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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공북학교를 아십니까?

1919년 4월 3일 여주군 독립만세운동의 사적

등록|2012.05.25 13:42 수정|2012.05.25 13:42
만세운동 사적지 공북학교를 찾아서

"혹시 공북학교라고 아세요? 북내면 당우리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벌인 곳인데"

우리 지역(경기도 여주군)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이 질문에 대한 시원한 답변을 하지 못한다.

1919년 항일독립만세운동을 말하면 우리는 '류관순 열사'나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 등을 흔히 떠올리지만, 우리 지역(여주군)의 독립만세운동에 대해서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관심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1919년 고종 황제의 인산일(왕의 장례식)인 3월 1일 정오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에 독립선언식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됐다. 이 비폭력 시위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중요한 사건이다.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부르는 이날의 거사는 천도교․기독교․불교 3개 교단이 주축이 되어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돼 들불처럼 전국을 휩쓸었으며, 3월 1일 이후 일제가 집계한 발표에 따르면 집회 횟수 1542회, 참가인원 202만3089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5961명, 피검자수 5만770명이나 되었다.

공북학교(拱北學校).

북내면 당우리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공북학교를 찾는 여정은 지난 2009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여주신문에 근무하던 양병모 기자는 공북학교의 만세운동에 대해 취재하던 중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어 여러 사람들이 추정하는 위치에 대한 내용으로 기사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여주군 향토역사에 관심이 높은 한 문화계 관계자도 "정확한 위치는 모르고 지금의 북내초등학교로 추정된다"며 여주군 북내면사무소와 북내면 주민들을 여럿 인터뷰했지만 종내 그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공북학교 위치여주군 북내면 당우리 ⓒ 다음 지도에서 화면 갈무리하여 편집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추정하는 북내초등학교(북내면 당우리 175번지)는 여주군사에 따르면, 1919년 10월 23일 북내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였으며 6.25전쟁 중인 1951년 5월 7일 피폭 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던 중 2009년 3월 2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발행한 『국내 항일독립운동 사적지 조사보고서』2편(경기남부 독립운동사적지)에 그 위치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당우리 238번지…바로 공북학교의 위치다. 여주읍에서 345호 지방도를 따라 북내면 당우리로 향하다 옛길인 여양2로를 통해 북내면 당우리 소재지로 들어가다 보면 왼쪽의 북내면 신남리에서 연결되는 도로와 맞닿은 당우리 쪽 왼편이 바로 거기다.

청년들이 주도한 여주군의 항일 만세운동

여주군에서는 지금 4대강 사업의 이포보로 널리 알려진 여주군 금사면 이포(梨浦)마을에서 4월 1일 여주군 만세운동의 최다 인원인 3000여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여주읍(약1천명)과 북내면 등으로 만세시위가 번져나갔다. 당시 이포마을에는 일제탄압의 상징인 헌병주재소가 있었다고 한다.

4월 3일에는 신륵사 승려인 김용식(일명 仁瓚)이 천송리(川松里)에서 주도한 시위대와 최영무(崔永武), 이원기(李元基) 등이 주도한 당우리(堂隅里) 공북학교(拱北學校) 독립만세시위대가 각각 여주읍내로 행진하였다. 또 이날 밤 대신면(大神面) 윤촌리(潤村里) 농민 50여명도 횃불 시위를 전개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조선병탄에 항거했다.

북내면 당우리 '공북학교 만세운동'은 여주군의 만세운동 중에서 아주 짧은 시간 내 조직되어 800여명이 참가하였으며, 주도자들 중에는 19세에서 20세 남짓의 젊은이들이 많았다. 당시 최연장자인 최영무가 35세일 정도로 젊은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일사불란하게 전게되었다. 각종 기록을 참고하여 '공북학교 만세운동'을 일자별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4월 1일, 격문과 태극기를 만들고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여주군 북내면 외룡리 280번지 한 농가의 사랑채. 이 집의 아들인 이원문(19세)은 사랑채에 드나들 때마다 주위를 경계하는 듯 주위를 둘러보다 방으로 들어간다. 방 안에는 스물 안팎의 청년들이 뭔가 바닥에 놓인 글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심각하지만 결의에 찬 의논을 펼치고 있었다.

이날 청년들이 둘러 앉아 논의한 글은 이 마을의 이원기(李元基, 20세)가 여주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독립선언서를 참고하여 미리 작성한 독립만세운동을 벌이자는 내용의 격문이다.

격문의 요지는 『경기도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하였으니 이 기회에 여주군에서도 오는 4월 5일의 여주읍내 장날을 기하여 독립운동을 행할 터이므로 여주읍의 다락문 앞으로 모이라』는 내용으로, 이원문(북내면 외룡리)과 조경호(趙經鎬, 19세, 강천면 걸은리)는 이원기와 함께 이런 내용을 베껴서 42장을 만들었다.

※1) '다락문'은 당시 여주군청의 정문으로 지금은 여주읍 남한강변으로 옮겨진 영월루를 말한다. 2) 일제의 판결문에는 이날 이원문의 집에 함께 한 사람들은 이원기와 조경호외에도 북내면 장암리의 원필희(元弼喜, 24세)와 강영조(26세, 북내면 외룡리)가 함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날 이들이 필사한 격문은 조경호가 26장, 원필희가 1장, 이원기가 14장, 심상의(沈相儀)가 1장씩 가지고 배포를 담당하였다. 이원기는 이원문에게 7장을 주었는데, 이원문은 다시 이를 김봉수(金鳳洙)에게 주어 배포를 부탁한다.

이들이 이런 내용의 격문을 만들게 된 것은 이날 조경호가 여주로 돌아오는 도중 경성에 사는 사람에게 들으니 "경성에서는 여주 및 이천 사람에게 먹일 것으로서 돼지먹이를 저축하여 둔 모양이다"라는 말이 돈다며, "여주 사람도 조선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수치가 된다"고 생각하여 여주에서 만세운동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격문을 작성한 것이다.

4월 2일, 일장기로 태극기를 만들다

북내면 외룡리 이원기(20세)의 집에서 독립만세운동의 취지에 공감한 같은 마을의 강영조(姜永祚, 26세), 이원문(19세)과 장암리의 원필희 등이 각자 일장기를 구해 와 만세운동 때 사용하기 위해 일장기를 고쳐 태극기를 함께 만들었다.

4월  3일, 800여명 만세운동 펼치다

장암리(長岩里) 구장 원도기(元道基)의 집에서 이원기(20세)와 당시 북내면사무소 면서기 견습으로 있던 김학수(金學洙, 20세, 북내면 신남리), 원필희(24세) 등은 독립만세운동에 쓸 또 다른 태극기를 함께 만드는 등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현암리(峴岩里) 주민 50~60명이 오금리로 와서 4월 2일 북내면장 조석영(曺錫永)이 일제에 강제로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오금리에 사는 최영무(崔永武, 35세)는 면장의 방면을 요구하기 위하여 북내면으로 갔으나 면장이 이미 풀려난 뒤였다.

최영무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장암리 원도기의 집에 들러 그곳에서 시위 준비를 하고 있던 이원기 등을 만나 함께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이런 와중에 면장이 잡혀가고 이포와 여주읍 주민들의 만세운동으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현암리 사람들은 최영무와 강두영(姜斗永, 21세, 북내면 오금리), 강만길(姜萬吉, 30세, 북내면 오금리)・최명용(崔明用, 27세, 북내면 오금리) 등에게 '빨리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하자'고 독촉을 하고, 이들은 애초 여주읍 장날인 4월 5일을 기해 만세운동을 벌이려던 계획을 바꾸어 이날 바로 결행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이원기(20세)와 최영무(35세)는 장암리, 외룡리(外龍里), 덕산리(德山里) 등을 맡고, 강두영(21세)과 강영조(26세)는 현암리(峴岩里), 장암리(長岩里), 덕산리(德山里), 와룡리(臥龍里) 등의 마을을 돌아 다니면서 주민들을 규합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며 당장 만세운동에 함께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시작된 만세운동임에도 이날 저녁 당우리 공북학교에 모인 사람들은 8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때 면장 조석영이 시위군중들에게 해산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최영무는 오히려 면장에게 만세운동에 동참하도록 권유하였다.

이날 밤 최영무는 선두에서 태극기를 들고 시위군중을 지휘하며 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로 행진하였고, 이원기, 김학수, 강두영, 최명용, 강만길, 강두영 등 십수 명의 주도자들은 군중이 이탈하지 않도록 독려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이 오학리(五鶴里)를 지날 무렵 일제의 발포로 시위대열은 해산하고 말았다.

만세운동 후 일제의 탄압과 만행

이후 일제는 대대적인 시위 주도자에 대한 체포에 나섰다. 일제는 4월 7일 오후 1시부터 헌병과 보병으로 체포반을 편성하고 신남리(新南里), 오금리, 현암리 일대에서 만세시위 주도자를 체포하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 체포반이 현암리에 도달했을 때 2백여 명의 주민은 이들에게 야유를 하고 곤봉을 휘두르고 돌을 던지며 강력히 항거하였다. 위협을 느낀 일제는 주민들을 향해 발포하였다. 일제의 야만적 발포로 말미암아 주민 3명이 적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1명이 부상당하였다.

일제에 체포된 북내면 시위 주도자 중 10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최영무 징역1년 6월, 이원기 징역 1년, 강두영․원필희․김학수는 징역 8월, 최명용․강만길․이원문․강영조․조경호는 각각 태(笞) 90을 선고받았다.

'공북학교 만세운동 기념비' 라도

이번 취재를 계기로 나라가 외세의 침략을 받았을 때 목숨을 걸고 구국운동에 투신했던 여주의 많은 선인들에 대해 지역에서 좀더 높은 관심을 가지길 촉구한다.

인근 이천시의 경우 신둔면 수광리에 '기미독립선언 신둔 의거 기념비'를 비롯하여 이천시 창전동 이천초등학교 앞에 이천출신 '이수흥 열사 동상', 그 부근에 '순국선열 유택수 선생 추모비' 등 3개의 국내 독립운동 사적지를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우리 여주군에도 일제강점기에 항일독립운동에 떨쳐나선 많은 지사(志士)들이 있음에도 변변한 기념탑조차 갖추지 못한 현실은 참담하기만 하다.

기자는 현재 여주군 독립운동 사적지의 하나인 공북학교 자리인 북내면 당우리 238번지의 토지 소유주인 한 종교법인에 '공북학교 만세운동 기념비'를 건립하기 위한 토지사용 승낙이 가능한지 의견을 물어보고 있다.

기자는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거나 외세의 침략을 받았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섰던 우리 선조들의 얼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공북학교 터에 '공북학교 만세운동 기념비'가 건립되길 희망하며, 뜻있는 지역주민들의 함께 이뤄나가기 기대한다.

※ 이 기사는 독립기념관의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국내 항일독립운동 사적지 조사보고서』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자료집』, 『일제침략하 한국 36년사』, 『여주군지』와 『여주군사』 등의 자료를 참고 하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여주사람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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