 번 하기 시작하면 끊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가계 지출이 아무리 줄어도 끝까지 버틴다는 사교육 지출의 비밀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다. 4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부모들의 욕심과 불안을 불모로 마케팅의 대상으로 삼는 사교육 자본의 탐욕.

나는 우리 아이가 영재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확률적으로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낮은 확률 때문에 아이의 일상을 부모의 마음대로 휘저을 생각은 없다. 송곳이 어떻게든 주머니를 삐져나오듯, 녀석이 영재라면 어떻게든 드러나겠지.

까꿍아, 아빠는 네가 네 나이에 맞게 자랐으면 좋겠다. 물론 네 나이에 맞는 게 어떤 것인지는 나도 열심히 공부하고 관찰해야겠지만 최소한 나의 욕심 때문에 네가 괴로워 하는 건 보기 싫구나. 아직까지는 좀 더 신나게 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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